맑고 투명한 순수의 시대를 지나, 이제 어둡고 격정적인 기후의 중심에 자신을 던져보고 싶다는 배우 임수정. 베를린의 레드카펫은 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였을지도 모른다.
“상 받을 만한 영화는 아니에요.” 수상 가능성을 묻자 임수정은 이렇게 말했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닷새 전, 구호의 드레스 피팅을 위해 만난 자리였다. 애써 기대를 감추고 태연을 가장하기 위한 가짜 도리질이 아니라 담담한 예상이었고, 과연 그의 말처럼 되었다. 하지만 여우주연상에 연연해하지 않은 채로 임수정은 배우에게 주어진 최상의 축제인 영화제라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중이었다. 행사가 시작하기 전의 단계, 그러니까 드레스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한껏 그리고 흠뻑. “3대 영화제에 가는 건 운명 같아요. 한두 가지 우연의 도움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들거든요.” 임수정에게는 2007년 <사이보그라도 괜찮아> 이후 4년 만의 두 번째, 운명이 밀어준 베를린과의 만남이었다. 3주가 지나고 베를린에 다녀온 그를 만났을 때는 큰 행사를 앞두고 얼굴에 드리웠던 예민한 긴장이 사라지고 편안해져 있었다. “저에게는 몇 년 만의 큰 자극이었어요. 영화제의 공기는 배우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해줘요. 한국에서는 배우로 일하면서 큰 관심과 인기를 받지만 그건 존중받는 느낌과는 다르거든요. 연기하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는 것, 그게 레드카펫이에요.” 임수정이 다녀온 도시는 영하 10도의 겨울 베를린이었지만, 그의 달뜬 말투는 열대의 로맨틱한 도시로 다녀온 여름휴가를 회상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자신을 움직이는 연료에 불을 지피고 앞으로의 삶에 더 기대할 것이 많아진 이들이 숨기지 못하는, 강렬한 생기가 흘렀다. 스스로의 말처럼 임수정은 남들보다 더딘 자기만의 속도로 가고 있는 배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천히 걸을 때 풍경은 우리에게 더 자세한 속살까지 보여준다. 마흔 이후는 상상할 수 없으나 지금 누리는 30대 여배우의 삶에 대해서는 참 좋다고 말할 수 있다는, 임수정이 누리고 있는 현재처럼.
오늘 뭐하고 있다가 나왔나? 영화 <여배우들>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집에서 나른하고 외롭게 뻗어 있다가 마지못해 밖으로 나오는 여배우의 모습이었다. 일단 밖으로 나오면 반짝여야 하는 사람으로 사는 건 참 피곤할 것 같다.
나도 그 영화 보면서 이해되더라. 집에서 꾸미지 않은 옷차림으로 편하게 있다가 씻고 차려입고 그런 게 참 귀찮다. 이제는 집 안과 밖의 여배우의 삶의 괴리에 대해서 익숙해졌다. 최소 10년 이상 된 여배우들은 그럴 거다. 내 경우엔 밖에 워낙 자주 안 나오는 걸로 해결을 봤다. 몇 년 전엔 혼자서 자주 돌아다닌 시기도 반짝 있었는데 최근에는 흥미를 잃었다.
스타일리스트랑, 매니저를 보호막처럼 주변에 두르고 다니는 여배우도 있던데, 당신은 그렇진 않나?
누굴 만나야 하는 목적이 있을 때만 매니저 한 명이랑 같이 가는데, 그건 내가 워낙 위치를 잘 못 찾아서다. 일하는 파트너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와 같이 일하면서 파트너십을 유지하기도 하면서 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예인이 있더라. 나는 개인 생활과 일이 분리된 편이다.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동료애를 유지하는 쪽인 것 같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드레스 피팅 때 처음 만났는데 의외로 밝고 활달해서 놀랐다.
