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땅!

8년 전 처음 출발선에 섰고, 아주 오랜 시간을 준비 자세로 기다려왔다. 드디어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지금, 배우 최진혁 앞에 남은 건 출발뿐이다.

와인색 칼라가 돋보이는
흰색 셔츠는 프라다 제품.

우리가 기억하는 배우의 이름은 결코 많지 않다.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심지어 오랫동안 봐왔는데, 도통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수많은 배우를 떠올린다면. 그렇게 본다면 최진혁은 운이 좋은 편이다. 드라마 <구가의 서> 초반 1, 2회에 등장해, 고작 이틀 만에 시청자들의 기억에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겨놓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을 지키는 신비로운 수호령과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복숭아, 나비, 나무를 따다 바치는 로맨틱한 남자 사이를 오가는 구월령이란 인물에게 ‘월령앓이’, ‘다크월령’과 같은 흠모 섞인 찬사가 따라붙는 데에도 이틀 이상의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틀 뒤에는 사실 8년이라는 긴 시간이 있다. 서바이벌 오디션쇼 <스타 오디션>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데뷔한 때가 벌써 지난 2006년. 누구나 그러하듯 금세 스타가 되리라 자신했지만, 그런 기대는 배신당할 때가 더 많았다. 예상과는 다른 행로에 혼란스러워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에게 당연하다는듯 돌아오는 부당한 대우에 상처받고, 거만했던 어린 자신을 반성하고, 그리고 제대로 연기해보고 싶다며 마음을 다지기를 반복하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무릎 꿇고 기도했어요.” 이번에조차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절박함으로 붙잡은 <구가의 서>. 그리고 그 드라마가 단 이틀 만에 허락한 이름. 그건 도통 이름을 알 수 없는 배우로서 그 지난한 시간을 견딘 이라야만 누릴 수 있는 환희일 것이다.

디시인사이드에 최진혁 갤러리가 생겼더라. 일종의 팬덤이 생겼다는 신호가 아닐까 싶다.
작년인가 디시인사이드와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사가 어떻게 나왔는지 보려고 사이트에 들어갔는데, 정작 내 갤러리는 없는 거다. 허무한 기분도들고 해서, 그 뒤로는 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내 이름의갤러리에 올라오는 글을 읽으니, 재미도 있고 힘도 난다. ‘월령앓이’ 그런 단어 자체가 참 좋다.

<구가의 서> 1회가 끝난 후엔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순간 가장 처음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나?
첫 방송을 친구들과 함께 봤다. 방송이 끝난 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친구 중 한 명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고 전해줬다. 사실 예전에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를 할 때도, 그런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때보다 반응이 훨씬 크고, 비단 인터넷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이야기가 들리고, 2회가 끝난 후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화제가 되니까 기분이 묘했다. 어쨌든 내 연기 인생에 있어 처음 맛보는 관심이라 색다르기도 하고, 울컥하기도 했다.

데뷔 이후의 지난 8년이 이른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그런 느낌인 건가?
정말 냉정하게, 아직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껏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건 사실이지 않나. <로맨스가 필요해>는 비교적 달랐지만, 그 역시 지상파가 아닌 채널에서 늦은 시간에 방영되었기 때문에 마니아층이 있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길거리를 지나다녀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번엔 드라마가 잘돼서인지 확실히 다르긴 하다. 아주머니들도 많이 알아보시고(웃음).

<구가의 서>가 특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겠다.
첫 방송이 나가는 날, 진짜로 무릎 꿇고 기도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자신이 없었다. 1, 2회의 경우 내가 끌어가야 하는 이야기가너무 컸고, 드라마의 전체 주제인 ‘반인반수’의 시작점이 되는 ‘신수’라는 낯선 캐릭터를 어떻게 시청자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두렵기도 했다. 무엇보다 서화와의 로맨스나 슬픈 엔딩이 가장 걱정이었다. 시청자 입장에서 구월령과 서화라는 인물이 가슴 깊이 남아야만, 총 24부작인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까지 빠져서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니 시리즈 시간대에 방영되는 지상파 드라마에서이렇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역할은 처음이라, 내가 잘할 수 있을지, 시청자가 나에게 몰입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런데 시청자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1회 방송이 나간 후엔 안도했을 듯한데?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좋은 이야기가 들려오고 인터넷에도 긍정적 반응이 많았지만, 2회 방송이 끝나고 나서도 사나흘간 잠을 못 잤다. 좋은 반응도 믿기지 않았고, 괜히 듣기 좋은 소리 해주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이렇게 긴장한 건 정말 처음이었다.

