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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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 나른하게 늘어져 보드라운 포즈를 취하다가도 호기심이 많은 눈을 빛내는 배우, 고준희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허리에 리본 장식이 있는 베스트는 Dior, 초커로 표현한 골드 체인 네크리스는 Vintage Hollywood 제품. 레이스 브라톱과 스타킹,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허리에 리본 장식이 있는 베스트는 Dior, 초커로 표현한 골드 체인 네크리스는 Vintage Hollywood 제품. 레이스 브라톱과 스타킹,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길쭉하고 시원스러운 실루엣이 스튜디오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인터뷰 대상이 뭘 입고 나타날지에 대해 언제나 궁금한 건 아니지만 오늘이 예외인 건, 그 인터뷰이가 고준희기 때문이다. 스타일과 패션을 두고 자주 연관검색어로 포착되는 사람이고, 캐릭터에도 자신에게도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나와 드라마 보는 재미를 더하는 인물이니까. 담백한 검은 티셔츠와 진, 하이톱 컨버스, 스타디움 점퍼 차림은 훌쩍 키가 큰 이 배우를 예쁘장한 사내아이처럼 보이게 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 주변으로는 물기가 채 덜 마른 갈색 단발머리가 경쾌한 리듬으로 흔들 린다. “옷을 잘 입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다만 같이 일하는 스타일 리스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서로 호흡이 잘 맞는 건 분명해요. 평상 시에는 거의 블랙이나 모노톤으로 입고 포인트를 하나 주는 걸 좋아해요. 날씬해 보이려고 검은 바지, 발이 작아 보였으면 해서 검은 운동화…. 제가 워낙 앙증맞은 거랑은 거리가 멀잖아요(웃음).”

사람들이 주로 고준희에게서 보는 것, 보길 원하는 건 발랄하고 거침없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다. 드라마 홈페이지의 인물 설정 항목을 찾아 들어가면 아마도 ‘자기 주장이 강하고 정의감에 차 있지만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순진한 면이 있다’라고 쓰여 있을 것 같은 타입. 그가 영화 <건축 학개론>이나 드라마 <추적자>에서처럼 그런 이미지로 캐스팅된 작품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것 또한 사실이다. “어두운 캐릭터를 못 해보았어요. 저한테서는 씩씩한 모습을 원하시나봐요.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순정의 대상이기보다는, 그 남자에게 밝은 에너지와 용기를 주는 여자? 활짝 크게 웃는 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 그러나 누구 나와 마찬가지로 고준희에게도 크게 웃는 얼굴 이면에 작고 다양한 표정이 존재한다. 그런 세세하고 다채로운 감정의 결을 앞으로 얼마나 어떻게 보여줄까 하는 점이야말로 이 서른 살 배우의 지금 가장 큰 화두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여자 연예인으로 살면서 힘든 점도 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하고 같이 재밌게 일할 수 있잖아요.” 고준희가, 활짝 크게 웃었다.

넥 칼라에 가죽이 덧대어 있는 트위드 재킷은 Chanel, 레이스 뷔스티에와 누드 톤 스타킹은 모두 Agent Provocateur 제품.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넥 칼라에 가죽이 덧대어 있는 트위드 재킷은 Chanel, 레이스 뷔스티에와 누드 톤 스타킹은 모두 Agent Provocateur 제품. 쇼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레드카펫>이라는 코미디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처음 출연하는 장르인 것 같은데.

예능 프로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한 이후로 그렇게 연상되어서인지 로맨틱 코미디 시나리오가 집중적으로 들어오더라. 그전에는 도시적이고 세련된 직업을 가진 여자, 혹은 섹시한 캐릭터가 많았는데 달라졌다. 작년에 촬영했는데 서른이 되기 전에 이렇게 말랑말랑한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선택했다.

아직 20대인 줄 알았다.

올해로 서른이 됐다. 머리가 짧아서 그런지 더 어리게 봐주는 분들이 많다.

또래 남자 배우들이 여럿 함께 출연하는 영화다. 현장에서의 분위기는 어땠나?