임수정이라고 하면 보통 말 없고 조용한 이미지로 떠올리는데 그것도 사실 나의 모습이다. 언젠가는 종일 의식적으로 지켜보다가 ‘내가 정말 말을 안 하는 사람이구나’ 깨닫고 작은 쇼크를 받았을 정도다. 그런데 또 밖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내 주장이 많아진다. 사람들과 의견 교환하는 걸 좋아한다. 배우라는 게 스스로 갖고 있는 빛나는 부분도 있어야겠지만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빛날 수 있는 존재기도 하다. 나한테 잘 어울리는 게 뭘까 적극적으로 묻고 주변에 많이 도움을 구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그날의 드레스 피팅 자리에서처럼, 내가 원하는 걸 전문적으로 구현해줄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받고 싶다. 그런 면에서 접근하니까 대화가 많아지는 거 같다.
마찬가지로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달변일 줄 몰랐다.
(웃음) 요럴 때만 말을 한다. 일을 안 하고 있을 때는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시체놀이 하듯이 지낸다. 배우들 중에서도 자기 개인 생활에서 활달하고 에너제틱한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 많이 만나고 술 마시는 거,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는… 반면에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는 강한 인상을 안 줄 텐데 어떤 롤을 맡아야 할 때만 갖고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쏟는 그런 사람도 있고. 난 단연 후자 쪽이다. 에너지를 잘 갖고 있다가 요렇게 그때 닥쳐서 막 쓰고 나면 소멸된다. ‘아이구 지친다…’ 이러고 시름시름 앓는 거지(웃음).
언젠가 잠을 12시간까지도 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체질상 잠을 많이 자야 한다고 한의원 같은 데서 그러더라. 큰 병치레는 없지만 피곤을 자주 느끼는 스타일이다. 활동이 없을 때는 불규칙적으로 자는 게 문제 같다. 이런 게 직업병 같기도 하다.
촬영 때문에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거 말인가?
촬영할 때는 오히려 규칙적인 일상이 있으니까 낫다. 별로 잠을 자고 싶지 않아도 내일 촬영을 위해 억지로 자둔다거나 하니까. 그보다는 개인 시간 보낼 때 더 불규칙적이다. 나한테 주어진 자유의 시간이 좋은 것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 배우들에게는 자유 시간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생각도 많아지고.
어떤 배우들은 쉴 때 아무것도 안 본다고 하더라. 좋은 영화를 보면 내가 했어야 하는 데 싶어서 괴롭고, 나쁜 영화를 보면 그것대로 괴로워지니까.
그것도 좋은 방법인 거 같지만 난 쉴 때 뭐 보는 거 되게 좋아한다. 일하는 동안 놓친 거 꼭 기억해놨다가 보기도 하고 주변 감독님들이 추천을 많이 해주셔서 고전 영화도 보기 시작했다. 배울 게 많더라. 좋은 영화 볼 수 있는 기회면 대학로도 가고 종로도 가고 그런다.
베를린은 어땠나? 출발 전에 만났을 때는 영화제에 가서 ‘난 정말 배우구나’ 하는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어떤 인상적인 경험이 있었나?
레드카펫은 이미 한 번 경험해서 그런지 아주 설레진 않았다. 확실히 긴장하기보다는 2백 프로 그 순간을 즐기고 온 거 같다. 사람들이 재촉하지 않았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팬들이나 기자들과 레드카펫 위에서 즐길 수 있었을 거 같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관객들이 꽉 차 있고 라이트를 비춰주면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립해서 박수를 쳐주더라. 영화제가, 배우라면 한 번씩은 꼭 가고 싶은 자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게 그런 관심과 환대 때문이다. 배우로서 존중과 예우를 받는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는 배우로 일하면서 관심과 인기를 받지만 그건 존중받는 느낌과는 다르다. 스포트라이트, 검색어에 올라가고 이슈화되는 개념과 다르게 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느껴진다고 할까. 영화제의 공기는 배우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해준다.
구호에서 당신을 위해 디자인한 드레스는 굉장히 유니크했다. 맘에 들었나?
어느 때보다 나한테 잘 맞는 드레스가 탄생했다고 느꼈다. 가기 전까지 여러 차례 피팅도 거치고 그 디자인이 나오기 전까지 회의도 많이 했으니까. 그걸 입으니 구겨져 있던 어깨가 펴지고 자세도 당당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우아해지기도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뗄 뗀 마치 귀족이 된 거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랑 잘 맞는 드레스였고, 나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 에디터
- 황선우
- 포토그래퍼
- 김보성
- 스탭
- 컨트리뷰팅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헤어/한지선, 메이크업 /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