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티스트이자 영화감독인 스티브 매퀸은 한 사람이 외부와 치러야 하는 투쟁, 그리고 내면과 겪어야 하는 갈등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하루아침에 자유를 빼앗긴 뒤 노예로서의 참혹한 삶에 던져지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노예 12년>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예술가의 언어로 번역한 결과물이다.
“예술계와 영화계 사이에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해요.” 유난히 화창하던 토요일에 만난 비디오 아티스트 겸 영화감독 스티브 매퀸이 이렇게 말했다. 새영화 <노예 12년>의 홍보 일정에 바쁘게 쫓기고 있었지만 기운이 넘치는 모습이었고 의견을 제시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다른 감독들처럼 그 역시 흥미로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기준이 명확했다. “제게 있어 예술과 영화를 견주는 토론은 의미가 없는 일 같아요.” 표정을 읽어내기 힘든 강렬한 눈빛을 지닌 매퀸은 푸른색의 더블 브레스트 니트 재킷과 통이 넓고 발목 부분이 5인치쯤 드러나는 검정 크롭트 팬츠를 입고 있었다. 과감한 차림과 대비되는 엄숙하면서도 낮은 목소리가 그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2008년에 개봉한 장편 데뷔작 <헝거>는 단식투쟁 끝에 사망한 IRA 운동가 바비 샌즈의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었다. “원래는 좀 더 단순한 형태로 구상한 주제였죠. 하지만 제대로 표현하려면 내러티브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장편 영화가 된 거죠. 제게 예술은 시예요. 필름은 긴 이야기, 즉 소설 같은 거고요.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 일에만 투신할 생각은 없어요. 흥미로운 주제 중 영화라는 형식에 잘 맞는 종류가 있을 뿐입니다.” 매퀸에게 ‘필름’이란 갤러리나 박물관이 아닌 극장에서 감상하는 장편 영화를 뜻한다. 주로 단편 작업을 해온 그는, 그중 다수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현재 마흔넷인 매퀸은 웨스트 런던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서인도제도 출신인데 1960년대 초에 런던으로 이주했다. “제 개인사 역시 일종의 디아스포라(Diaspora)죠. 서쪽으로 이동해간 흑인의 역사와 닿아 있어요.” 그가 <노예 12년>의 주인공인 솔로몬 노섭과 자신 간의 연결고리를 언급했다. “다른 아프리카 출신 미국인들과의 차이점은 우리 가족이 런던에 정착했다는 사실뿐이에요. 노예 제도는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존재했습니다.”
10대 시절에는 축구 선수였고, 단기간이긴 하지만 모델로 활동하며 <i-D> 등의 매거진에 등장하기도 했다. 영화에 흥미를 갖게 된 건 런던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무렵이었다. “아누크 슈거라는 스위스 여자친구가 있었어요. 프랑스 여배우인 아누크 에메로부터 이름을 빌려왔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저를 예술 영화관에 데려갔어요.” 그가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전까지는 극장 나들이를 여자애들과 진도를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할 첫 번째 의식 정도로 생각했죠. 그런데 아누크와 극장에 갔을 때는 영화의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바뀐 거죠. 장 르누아르부터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장 비고 등의 작품을 함께 봤습니다. 청춘을 즐기고 사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정말 멋진 시절이었어요.”
