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파트너, 크루, 동료, 협업자… 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새로운 분야에서 또렷하게 눈에 띄는 전문가들, 그리고 그들이 존중하고 힘을 빌려오는 또 다른 전문가들을 함께 만났다. 아주 특별하고 흥미진진한, 그들만의 리그.
널리 세상을 통하게 하라
데이터 시각화 전문가 민세희
“한국의 경우 디지털 인프라스트럭처는 잘 구성이 되어 있는데 데이터의 활용 수준은 다른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빅 데이터에 관한 관심은 크지만 이걸 어떻게 써야 할까 고민만 하는 분위기랄까요? 적합한 솔루션을 빠른 시일 내에 찾지 못하면 그 관심마저 수그러들지도 모르겠어요.”
+ 건축가 양수인 “좋은 건축은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나마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래서 이 일을 하는 거고요. 남해에 전기료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 70평짜리 제로에너지하우스를 저예산으로 짓는 중인데 이런 설계가 가능하려면 생활 패턴까지도 바꾸겠다는 건축주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좋은 건축가라면 진심에서 우러난 기꺼운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겠죠.”
+ 텀블벅 공동 창업자 소원영 “유튜브 등 여러 채널이 출현하고 필요 장비가 대중화된 덕분에 혼자서도 창작물 유통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어요. 자신의 네트워크를 조금만 확장시키면 프로덕션급의 결과물을 만드는 게 가능하죠. 그런데 대부분 ‘한 끝’이 부족해서 포기하더라고요. 텀블벅은 말하자면, 그 ‘한 끝’을 채워주는 서비스인 셈이죠.”
취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는 법이다. 각종 미디어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쏟아놓기 시작하자 적잖은 사람들은 그냥 눈을 감아버리는 쪽을 택했다. 랜덤웍스의 대표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민세희는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언어로 데이터를 통역하는 작업을 한다. 데이터 시각화라는, 꽤나 귀에 선 방법론이 그가 매진하고 있는 분야다.
“보통은 그래프나 매핑 정도를 생각하세요. 그런데 저희는 단순히 수치를 이미지화하는 것 이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종류의 데이터를 겹쳐보면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관계가 드러나기도 해요. 어떤 현상이 어디서 비롯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길을 추적하는거죠.” 한 번에 잡히지는 않는 설명이다. 현재 민세희 대표가 한 통신사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예로 들면 이해가 빠를까? 스마트폰의 보급은 통신 트래픽의 규모와 내용 모두를 바꾸어놓았다. 이 데이터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가치도 그만큼 변화했을 것임을 암시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모두가 앞을 보고 걸었잖아요. 요즘 거리에 나가면 전화기 액정을 내려다보면서 이동하는 분들이 대다수예요. 이런 장면 변화를 데이터와 연결 짓는 거죠.” 결국 데이터 시각화란 각각의 숫자, 문자, 기호로만 여겨지던 것들 사이에서 유의미한 이야기를 읽어내는 과정이다. 가치 있는 아이디어의 공유를 목표로 삼는 비영리 단체 테드(TED)는 그를 한국인 최초의 테드 펠로(TED Fellow)로 지목하며 남다른 도전이 갖는 의미를 긍정했다.
