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아래에서 백조를 보았다. 무대의 이면, 저마다의 쇼는 다른 방식이지만 단 한 번의 견고한 진짜를 향해 나아가는 뜨거운 흔들림들은 닮아 있었다.
용호상박
손열음 + 서울시향의 차이콥스키 협주
클래식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위해 먼저 일러두자면, 최근 서울 시민이자 클래식 팬인 사람들은 시향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이 도시에 대한 자긍심이 부쩍 높아지는 중이다. 올해 들어 예술감독 정명훈이 지휘한 베토벤 5번과 7번 교향곡 연주는 시향이 오케스트라로서의 전성기에 올랐음을 증명했다. 베를린 필이나 빈 필 같은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는 아닐지 몰라도 개성 있고 매력적인 연주를 들려주며 마성의 에너지를 지닌, 마치 2002년 당시의 한국 월드컵 축구 대표팀 같다고 할까?
3월 28일, 세종문화회관 한쪽에 자리한 서울시립교향악단 연습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스키니 진, 플랫 슈즈 차림으로 나타난 피아니스트 손열음을 밖에서 마주친다면 분명 20대 중반의 평범한 아가씨라 여기며 무심코 지나칠 것 같았다. 손목의 빨간 아대 정도가 잠시 눈길을 끌었을까?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복장으로 테이크아웃 음료 같은 걸 손에 든채 연습실에 모여든 시향 단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대 위에서 검고 단정하게 성장했을 때는 한 덩어리로 매끈하게 녹아들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취향과 차이가 사복 속에서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연주를 시작하면서 다시, 인물들 낱낱의 색깔은 조용히 사라진다. 자기를 지우고 하나의 조화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만 존재하는 것이다.
협연곡으로 선택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공연에서 드물게만 연주되는 레퍼토리다. 같은 작곡가의 협주곡 1번이 훨씬 편애받는 탓이다. 3월 초에 있었던 독주회에서도 쇼팽이나 프로코피에프처럼 잘 알려진 곡들 사이에 샤를 발랑탱 알캉, 카푸스틴 등 흔치 않은 레퍼토리를 선곡했던 손열음답게 담대한 선택이다. 그날 앙코르로만 7곡을 연주하며 기량과 더불어 스태미너를 자랑한 이 스물일곱의 피아니스트는 “미식가들이 모든 진수성찬을 맛보고 싶어 하듯,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아노곡을 내 손으로 연주하고 싶다”고 말하는 다부진 욕심쟁이다. 피아니스트를 향해 허리를 굽혀 속삭이랴, 단원들 전체와 의사소통하랴 가장 바쁜 사람은 성시연 지휘자다. 솔티 지휘 콩쿠르와 말러 콩쿠르, 보스턴 심포니 등 화려한 이력의 젊은 지휘자, 게다가 여성. 협연곡뿐 아니라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요소가 공존한다’는 평을 듣는 양면적인 슈만 교향곡 2번에 어떤 해석을 보여줄지 기대가 컸다.
공연 당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저녁 연주를 앞두고 오후 시간에 이루어진 리허설에는 전날보다 다소 밀도 높은 긴장이 감돌았다. 이 협주곡의 2악장 ‘안단테 논 트로포’에서는 첼로와 바이올린 독주가 전면에 나서 피아노와 트리오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주는 점이 특이한데, 그만큼 제1바이올린 부악장인 웨인 린과 첼로 주연선 수석이 짝을 이뤄 연습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녁 8시 본 공연이 시작되자 화려한 스케일이 강조된 차이콥스키 2번에서도 ‘알레그로 브릴란테(빠르고 화려하게)’라는 지시어다운 첫 악장이 손열음 특유의 강한 타건과 다이내믹한 음색에 실려 힘차게 달려갔다. 솔로이스트와 오케스트라의 협연은 사실 서로의 팽팽한 기싸움이기도 한데, 나이 어린 20대 협연자의 경우 교향악단이나 지휘자에 밀려 위축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화려한 카덴차를 달려나간 힘 끝에 고개를 흔들며 긴 머리칼을 흩뿌리는 손열음의 몸짓은 흡사 헤드뱅잉하는 로커 같았다. 2부의 슈만 교향곡 2번,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성시연 지휘자의 강건한 해석에서는 ‘어린’, ‘여성’, 같은 수식어를 떠올릴 틈이 없었다.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기운은 으르렁대며 서로를 견제하는 암사자와 암호랑이의 긴장 같았다. 2시간여의 연주회 동안 그 긴장이 몇 차례의 절정을 터뜨리고, 복잡한 곡선을 그리던 지휘봉이 공중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객석 곳곳에서는 ‘브라보!’가 터져 나왔다. 눈인사를 교환하는 단원들의 얼굴에도, 피로와 만족이 뒤섞여 교차했다. 몰입해서 최선을 다하고 힘을 합쳐 만족스러운 목표 지점에 도달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근사한 표정이었다.