1993년에 매퀸은 뉴욕 대학교의 필름스쿨에 입학했고, 딱 3개월 동안 수학을 했다. “그러곤 그만뒀어요. 실험적인 걸 해보고 싶었는데 학교에서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전 이미 아트 스쿨의 분위기에 익숙한 상태였죠. 그곳에서는 온갖 것을 시도하고 실수도 저지르는 과정에서 스스로 뭔가를 발견하도록 하거든요.” 어쨌든 당시의 경험이 전혀 무용했던 건 아니다. 매퀸은 그해 두 명의 발가벗은 흑인(그중 한 명은 감독 자신이다)이 레슬링 경기를 하는 16mm 흑백 단편인 <베어(Bear)>를 내놓았다. 동성애, 증오, 인종 등의 이슈를 아우르는 듯한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사랑과 증오, 공격과 유혹 사이의 가는 선을 흥미롭게 넘나든다. <노예 12년>의 캐릭터 중 한 명인 농장주 에드윈 엡스(매퀸의 장편 3편에 모두 출연한 마이클 패스벤더가 또 한 번 놀라운 연기를 선보인다)는 노예인 팻시에게 강한 성적 매력을 느끼는 자신을 혐오한다. 그의 욕망은 결국 분노가 된다. 이러한 긴장감은 매퀸 작품의 주요한 특징이다. <베어>의 두 남자는 열정적인 키스를 했을 수도, 서로를 죽도록 두들겨 팼을 수도 있다. 감독은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둔다. 그의 다른 단편에서도 충돌하는 감정들에 대한 집착은 여실히 드러난다.
배우 샬롯 램플링이 주연을 맡은 <샬롯>의 경우, 매퀸이 그녀의 눈을 찌르는 광경을 클로즈업으로 담았다. “샬롯의 눈이 여성의 성기와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감독의 설명이다. “저는 다정함과 폭력은 서로 맞닿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영화 <헝거>는 마이클 패스벤더와의 첫 작업이었다. “저는 바비 샌즈에게 완전히 빠져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와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기를 바랐죠. 다만 역할에 딱 맞는 배우를 찾는 일이 어려웠어요.” 캐스팅 과정에서 매퀸은 샌즈가 남긴 메시지와 영화의 시나리오에 대해 분명한 의견을 갖고 있던 패스벤더와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그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약간 건방지다고 느꼈거든요. ‘감히 내 영화에 대해 나에게 설명하다니!’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냥 ‘다음 후보!’를 외치며 무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캐스팅 디렉터가 그를 다시 불러들였나 보더라고요. 그러곤 맨 마지막 줄에 세운 겁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마이클은 정말 놀라웠어요. 대본을 읽는 모습에 완전히 설득되어버렸죠. 제게 패스벤더는 그의 세대 가운데 가장 뛰어난 배우예요.”
2008년 칸 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헝거>는 상당한 호평을 얻었다. “영화가 상영된 뒤, 모두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패스벤더의 이야기다. “스티브에게 고개를 돌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야’라고 말했어요.” 공식 경쟁작이 아니었음에도 매퀸은 신인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상을 받았다. 그리고 2011년에는 패스벤더가 공허한 섹스 중독자로 등장하는 <셰임>을 내놓게 된다. 그때부터 이미 매퀸은 <노예 12년>을 구상 중이었다고 한다. “자유를 누리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노예가 되어 남부로 가게 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어요. 그때 아내가 책 한 권을 권하더라고요. 거기에 제가 생각한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더군요.” <노예 12년>의 줄거리는 1853년에 출간된 솔로몬 노섭의 회고록을 충실하게 따른다.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인 존 리들리는 매퀸이 초기 단편에서 다뤘던 주제들을 그 안에 효과적으로 녹여내고 있다. 즉,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지킬 수 있을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인간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아요. 전 자신의 고유한 개성과 자아를 인식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고 봅니다.” 그는 정의가 부정되는 상황을 노예 제도로 은유한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노섭은 감독관과의 사소한 충돌로 올가미에 묶인 채 나무에 매달린다. 발이 땅에 닿을락말락한 상태로 운명이 결정되기를 기다리며 온종일을 보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노예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각자의 일상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그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지만 불행히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살아남기 위한 방법에만 관심을 쏟겠지요. 이게 바로 악이 저지르는 일이에요. 사람들로부터 인간성을 박탈하는 겁니다. 예술이 그 포인트를 짚어낼 수 있다면 저는 제 일을 한 거라고 봐요.”
글 | Lynn Hirschber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STEFAN RU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