윤계상, 오정세, 조달환, 황찬성 같은 배우들 덕분에 촬영장에서 너무 재밌었다. 그전 작품들을 할 때는 내가 늘 막내였다. 고현정, 이미연, 손현주 선배 같은 분들께 많이 배웠지만 나이 차이도 많이 나니 조심스러웠다. 이번 현장에서는 남자 배우들과 장난도 많이 치고 즐거운 분위기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라고 의미 부여를 했는데 어떤 마음으로 1년을 보냈나?

스물아홉이던 지난해는 일을 하루도 안 쉬고 해서 고민이나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돌 스케줄이냐고 할 정도로, 밴에서 내리면 부산이고 자다가 눈뜨면 해외고 그랬다. 집에서 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몰아치던 촬영이 끝나고, 붕 뜬 느낌으로 올해 초 한동안을 보냈다. 목디스크로 건강도 좋지 않았다. 나이 앞자릿수가 바뀌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 싶은데 몸은 안 받쳐주고, 뭘 해야 할까 결정을 못 내리는 기분이었다. 시험 전날까지 계획표만 계속 짜는 것 같았다.

그런 시기를 어떻게 끝낼 수 있었나?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혼자 마음이 힘들었던 것처럼.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럽게 괜찮아졌다. 이사를 하고, 다시 일이 바빠지면서 나아진 것 같다.

밝고 명랑하고 당당한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다. 사람들이 당신에게서 그런 점을 주로 보는 걸까?

어두운 캐릭터를 못 해봤다. 나한테서는 씩씩한 모습을 원하시나 보다.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순정의 대상이기보다는, 그 남자에게 밝은 에너지와 용기를 주는 여자? 활짝 크게 웃는 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정의감 넘치는 부잣집 딸 역할도 단골이다(웃음). 자기 가족이나 아버지의 비리를 파헤치는 역 전문.

그러고 보니 유복하고 구김살 없는 인물을 자주 연기한 것 같다.

혹은 가난한 집이어도 어딘가 화려한 구석이 있는 애. 주눅들어서 왕자님을 기다렸다가 변하는 신데렐라가 아니라 원래 자신감에 넘치는… 아마 키가 커서 그런 이미지가 있는게 아닐까 싶다. 난 다양한 캐릭터를 하고 싶은데 왜 한정적인가 그런 고민도 했다.

배우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 아닐까? 한 작품을 잘해서 어떤 방식으로 각인되면 비슷한 배역의 제안이 계속 들어오는 패턴 말이다.

캐스팅하는 제작진 입장에서는 안전성을 보는 것 같다. 어떤 캐릭터에 대해 확인된 바가 있는 배우는 적어도 그 이하로는 안 떨어질 것 같으니까 안전한 거다. 아쉽긴 하다. 여기서 이렇게 해봤으니까 다른 걸 보여주고 싶은데 기회가 잘 오지 않는다는 게.

네크라인에 비즈 장식이 달린 원피스는 Saint Laurent 제품.

네크라인에 비즈 장식이 달린 원피스는 Saint Laurent 제품.

검정 오프숄더 원피스는 Low Classic 제품.

검정 오프숄더 원피스는 Low Classic 제품.

실제로 보니까 더 커 보이긴 한다. 옷차림 때문인지 보이시한 느낌도 강하고.

어릴 때부터 오디션을 보러 갈 때도 높은 구두를 신고 화려한 차림으로 가지 않았다.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거기에 컨버스 신고, 그렇게 캐스팅됐다.

드라마 속 패션이나 평소에 무엇을 입는지까지 주목을 많이 받는 편이다.

감독님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얘기하는 분들이 있다. 내가 나오면 옷에 대해 기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내 팬 중에는 여자들이 더 많은데,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것만큼 멋진 스타일을 보여주는 게 그분들에게는 중요하다는 걸 안다. 대중이 그런 걸 원하면 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가끔은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뭔가를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단벌만 입고 나오고, 옷차림만큼 성격도 순박한 시골 여자 같은(웃음).

스타일에 대한 당신의 원칙은?