민세희 대표에게 데이터는 건설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정보가 적을 때는 판단이 쉽게 흔들려요. 아는 게 쌓일수록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만의 가치 기준을 세우는 일이 수월해지죠. 주변 목소리에 휩쓸리지 않고 어떤 이슈든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데이터 시각화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가끔은 데이터가 훨씬 구체적인 교류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뉴욕과 서울을 넘나들며 주목할 만한 발자국을 찍어온 건축가 양수인은 상암 월드컵공원 도시갤러리 내의 미디어 조형물인 ‘리빙 라이트’ 프로젝트를 위해 랜덤웍스와 접촉했다. 서울의 대기질 정보를 실시간으로 게시하고 사용자의 입력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 작품이다. “이런 작업은 잘 활용을 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참여한 시민들에게 즉각적인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하죠.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데이터 시각화가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수인 소장이 협업을 제안하게 된 이유다. 민세희 대표는 “제 작업이 그 결과물 하나만 놓고 볼 때는 재미가 덜해요. 제품, 건축, 환경과 결합할 때 더 큰 파급력을 갖는 듯합니다”라며 데이터 시각화나 건축 모두 대중을 필요로 하는 게 공통점이라고 덧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값을 보태고, 공간을 활용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잃는 일이기 때문이다. 독립 문화 창작자를 위한 소셜 펀딩 사이트 텀블벅(www.tumblbug.com)의 공동 창업자인 소원영은 본래 랜덤웍스의 초기 멤버였다. 당시 아티스트들 간의 협업 과정을 기록하고 그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창작 활동과 이를 가능케 하는 관계 맺음에 대한 관심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셈이다.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함께 고민한 시간은 그와 민세희 대표 모두에게 요긴한 양분이 됐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에 이끌립니다. 데이터 수집에 유리하니까요.” 특히 흥미를 느끼는 종류의 데이터가 있는지 묻자 민세희 대표가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할 말이 중요한 ‘작가’보다는 다양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수렴하는 데 집중하는 데이터 시각화 전문가의 역할이 편안한 눈치였다. 한편 양수인 소장은 이렇게 이야기를 보탠다. “제가 프로페셔널로서 하는 일은 익명의 시민으로서 던지는 한 표보다 파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제시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해 모종의 변화를 이끌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소원영은 가능한 한 텀블벅을 기존 기업과의 제휴 없이 자발적인 선의가 모여 움직이는 커뮤니티로 유지하고 싶다고 밝힌다. 세 사람이 몰두하고 있는 건 나름의 방식대로 주위의 중요한 목소리를 수렴한 뒤 그것을 훨씬 힘있고 효과적인 언어로 번역해 퍼뜨리는 일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이들이 각자의 프로젝트를 통해 외치는 말들을 궁금해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건 바로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일 테니까.
99% 이상의 1%
오디오 PD 이지영
“차에 늘 메모지를 갖고 다녀요. 라디오나 CD에서 괜찮은 곡이 나오면 적어둬야 하니까요. 세상에 노래는 너무 많고 가끔은 저보다 음악을 더 잘 아는 분과도 일해야 해요. 나름의 스트레스는 늘 있죠.”
+ 사운드 수퍼바이저 윤영문 “HDTV가 보편화되고 극장용 광고 제작이 늘어나면서 사운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졌습니다. 일례로 장면보다 사운드 콘티를 먼저 짜는 경우가 늘고 있어요. 심지어는 음악에 맞춰 성우와 모델을 결정하기도 하고요. 비주얼과 사운드가 확실히 50대 50의 비중을 유지하고 있는 게 지금의 광고계입니다.”
+ 성우 김서영 “모든 작업이 어렵지만 긴장도로 봤을 때는 광고가 최고예요. 영화나 드라마는 사전에 대본을 받아 연습하는 게 가능해요. 광고는 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글을 받고 바로 녹음을 하는 식이죠. 극도의 순발력을 요하는데 그만큼 해냈을 때 쾌감이 크기도 해요. 재미있는 건 성우를 캐스팅해놓고서는 ‘성우 같지 않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이에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요즘 광고 트렌드 때문이죠.”