결론적으로 결과가 좋긴 했지만, 구월령이 등장하는 분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1, 2회 출연 이후의 재등장 여부 또한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던 걸로 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처음부터 그런 믿음이 있었다. 구월령이 진짜 멋진 캐릭터라는 확신, 사람들에게 각인 될 거라는 믿음. 지금껏 어떤 시놉시스나 대본을 읽으면서도 된다 혹은 안 된다고 판단해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그런 게 생겼다. 이건 되겠다, 해야 되겠다 그런 믿음 말이다.

결국 13회에서 1, 2회에서와는 전혀 다른 ‘천년 악귀’ 캐릭터로 재등장하게 됐다. 재등장이 결정됐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1, 2회의 반응이 좋았으니까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드라마로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아주 잠깐 스쳤다. 그런데 나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솔직히 많이 기다렸다. 특히 대본을 받았을 땐가슴이 콩닥콩닥거렸다. 사실 한 편의 드라마 속에서 한 인물의 성격이 중간에 이토록 완벽하게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나. 그런데 <전설의 고향>을 제외하면, 거의 처음으로 접해보는 긴 호흡의 사극에서 그런 경험을 하게 된 거다.여태까지 연기하면서 못 느껴본 가슴 뛰는 경험을 했다.

<구가의 서>를 통해 새롭게 주목받게 됐지만, 실제로 데뷔한 지는 8년이 지났다. 일종의 서바이벌 오디션 쇼인 <스타 오디션>에서 우승을 한 게 지난 2006년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는데,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두 달 즈음 되었을 때였다.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연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러다 대회가 진행 되면서, 단순한 호기심이 연기에 대한 욕심, 승부욕으로 바뀌었다. 스물두 살 때였다.

스물두 살이란 어린 나이에, 그것도 배우 지망생이 된 지 겨우 두 달 만에 우승을 거머쥐었으니, 곧 스타가 될 수 있으리란 희망에 들떴을 법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다. 당시엔 그런 서바이벌 오디션 쇼가 흔치 않았는데, 11시가 넘은 늦은 시간대에 방영되었음에도 시청률이 높게 나왔었다. 그런 대회에서 우승을 한 거다. 나에게 무언가 특별한 게 있나보다,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나 보다 싶었다.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연기를 하고 싶어서 단역 배우부터 출발하고, 스태프로 참여하고, 그렇게 바닥부터 경험을 쌓는 친구들이 많지 않나. 그런데 너무 쉽게데뷔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거만했다.

단번에 주인공으로 데뷔한 걸 뜻하는 건가?
<일단 뛰어>라는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 드라마가 잘 안 되긴 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주연은 주연이었고 화려한 데뷔였으니까.

그랬기에 첫 작품의 실패가 더 큰 좌절로 다가오지는 않았나?
글쎄, 당시에는 내가 처음 맞이하는 모든 것이 다 맞는것이라 생각했다. 현장이 돌아가는 상황,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 것,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라 믿었다. 무엇보다 모든 배우가 나처럼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등 나를 뒷받침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화려하게 시작하는 것이라 오산했다. 배우가 되기로 마음먹고 바로 기획사에 들어갔고, 그래서 <스타 오디션>을 치를 때부터 이미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가 항상 옆에 있어줬기 때문이다.

그게 오산이었음을 인지한 시점은 언제인가?
<파스타>를 촬영할 때였다. 이전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고, 혼자 운전을 하면서 다닐 때였다. 그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것이었구나, 내가 받은 것들이 감사한 거였구나, 이를테면 ‘멘붕’이 찾아왔다 그래서일까. <파스타>는 동시간대 1위의 시청률로 막을 내렸는데, 그때 일명 ‘이태리파’의 수장으로 나온 선우덕이란 인물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살도 참 많이 쪘을 때라, 지금도 당시 찍은 사진들이 보도자료나 예능 프로그램 자료 화면으로 나올 때면 너무 싫다. 신인이어도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데, 연기를 할 준비가 안 되어있었던 것 같아 배우로서 창피하다. 드라마는 잘됐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얻어가는 것이 없었다.

<파스타>를 끝낸 후 이름을 김태호에서 최진혁으로 바꾼 것도 그 때문인가?
맞다. 내가 지금껏 생각한 것들이 뭔가 잘못됐구나를 그때 많이 느꼈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망나니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닌 건 아니었지만(웃음). 조금 더 겸손하게 연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고, 진짜 열심히 연기해보고 싶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의 결과는?
역효과가 났다(웃음). 그렇게 마음먹은 다음에 하게 된 작품이 <괜찮아, 아빠 딸>이었는데, 남의 대사까지 외울 정도로 대본을 많이 봤다. 데뷔작을 제외하면 처음 주연을 맡은 드라마라 더욱 의욕에 넘쳤다. 만약 연기를 잘할 때였더라면 그렇게 애정을 갖고 열심히하는 게 도움이 됐을 텐데, 연기 못하는 애가 욕심만 내다보니까 자꾸 몸에 힘이 들어가고 과해지고 보기 싫더라. 내가 봐도 불편해서 이게 아니구나 많이 깨달았고, 적당히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웠다.