옷을 잘 입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다만 같이 일하는 스타일리스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서로 호흡이 잘 맞는 건 분명하다. 8년 동안 함께 일했는데 서로 코드가 잘 맞고, 나보다 감각이 좋은 전문가니까 공식석상의 의상에 대해서는 완전히 존중한다. 하지만 내가 싫을 때는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평상시에는 거의 블랙이나 모노톤으로 입고 포인트 하나 주는 걸 좋아한다. 날씬해 보이려고 검은 바지, 발이 작아 보였으면 해서 검은 운동화…. 내가 워낙 앙증맞은 거랑은 거리가 멀지 않나(웃음).

사람들이 당신에게 반응하는 이유는 뭘까?

명품을 선호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스니커즈에 평범한 아이템도 즐겨 입고,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구매할 수 있는 걸 입고 나오기 때문 아닐까? 브랜드를 잘 안 보는 편이다. 인터넷 쇼핑몰의 5만원, 7만원짜리 청재킷도 예쁘면 입는다. 그런 소탈함이 옷 입는 방식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같다.

여자 팬이 더 많다는 건 어떻게 아나?

데뷔 때부터 팬 카페 같은 걸 만들고 반응을 보여주는 분들은 다 여자였다. ‘우결’ 같은 걸 통해서 남자 팬이 좀 생겼다고 하지만 잘 모르겠다. 옷을 어떻게 입는지에 대해서도 남자 팬들은 별 관심이 없다(웃음).

언제부턴가 단발머리가 당신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 전에 탄산수 광고를 찍었는데 머리를 붙여봤다. 너무 느끼해서 스타일리스트랑 앞으로 절대 기르지 말자고 다짐했다(웃음). 아마 머리숱이 많아서 그런 거 같다. 3~4년 전만 해도 긴 머리였는데 그때는 그게 세상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줄 알았다. 어느 드라마를 하면서 색깔별 퍼를 입고 나오는 설정이었는데,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퍼에 닿으니까 답답해 보여서 자른 거였다. 이후로는 계속 작품을 하다 보니 기를 시간이 없었고.

의도보다는 우연이었다는 뜻인가?

‘내가 이 작품에서 이걸 띄워보겠어’ 하면 안 되는 것 같다. 오히려 의도치 않은 것에 사람들은 더 좋아하고 반응해준다. 그런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실 내 머리가 기교를 부린 단발도 아닌데 좋아해주니까.

배우로서의 당신은 어디쯤 와 있을까?

30% 정도 와 있는 거 같다. 누가 나왔다하면 의심 안 하고 그 영화, 드라마를 찾아보는 관객이 있는 그런 배우들이 늘 부럽다. ‘고준희 이번에 뭐 입었지?’ 하고 보는게 아니라 쟤가 나왔으니까, 연기가 궁금해서, 드라마나 영화를 찾아보게 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서른 살이라서 30%인가?

대답하고 보니 그러네(웃음). 원래 홀수를 좋아해서 헬스장 라커룸도 3번을 고른다.

또 뭐 좋아하나?

고구마, 옥수수, 밥…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맛있는 거 먹으면 화난 일도 잊혀진다. 나이가 들면서 성격이 더 긍정적, 낙천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여자 연예인으로 살면서 힘든 점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과 같이 재밌게 일할 수 있으니 감수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다이어트 강박 같은 건 없나?

워낙 먹는 걸 좋아한다. 소화시킬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이 먹어서 위가 안 좋다는 얘기도 들었다. 식당에서 주는 밥 한 공기로는 늘 모자란다. 미용실에서 김밥도 두 줄씩 먹는데, 다른 여배우들은 반 개 먹는다고… (웃음) 촬영 현장에서 도시락이라도 밥을 안 주면 화가 난다.

배우로서 30%와 있다면, 삶에서도 앞으로 이룰 게 70% 는 될 것 같다.

서른다섯 안에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 좋아하면 점점 뜨거워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100에서 시작한다. 눈에 하트가 떠서 숨기질 못한다. 내가 좋아서 그 마음이 식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에디터
황선우
포토그래퍼
유영규
스타일리스트
김지혜
헤어
이은실
메이크업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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