‘광고를 찍는다’는 표현은 기껏해야 반쪽 짜리다. 형광등 백 개를 켜놓은 것 같은 아우라의 모델이 세탁기나 냉장고로 저글링을 한다고 해도 정교한 사운드 디자인, 효과적인 내레이션, 귀를 간질이는 음악 없이는 소비자의 주의를 붙들지 못할 테니까. 오디오 PD 이지영은 광고의 ‘보이지 않는’ 50%를 활동 영역으로 삼는다. 광고 제작의 최초 단계부터 참여해 콘티에 맞는 선곡 및 성우 캐스팅을 진행하고, 쓰일 노래의 저작권을 해결하고, 사운드 연출을 진행하는 게 모두 그의 역할이다. 애니콜, 스카이, 현대카드를 비롯해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브랜드가 이지영 PD의 중매 덕에 영상 이상으로 힘이 센 음악을 만난 바 있다. “그저 듣기 좋은 음악이어선 안 돼요. 영상의 톤, 편집의 템포, 경쟁사 광고와의 차별성, 사용 가능 여부 등을 고려해서 적절한 후보를 추려내죠. 2시간 만에 마음에 드는 걸 찾아 녹음까지 일사천리로 해치운 적도 있긴 해요. 반대로 노래 하나 고르는 데 6개월 이상을 투자하는 경험도 해봤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광고용 선곡은 결코 돈 받으면서 하는 DJ 흉내가 아니다.
고수들은 손을 잡아도 좋을 상대를 정확히 알아본다. 사운드 수퍼바이저 윤영문과 성우 김서영은 이지영 PD와 수시로 손바닥의 땀을 교환하는 사이다. 셋이 함께한 프로젝트를 꼽아달라고 하자 다들 말줄임표부터 공중에 띄운 채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례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였다. 바로 어젯밤에도 같이 작업을 했다는 이야기가 답 대신 돌아온다. 자주 뭉치는 이유는 물론 서로의 실력을 인정해서다. 이들이 힘을 보탠 사운드가 입혀질 때 보기 좋은 그림에 머물던 영상은 비로소 통장 잔고를 위협하는 악마의 유혹이 된다. 한쪽은 선곡에, 다른 한쪽은 음향의 전반적인 디자인에 좀 더 무게중심을 싣는 편이긴 하나 오디오 PD와 사운드 수퍼바이저의 일은 적잖은 부분이 중첩되는 게 사실이다. 둘 사이의 호흡이 결과물을 크게 좌우할 텐데, 그런 점에서 이지영 PD와 윤영문 실장은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다. 두 사람의 생각은 성우를 선택하는 기준에 있어서도 일치한다. 지금의 광고는 단지 목소리가 예쁘기보다는 짧은 카피에도 긴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만큼 연기력이 뛰어난 성우를 요구 한다는 것이다. 김서영은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모범답안이다. “백지처럼 뭐든 담을 수 있어야 좋은 배우라고 하잖아요. 성우도 마찬가지예요. 서영 씨는 가지고 있는 백지의 크기가 굉장히 넓은 사람이죠.” 이지영 PD가 덧붙이는 평이다.
하나의 광고가 이어지는 15초는 찰나의 선택과 1%씩 조각조각 나눠진 디테일들의 합이다. 윤영문 실장은 그래서 광고 작업이 영화나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몇 초 잘라 넣은 음악만으로는 필요한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으니까요. 사운드 디자인과 곡이 긴밀하게 어울리도록 해야 되죠. 그러려면 소리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성우 김서영은 통신사 KT 광고를 위해 ‘쇼를 하라, 쇼!’라는 카피를 수백 가지 버전으로 녹음했다. 물론 필요했던 건 그중 단 하나였다. 광고는 상당한 긴장을 요하는 작업이지만 그래서 더 큰 쾌감을 주기도 한다. 이지영 PD는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음악이 자신의 선곡을 계기로 부상할 때 보너스 같은 즐거움을 얻는다고 밝힌다. “KTF 광고에 쓰인 날스 바클리의 ‘Crazy’는 원래 1순위 후보가 아니었어요. 마지막 순간 ‘이건 어떨까’ 하며 꺼내든 B안이었는데 이미 녹음실에서부터 반응이 뜨겁더라고요.” 그는 찰나의 선택으로 1~2%의 차이를 만드는 게 광고 사운드를 다루는 일이라고 믿는다. 분명한 사실은 가끔, 아니 꽤 많은 경우에 그 1%가 전체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김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