최진혁이라는 배우가 눈에 들어온 건 <로맨스가 필요해>에서였다. 이전의 무겁고 진중하기만 한 역할이 아닌, 서글서글한 배성현 역할이 의외로 잘 어울렸다.
그래서 <로맨스가 필요해>의 감독님과 작가님께 너무 감사하다. 나를 캐스팅할 땐 분명히 그 이전 작품들을 보셨을 거 아닌가. 사실은밝고 장난기가 많은 편인데도, 데뷔 이후 5년여 동안 무겁고 어두운 역할만 줄곧 맡았다. 오디션을 보면 아무래도 불편해서 점점 표정이 굳고, 안 그래도 낮고 굵은 목소리가 오디션에서는 더 낮아지곤 했다. 신인이라 많이 비춰질 기회가 없는데다 연기력도 검증받지 못한 상태였으니, 아무래도 그 이전에 맡은 역할을 이어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나에게 전혀 다른 역할을 맡겨주시는 게 의아했고, 감사했다. 나와 정말 닮은 캐릭터여서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순간이 많았다. 연기하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렇게 꾸준히 드라마 속에서 주요 배역을 맡아왔는데도, <구가의 서>에서도 인정을 못 받으면 연기를 그만두려고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데뷔했을 땐, 사람들이 점차 나를 기억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씩 들고 시간이 쌓이면서,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주지 않는다는 데 자책감을 느꼈다. 나에게 매력이 없다는 뜻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구월령이라는 이 좋은 역할마저 소화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분명히 나에게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반응이 좋지 않으면, 진짜 연기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만약 지금과 같은 결과가 없었 더라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동안 외롭고 서러운 마음이 컸나 보다.
이 일이 특히 그런 것 같다.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알려졌는지에 따라, 현장에서의 대우가 달라진다. 어느 순간 어린 나이가 아니다 보니, 현장에 나보다 어린 배우들 또한 많지 않나. 인기 있는 어린 배우들에게는 그렇지 않으면서, 나에겐 보자마자 반말을 하거나 욕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내 나름대로는 내가 나중에 잘되더라도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인지도가 낮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사람들에겐 나만의 표현을 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런 상처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좋은 역할,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건데, 서러워지니까 잘되고 봐야겠다는 울분이 생겼던 것 같다.

다행히 이번 드라마의 성공 덕분에 드라마는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나 인터뷰까지 최진혁이란 배우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반가울 것 같은데?
계획도 많지만, 걱정도 많다. 배우라는 직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나. 예전에 장동건 선배가 어떤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가 일부러 신비주의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내 모습을 알면 작품과 역할에 몰입을 못할까봐 그런 것뿐이다”라고. 나역시 구월령 역할을 하면서 생각이 많았다. 내가 밖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SNS에 어떤 글을 올리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는지에 따라서 시청자의 몰입도가 달라지지는 않을까. 그렇게 내가 작품 외적인 통로로 보여준 이미지 때문에, 그와 다른 성격의 역할은 나에게 안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배우로서 적당히 보여줄 건 보여주면서도, 진짜 내 모습은 어느 정도 감춰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말이다. 물론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될지는 모르겠다. 워낙 활발하고,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해서(웃음).

일단 차기작은 김은숙 작가가 집필하는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상속자들(가제)>로 결정한 것으로 안다. <구가의 서> 이후의 작품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텐데,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김은숙 작가님과 강신효 감독님 모두 배우를 잘 만들어주시는 분들이다. 난 아직 많이 부족하다. 모니터를 볼 때마다 여전히 불만족스럽고 창피하다. 물론 언젠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깊숙한 곳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내가 꽂히는 역할을 찾기보다는 나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해줄 수 있는 필력이나 연출력이필요한 것 같다.

데뷔 앨범이 크게 히트한 가수들은 일명 2집 징크스에 시달린다고 한다. <구가의 서>로 주목받았기 때문에, <상속자들>을 앞두고 각오가 남다를 것 같다.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어두운 면을 많이 갖고 있는 인물이 될 것 같다. 데뷔 때부터 줄곧 맡아온 역할이지만, 한번쯤 다시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뭘 모를 때 제대로 살리지 못한 역할들이라, 다시 맡아서 잘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거다. 그런데 그 기회가 찾아왔다. 운이 좋았다.

뭘 몰랐던 그때와 지금, 배우로서 꿈꾸는 지점이 달라졌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땐 그 말이 진심이었다. 그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요즘은 무조건 진심 같은 이병헌 선배의 연기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그게 참 부럽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그 역할로만 보일 수 있는 배우,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