봄날은 온다
단편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
4월 초인데도 밤은 여전히 겨울 같았다. 필동의 주택가에서 옷 안으로 한기가 스미는 걸 느끼며 스태프들의 바쁜 움직임을 관찰했다. 미술팀은 한참 봄을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여주인공이 걸어 나올 집의 담장 밖으로 꽃이 잔뜩 핀 벚나무 가지가 드리워졌다. 혹시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살폈더니 역시 종이 꽃잎을 단 소품이다. 하지만 가짜 꽃 그늘이라도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현장 곁을 지나던 행인들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서 몇 미터 길이의 담벼락에 먼저 찾아온 봄을 감상했다. 바람이 아까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사랑의 가위바위보>는 코오롱스포츠의 40주년을 기념하는 ‘웨이 투 네이처(Way to Nature)’ 필름 프로젝트를 위해 김지운 감독이 준비 중인 단편이다. 같은 기획의 첫 번째 결과물인 박찬욱, 박찬경 감독의 <청출어람>이 선문답 같은 농담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좀 더 대중적인 로맨틱 코미디에 가깝다. <달콤한 인생> <악마를 보았다> 그리고 <라스트 스탠드>로 이어져온 김지운 감독의 최근 필모그래피를 감안하면 분명 의외의 한 수다. 어쩌면 단편이라는 가벼운 형식이 그에게 새로운 시도를 하도록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계상이 연기하는 운철은 외모는 번듯하지만 워낙 눈치가 부족하고 화법이 서툴러서 번번이 연애에 실패하는 인물이다. 가위바위보를 하며 부담스러운 승부욕을 불태운 마지막 소개팅 역시 끝이 좋지 않았다. 쓸쓸한 기분으로 돌아오던 그는 우연히 길 잃은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 주인인 은희(박신혜)를 찾아 나서게 된다. 첫 만남부터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 운철은 문득 자신의 행운을 시험하고 싶어진다. 그는 은희에게 답례 대신 자신과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제안한다.
당일 예정된 촬영은 은희의 집 앞에서 벌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어깨너머로 본 일정표의 공지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분량이 많습니다. 힘내야 합니다.’ 이례적인 당부는 아니었을 거다. 영화나 드라마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대부분이 잰걸음이었던 기억이 났다. 임시 가로등과 가짜 벚나무 설치를 마친 스태프들은 배우들 위로 꽃잎을 흩날릴 방법을 고민했다. 동시 녹음 장면이 있다 보니 시종일관 시끄러운 강풍기를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안으로 싸리비가 등장했다. 여럿이서 기다란 빗자루로 나뭇가지를 쓸자 우수수 꽃비가 떨어졌다. 프레임 밖의 어수선함과 상관없이 모니터 안의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박신혜의 단독 분량이 거의 마무리됐을 무렵 윤계상이 도착했다.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는 <소수의견>에도 캐스팅된 그는, 최근 몇 주간 두 개의 현장을 바쁘게 오가며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소 피곤해 보였지만 특유의 눈웃음만큼은 변함없이 서글서글했다. 준비를 마친 배우들이 마침내 흰 그늘로 모였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할 투 숏이었다.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뭔가를 지시한 뒤 김지운 감독이 프레임 밖으로 걸어 나온다. 박신혜와 윤계상은 밤바람을 막기 위해 걸쳤던 두툼한 외투를 벗고 가벼운 차림이 됐다. “슛 들어갑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오고 연기자들의 대화가 녹음되기 시작하자 숨을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워진다. 운철의 수줍은 유혹을 응원하듯 모든 스태프가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이 큰 소리로 손자를 어르며 그 옆을 지나가는 바람에 금세 맥이 빠지고 만다. 야외 촬영은 크고 작은 돌발 상황과의 싸움이 되기 일쑤다. 하나의 신은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성취다.
