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위한 책 속 문장들

전여울

2023년의 첫 장, 새로운 시작의 순간 동행하기 좋은 책 속 문장을 그 누구보다 책과 절친한 8인이 보내왔다. 이 문장들이 비추는 길을 따라, 눈앞에 펼쳐진 시간들 속으로 성큼 들어가본다.

Beautiful blond woman making a to do list while sitting behind a desk in her living room

“나는 쉬운 아름다움을 지녔고 그래서 행복해.” <엘뤼아르 시 선집> 폴 엘뤼아르, 조윤경 옮김, 을유문화사

폴 엘뤼아르의 시 ‘말’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 쉽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내 아름다움은 쉽게 가능하다고. 나는 돌연 어느 공간에서 순간 아름다움을 내비칠 수 있고, 그 모습을 어쩌다가 깨닫고 의식하기도 해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런 의외성 내지 우연성과 함께 하루하루를 일궈나간다면. 나뿐 아니라 그 누구나가 쉬운 아름다움을 지녀서, 쉽게 나 역시 타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혹 내가 타인의 기쁨이 된다면. 이는 시의 문장처럼 너와 내가 “구름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과 “새들의 비행에서 가장 벌거벗은 면”을 상상하며 좋아하길 기꺼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 같다. 그때 우리는 새해에 한 살 정도 더 “늙었지만 여기서 난 아름답다”고 당연히 감각할 수도 있는 건 아닐지. – 안태운(시인, <감은 눈이 내 얼굴을> 저자)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유령의 마음으로> 임선우, 민음사

어느 날 나타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유령, 해파리로 변해가는 사람들, 100시간의 유예를 받은 유령들, 내 방 한편에서 나무가 된 남자. 이 동화 같은 상상력들 속에서 짙은 위로가 느껴진다. 반짝이는 여덟 단편에서 한결같이 ‘중요한 건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 다독임이 따스해서 자꾸만 따라 되뇌게 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때로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만 같은, 그래서 나조차도 희미해져가는 나의 마음을 돌아보고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나에게 가장 온전한 이해와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나 자신을 좀 더 관대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새해를 시작하면 어떨까. 스스로 건네는 위로가 아직은 조금 어색하다면, 이 책에서 수없이 건네는 꿈결 같은 위로들이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유령의 마음’이 되어주길 바란다. 책 속 수많은 ‘나’가 슬픔을 온전히 마주하고, 그리움을 온전히 끌어안고, 또 그 마음들을 통과해 내일로 나아가듯이. 때론 울고 때론 주저앉더라도, 흐르는 물처럼 반짝이는 마음을 잃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길. 그 근사한 마음을 말미암아 눈부신 시간들을 쌓아나갔으면 한다. – 윤영우(민음사 출판그룹 홍보팀)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 채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 간추리건대 그 시절은 현 시절과 너무나 닮아 있어 일부 목청 높은 권위자들은 당대를 논할 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양극단의 형태로만 평가하려 들었다.”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권민정 옮김, 시공사

첫 번째 단원만 종이가 닳도록 펼쳐보게 되는 두꺼운 문제집 같은 소설이 있다. 내용이 어려워서라기보다, 생각날 때마다 소설의 도입부를 곱씹어보기 위해서다. 혀끝에 남아 종종 생각나는 음식의 맛처럼 소설의 문장들이 머리를 맴도는 셈인데,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그런 소설 중 하나다. 아버지의 빚을 갚느라 열두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했던 디킨스의 관심사는 자연스레 19세기 영국 사회와 삶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디킨스는 급격한 변화 속에서 고통과 기쁨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그 시절 영국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디킨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지금의 한국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디킨스의 소설을 종종 꺼내 보는 것, 첫 문장을 읽게 되는 건 바로 그래서다. 160년도 넘은 문장들을 읽으며 무언가를 다짐하게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올해는 최고의 시절이 될까, 최악의 시절이 될까. 절망의 겨울 끝, 희망의 봄이 올까? – 박재용(독립 큐레이터)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어젯밤> 제임스 설터,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소설 <어젯밤> 속 단편 ‘스타의 눈’에서 이제 60대가 된 영화 제작사 테디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인생의 중대한 첫 번째 사건은 어린 나이에 만난 나이 많은 소설가였다. 그들은 3년을 사귀고 헤어졌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에게 성인의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그는 당시 테디에게 자신이 파티에서 본 배우들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녀를 스토리 분과에도 취직시켜주어 결과적으로 영화판에서 긴 경력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그녀의 삶은 어떠한가? 아름다운 인생이라기엔 드라마가 부족하고, 열정적인 인생이라기엔 그녀의 재능과 성과가 미적지근하다. 이제 사람들은 대개 그녀를 좋아하지만 누군가의 눈에 그녀는 그저 늙고 촌스러워진 눈치 없는 여자일 뿐이다. 자신이 이런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올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앞날을 조금도 내다볼 수 없는 시작점에 선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눈먼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무언가를 홀린 듯 열렬하게 보게 된 사람들이며, 어쩌면 기억 속에서 그 순간을 영원히 지켜볼 사람들이다. 스타의 눈이 어디가 잘못됐는지 용하게 알았던 테디의 죽은 남편이 아니라면, 그들의 눈에서 반짝이는 빛 이외에 무엇을 볼 수 있단 말인가? – 우다영(소설가, <북해에서> 저자)