결국 결말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현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가위바위보의 결과와 은희의 대답은 작품이 공개되는 4월 29일에 알 수 있을 것 같다. 성급하게 짐작하자면 그날 어수룩한 남자의 로맨스 외에도 또 하나의 해피엔딩을 보게 될 듯하다. 마침내 완성된 작품은 만든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뿌듯하고 행복한 결말일 테니까. 그리고 그때쯤이면 스크린 밖에도 종이로 만든 가짜가 아닌 진짜 봄이 와 있을 것이다.
그날들의 기억
뮤지컬 <그날들>
뮤지컬 <그날들>에는 익숙한 이름이 여럿 눈에 띈다. 시나리오와 연출을 <김종욱 찾기>와 <오! 당신이 잠든 사이>의 장유정이 맡았으며 주연은 유준상, 오만석, 지창욱, 오종혁, 김정화 등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이름은 따로 있다. <그날들>은 고 김광석의 노래로만 극을 구성한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김광석과 뮤지컬이라니, 진 켈리의 무성 영화만큼이나 의아한 조합이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그 결과물이 더욱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늦가을처럼 쓸쓸한 멜로디에 맞춰 군무를 추는 광경은 아무래도 직접 봐야만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 팀의 연습실을 찾은 건 개막이 2주 뒤로 다가왔을 무렵이었다. “대형 뮤지컬 <그날들>입니다. ‘대형’이라는 말을 꼭 써주셔야 해요.” 오만석, 강태을과 함께 정학 역을 맡은 유준상은 이렇게 농담 같은 당부를 건넸다. 라이선스 뮤지컬의 물량 공세에 주눅들지 않을 만한 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괜한 과장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곁눈질한 이 창작 뮤지컬은 제법 규모가 큰 이야기를 다룬다. 한중수교를 앞두고 있던 1992년, 청와대 경호실 동기인 정학과 무영에게 신분을 알 수 없는 ‘그녀’를 보호하라는 임무가 맡겨진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여자와 무영이 함께 자취를 감추고 만 것. 여기서 극의 시점은 20년 후로 옮겨진다. 이제 정학은 경호부장의 자리에서 한중수교 2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런데 마치 여러 해 전처럼 대통령의 딸과 그녀의 수행 경호원이 사라져버린다. 둘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학은 무영과 ‘그녀’의 기억을 밟게 된다.
“주크박스 뮤지컬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어요.” 연출자인 장유정의 설명이다. 기존 곡에 맞춰 극의 뼈대를 세운 작품들은 종종 어쩔 수 없다는 듯 전개를 비약하고 구성을 무너뜨린다. 익숙한 노래에만 의지하다가 꼭 필요한 이야기의 긴장감을 놓치는 것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음악만큼이나 드라마도 중요한 장르다. 장유정은 <그날들>에서 미스터리에 로맨스를 결합시키는 시도를 했다. 이에 맞춰 김광석의 담담한 노래들도 훨씬 극적인 느낌으로 편곡됐다. 경호대원들이 스턴트 액션에 가까운 춤을 구사하며 ‘변해가네’를 부르는 장면을 보면 제작진의 구상이 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날들>은 원곡의 팬보다 김광석을 잘 몰랐던 새로운 관객에게 더 크게 호소할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레베카>가 폐막하자마자 바로 연습에 합류한 유준상은 주연 겸 응원단장 같았다.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현장을 쉼표 없이 오가면서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다른 배우의 파트가 진행 중일 때도 슬그머니 오케스트라 곁에 서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모습이 그답다는 생각을 했다. 지창욱, 오종혁, 최재웅은 미스터리의 중심에 놓인 무영 역을 돌아가며 연기한다. 한 자리에 모인 트리플 캐스트를 관찰하며 각각의 다른 개성을 견주는 건 연습실에서 누릴 수 있는 큰 즐거움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꾸밈 없는 공간에서는 스태프들의 표정이 더욱 가깝고 생생하게 읽힌다. 자신감과 기대, 그리고 조바심이 수시로 교차하는 얼굴들은 어떤 무대 미술보다도 보는 사람을 집중시킨다. 6월 30일 까지 대학로 뮤지컬센터에 올려질 공연만큼이나 이날 엿본 순간들 역시 인상적인 스펙터클이었다.
힘을 내요, 미스김
KBS 드라마 <직장의 신>
“하이 큐!” 전창근 감독의 외침엔 “얼음!”이라는 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었던 걸까. 파주에 위치한 프리즘공단 ‘B-가’ 세트가 순식간에 정지 상태에 돌입했다. 혹여 발소리가 동시 녹음 마이크에 새어 들어가지는 않을까 예고치 않은 기침이 터져 나오면 어쩌나 50여 명의 스태프가 일제히 숨 죽이는 가운데,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건 오직 배우들뿐이다. 아니, 배우가 아니라 극 중 인물이라 말해야 정확하겠다. “미스김 나와요!” “장규직 어디 갔지?” “정주리, 안 오면 대기 발령 보내버린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모든 배우는 제 이름을 상실한 채, 오직 등장인물의 이름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혜수, 오지호, 정유미가 사라진 자리를 ‘미스김’, ‘장규직’, 그리고 ‘정주리’가 채우고, 이희준, 전혜빈, 조권 대신 ‘무정한’, ‘금빛나’, ‘계경우’와 조우하는 이곳은 드라마 <직장의 신> 촬영 현장. 주인공 김혜수가 연기하는 ‘미스김’은 1분의 오차도 없이 ‘칼퇴’를 실행하며, 시간 외 수당을 칼같이 받아내고, 회식과 같은 업무 외 일정에는 결코 참여하지 않는 인물로, 회사가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자발적 비정규직이다. 온종일 직장에서 ‘까라면 까는’ 생활을 버티다 집으로 돌아와 주저앉아 텔레비전을 켠 직장인이라면, 드라마 속 미스김의 행보가 지나치게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덕분에 피로를 풀고 위로를 얻을 법하다.
재미있는 건 정작 미스김이란 인물을 가공해내는 이 세트에선, 그 누구도 미스김을 꿈꿀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정 즈음 모든 촬영이 종료될 예정이며, 저녁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1시간이나 보장된 이 날은, 내내 현장을 지키던 어떤 스태프의 증언처럼 좋은 의미로 ‘특이한 날’에 속한다. “지금은 감정이 너무 격했던 것 같은데, 조금 차분하게 가보자” 해서 한 번 더, “카메라를 이 방향으로 돌려보는 게 나을까?” 싶어서 한 번 더, 그리고 각각의 인물이 바라보는 앵글과 그 인물을 바라보는 앵글은 물론 그들 모두가 등장하는 앵글까지 교차시키며 화면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로 그 ‘한 번 더’를 수없이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방송에서는 1~2분이면 스쳐 지나갈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는 데 꼬박 3시간이 필요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이틀 분량의 드라마를 매주 만들어내기 위해선 휴식, 잠, 그리고 개인의 생활 같은 건 곧 사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세트는 비교적 나은 환경인지도 모른다. 오후 내내 강남의 한 지하철 역에서 촬영을 마치고 세트로 들어온 배우 정유미가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으니까. “여기 오니까 좋다. 촬영도 빨리 끝나고.”
밤 9시를 조금 넘겨 시작된 이날의 마지막 촬영은 미스김과 장규직의 ‘서류에 스테이플러 박기’ 대결이었다. 미스김이 스테이플러를 박는 장면을 수없이 촬영하고, 스테이플러 박는 미스김을 응원하는 동료 직원들 또한 반복해서 촬영하고, 이번엔 장규직이 스테이플러 박는 장면을 다시 한 번 숨 죽인 채 지켜보다가, 결국 장규직을 응원하는 동료들 쪽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는 순간 버티지 못하고 ‘B-가’ 세트를 빠져나왔다. 결국 그날의 마지막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한 셈이지만 “하이 큐!”로 시작된 드라마가 “컷”과 함께 끝나는 것과 달리, 드라마를 만드는 삶은 컷과 함께 끝나지 않을 것을 안다. 그 333평의 작은 세계를 빠져나오기 전 세트 구석의 복사기에서 내일의 촬영 계획이 촘촘히 인쇄된 일정표를 발견했으므로. 그리고 그 일정표를 보며 작은 소리로 ‘어휴’라고 한숨쉬던 스태프들, 그러니까 현실 속 미스김들의 음성 또한 훔쳐 들었으므로.