“하나의 길이 네 앞에 놓여 있다. 너는 그 길을 걸어가도록 소명을 받았고, 신들이 너를 기다리고 있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박진권 옮김, 미르북컴퍼니

주인공 싯다르타는 한 인간으로서 태생부터 최고의 혈통과 환경 속에 태어나 부족한 것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항상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그의 늠름함에 뒤지지 않는 벗, 그리고 조언과 지식을 나눌 수 있는 스승과 가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문득 이런 삶을 모두 뒤로하고 싯다르타는 젊은 청년으로서 혼자만의 첫길을 나선다. 어느 길이든 가보아야만 알 수 있듯 싯다르타도 결국 경험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럴 때면 그는 미련 없이 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아무리 그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왔어도, 그 길을 통해 이룬 것이 많이 쌓였어도, 마음속 아직도 갈구하는, 자신의 이름을 아직도 부르고 있는 곳으로, 모든 것을 등지고. 누구나 인생에서 큰 결심이든 사소한 결정이든 그 어떠한 의견에 영향받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의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는 순간이 있다. 두려울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곳이라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 길로 나서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내 안에서 우러난 순수한 소리가 알려준 방향이라면, 그 길로 나설 땐 나 혼자가 아니다. 나아가 들어보자, 신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 김현지(BANA 비주얼아트팀)

인간의 제로는 뼈인 것이다. 거기에 살점이 붙고 피부가 붙어서 그 사람의 형상이 된다. 태어나서 자라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다양한 것들을 배우면서 점차로 그 사람이 완성되어간다. 여러 이야기들이 몸에 달라붙는다.” <인간의 제로는 뼈> 마이조 오타로, 정민재 옮김, 민음사

모든 소설은 인간을 향한다. 인간이 등장하는 인간의 이야기. 대학생 시절 창작 수업의 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소설을 써라…. 이야기가 발생하고, 이야기가 이야기를 먹어 치우고, 종종 비약이 발생하는 삶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주인공 히로타니 카오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모든 사건을 ‘이야기’, 즉 서사의 눈으로 바라본다. 부모가 이혼하고, 남동생의 트러블을 해결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이야기로 경험하며 내면화한다. 이는 곧 카오리가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자신을 향해 해일처럼 덮쳐오는 삶의 문제를 돌파하며 자신만의 ‘진짜 이야기’를 찾으려 고민한다. 그것이 온통 불확실한 기호로 가득한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인간의 뼈에 살점이 붙듯, 여러 이야기로 구성된 삶의 시간은 단선적이지 않기에 다채롭고 흥미롭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린다. 새해가 시작되는 신년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순간이다. 새해에 가슴이 설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 민병훈(소설가, <겨울에 대한 감각> 저자)

“나는 마음소라를 도일의 머리통이라도 되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자 문득,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것을 부어준 듯 가슴이 묵직하고 발이 저절로 동동 굴러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들의 세계> 이유리, 자음과모음

<모든 것들의 세계>의 단편 ‘마음소라’에서 언젠가 도일은 내게 ‘마음소라’를 선물한다. 사람이 2차 성징을 겪을 무렵이면, 어느 날 갑자기 나만이 알 수 있는 자리에 놓인 자신만의 마음소라를 발견하게 되는데 소용돌이 모양으로 생긴 이 마음소라를 받으면 그 주인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다. 소설가 이유리는 읽는 이를 새롭고 낯선 현실에 초대한다. 분명 새로운 세계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 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의 먼 지난날도 떠올리게 된다. 어릴 적엔 새해 소원으로 ‘호그와트 입학 통지서’를 받게 되길 빌었다. 그랬던 어린이는 자라서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신비로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어른이 되었다. 2023년에도 열심히 현실을 살다 창밖을 내다보고 싶어질 때면 이유리의 책을 집어 들 것이다. 그리고 어쩐지, 자주 책장을 넘겨볼 것만 같다. – 정지혜(블러썸크리에이티브 IP사업팀)

“이제는 과거만이 그의 미래였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플래너리 오코너, 정윤조 옮김, 문학수첩

새해 앞에서 우리는 유난히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매 순간 함께하던 과거, 현재, 미래가 새삼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른다. 내년은 분명 올해와는 다를 것이며, 내일은 분명 오늘과는 다를 거라고 믿으며 새로운 목표와 다짐을 세운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속 104세의 새시 장군에게도 내일은 찾아온다. 그는 젊은 시절 즐겨 입었던 장군 제복을 입고 104년 하고도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기를 즐긴다. 이제는 아내의 이름도, 아들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찬란했던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 순간 그는 빛나던 과거의 자신으로 살아 숨 쉬며,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느낀다. 과거는 현재만큼 형형하게 그에게 상영된다. 그런 그에게 미래는 온전히 과거 안에 있다. 그러나 과거와 완전히 무관한 내일이 있을까. 끝은 시작과 닿아 있고, 과거는 미래와 닮아 있다. 어쩌면 내일은 등 뒤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앞을 보기보다 등을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지나간 어제를 다시 살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절망이나 후회보다는 희망과 환대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한동안 뒤돌아서 걷기로 한다. 내일로부터 나에게 오고 있는 과거를 맞이하며, 지나간 시간들 안에 숨어 있을 새로운 시작들을 환영하며. – 양다솔(작가,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저자)

피처 에디터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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