책 짓는 사나이
대림미술관 <How to Make a Book with Steidl: 슈타이들 전>
“디지털은 잊기 위한 것이지만, 아날로그는 기억하기 위함이다.” 사진가 로버트 폴리도리는 게르하르트 슈타이들과의 작업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 인간의 외장하드 내지는 감각기관의 연장에 가까워지면서, 정보며 지식을 소유하고 간직해야 할 필요는 희미해진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클라우드 속에 저장된 그것을 필요할 때마다 그저 문지르고 건드려 불러내면 되니까. 하지만 슈타이들은 아날로그 매체인 책을 만들며, 책을 통해서만 전해질 수 있는 지식과 정보가 여전히 세상에 유효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아티스트들과 책을 만든다는 건 그들 예술의 비밀을 은밀하게 전수받는 일이에요.” 활자를 고르고 일러스트와 사진을 배치하고, 책에 어울리는 종이와 소재를 매치하는 슈타이들은 고집스러운 출판 장인이자, 아티스트의 의도를 완벽하게 책으로 옮겨놓는 노련한 기술자다.
매끈하게 정돈된 전시장이 데이트를 위해 완벽하게 차려입은 숙녀라면 작품 설치 중인 미술관은 옷이며 화장품을 있는 대로 다 늘어놓은 준비 과정의 카오스에 가깝다. 4월 8일, 전시 개막을 불과 사흘 앞둔 통의동 대림미술관은 이삿짐을 막 부려놓은 듯 독일에서 왔으며 취급에 각별히 주의하라고 일러주는 상자들로 어지러웠다. 가장 커다란 나무상자에서는 칼 라거펠트의 서명이 그려진 거대한 투명 큐브가 나왔다. 그 속에 사진집을 층층이 올려 탑을 쌓는다거나 샤넬의 행사 초대장을 모은 액자를 건다거나 하는 일은 전시 설치에서 아주 간단한 축에 속했다. 입구 양쪽에 세워진 거대한 종이 기둥은 아예 사다리차를 동원해서 마당에서 3층까지 쏴올렸으니까. 전시장의 나눠진 공간에는 샤넬 외에도 작가 귄터 그라스, 아티스트 에드 루샤나 짐 다인을 위한 방이 따로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각각의 아티스트들과 슈타이들이 어떻게 협업하며 책을 만들었는지 그 과정을 사진과 메모, 일러스트와 영상, 완성된 책을 통해 입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 각 전시장의 혼돈이 조금씩 질서를 향해 가는 동안 여기 잠깐 저기 반짝 하며 모든 과정을 지휘하던 슈타이들은, 2층 구석 계단 옆의 작은 공간에 가장 오래 그리고 자주 머물렀다. 작은 책상 위에는 컴퓨터가 아니라 노트, 그리고 보온병이며 필통이 놓였고 그 가운데서 그는 끊임없이 뭔가 적고 있었다. 아날로그한 매체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일하는, 아주 아날로그한 방식이었다. 전시장에서는 슈타이들을 위해 기획된 향수 ‘PAPER PASSION(종이 열정)’을 맡아볼 수 있다. 막 인쇄된 책을 펼쳤을 때 나는 종이와 잉크 냄새를 담은 향수다. 그 냄새를 알고 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날로그가 과거 아닌 미래를 위한 제작 방식이라는 슈타이들의 고집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자기기의 차갑고 단단한 표면을 미끄러질 때가 아니라 가죽과 천, 종이로 된 책의 육체를 손끝으로 더듬을 때만 가 닿는 감각의 황홀경에 대해서도.
- 에디터
- 황선우, 피처 에디터 / 정준화, 피처 에디터 / 김슬기
- 포토그래퍼
- KIM S. GON, MAENG MIN HWA, YOON MYUNG S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