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럭셔리 쿠튀리에 하우스, 발렌시아가의 젊은 영주로 초대된 지 2주년을 맞은 알렉산더 왕을 <W Korea>가 뉴욕에서 직접 만나 그간의 감회를 함께 나누었다.
알렉산더 왕(Alexander Wang).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젊디젊은 디자이너의 이름이 수많은 또래들을 제치고 패션계에서 독보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세대의 감성을 패션에 접목시키는 진취성? 스트리트와 디지털 문화, 인맥의 중요함을 먼저 파악하는 영민함? 브랜드 이미지 메이킹과 마케팅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 모두가 왕을 설명하는데 있어 부족함 없이 들어맞는 수식이다. 아마 좀 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패션 역사책의 한 장에나 쓰일 법한 표현을 미리 지면을 빌려 써본다면 알렉산더 왕은 ‘전통적인 젊은 디자이너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인물이다. 스승 밑에서 옷 짓는 법을 배우는 전형 적인 도제 시스템을 거쳐 어느 정도 숙련된 후 자신의 이름을 건 라벨을 론칭해 명성을 얻는 것이 19세기 말, 20세기 디자이너의 성장 공식이라면, 20세기 중반부터는 유명 패션 학교를 졸업하고 유수의 브랜드에 들어가 패션 회사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익힌 후, 독립을 하거나 하우스의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출세’ 경로다. 현재까지도 우리가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대부 분의 디자이너들이 이런 경로를 거친다. 그러나 알렉산더 왕은 패션에 대한 접근 자체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이 어필할 만한 매장과 고객들이 모이는 곳을 먼저 파악했고, 샘플만 가지고도 이들의 이목을 사로잡은 후각 카 테고리에서 필요한 수만큼의 아이템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 갔다. 따라서 돈을 벌어서 브랜드의 성장에 투자하고 그만큼의 결과를 뽑아내는 순환 고리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었다. 남들은 오랜 시간 돈을 쓰면서 배워 가는 것을, 알렉산더 왕은 그 2~3할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돈을 벌면서 배웠다. 순수한 디자인 회사로 시작해 투자금을 유치받으며 시작했다면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성과였다. 요즘처럼 팍팍한 분위기에 고객과 바이어를 의식하지 않고, 창의력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배짱 좋게 레디투웨어를 밀고 나갈 수 있는 디자이너가 몇이나 될까? 알렉산더 왕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후 몇몇의 젊은 ‘독립’ 디자이너들도 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신선함’ ‘스포티함’ ‘실용적’ 동시대적’ ‘대중적 럭셔리’ 등 현대 패션의 맥을 짚는 핵심 단어들은 고스란히 알렉산더 왕의 시그너처로 적용해도 되는 특징들이고, 젊음의 가치를 노련함과 동일한 선상에 두는 뉴욕은 아무래도 다른 도시에 비해 그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드러낼 수 있는 무대가 되어주었다. 2008년 데뷔한 이래, 패션계는 매 시즌 그의 결과물에 열광했고, 이제 그 매력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됐다 싶은 순간에는 한 단계 위의 치명적인 매력으로 사람들을 무장해제시켰다. 블랙, 실버, 화이트만 가지고 마법을 부려놓은 알렉산더 왕 2013년 봄 컬렉션은 그의 오랜 팬들조차 입을 떡 벌릴 만큼 성공적이었는 데, 그로부터 3개월 후, 알렉산더 왕은 15년을 일한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떠난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새로운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파리의 조르주 5번가에 자신의 첫 부티크를 연 순간부터 1968년 마지막 컬렉션을 펼치고 은퇴하기까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패션계에 헌신한 시간은 30년 남짓이지만 그는 패션의 300년쯤에 해당하는 업적을 이루어 놓은 전설적인 쿠튀리에였다. 특히 발렌시아가를 설명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수식어는 ‘미래적’이고 ‘모던’하다는 표현이다. 발렌시아가 하우스에 합류한 이래 이제 막 다섯 시즌이 지났을 뿐이지만, 알렉산더 왕은 기존의 유산 위에 ‘동시대적’이라는 요소를 성공적으로 버무리고 있다. 미묘한 변화라 눈치 못 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로고의 디자인도 바꿨고, 모터백의 유령에서 벗어날 만 한 새로운 베스트셀러 가방도 탄생시켰으며, 광고 사진가와 스타일리스트도 바꿨고, 가장 최근에는 컬렉션 쇼 장소와 시간대도 교체했다. 딱 대중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신선한 변화다. 재능과 젊음은 패션의 충분조건 정도일 뿐 결코 필요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보다 ‘탁월한’ 재능과 젊음이라면 역사와 전통을 고스란히 맡기고 더욱 발전적인 결과를 도출해주기를 패션계의 많은 이들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발렌시아가의 알렉산더 왕에게 바라고 있다. 이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밀고 나가고 있다’고, 뉴욕에서 <W Korea>와 마주 앉은 그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W Korea> 최근에 한 패션 기업과의 협업 행사에서 당신을 봤는데, 그 후에 뉴욕과 파리 컬렉션을 마치고 광고 작업도 했다고 들었다. 도대체 24시간을 어떻게 관리하나?
알렉산더 왕 굉장히 멋진 팀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은 내가 일에 집중 할 수 있게 스케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준다. 그런데 사실, 열정만 있으면 시간과 에너지는 자연히 따라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중하고, 결단력 있는 태도를 취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큰 프로세스라서 일이 잘 돌아가기 위해서는 내 결정이 절대적이니까 말이다.
발렌시아가를 맡기 전과 후를 비교한다면 당신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나?
콕 짚어 말한다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두 배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일이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도전적인 과제라서, 내가 이런 걸 좀 즐기는 스타일이기에 굉장히 즐겁다. 일이 늘어난 만큼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다. 가장 중요한 일이나 사람, 사생활, 여가를 어디서 어떻게 보낼지 등등. 중요한 순서에 따라 집중해야 한다. 이게 가장 큰 변화일 것이다.
하우스 창립자인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스페인에서 승승장구할 때, 친구인 아 텡빌이 ‘큰 무대인 파리에 도전하라’는 결정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당신이 발렌시아가를 택하는 데에도 그런 조언을 해준 사람이 있었나?
일을 하면서 아주 멋진 사람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중 딱 한 사람을 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2013년 가을/겨울부터 시작했다. 이제 적응기를 거쳐 완벽하게 하우스에 녹아든 느낌이다. 발렌시아가에서 스스로의 시작을 어떻게 평가하나?
2년이라…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갔다. 많은 일을 했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웹사이트를 열었고, 매장을 오픈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기초적인 플랫폼을 다지고 있는 중이라, 완벽하게 브랜드에 녹아들었다기보다는 아직도 시작 단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발렌시아가에 가자마자 아카이브부터 살피느라 숱한 밤을 새웠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나?
아카이브를 본 것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었다. 코쿤 드레스처럼 잘 알려진 헤리티지 피스들도 있지만 슈즈나 모자, 스카프부터 인터라이닝과 모델이 드레스 안에 입고 있던 슬립과 같은 언더웨어, 그리고 크리스토발의 낙서까지 있었다. 내가 이것을 어떤 시선으로 습득했는지 천천히 드러날 것이라고 믿는다.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가자르 원단을 직접 개발하는 등, 소재에서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얻는 독특한 쿠튀리에였다. 대리석 데 뷔 컬렉션과 니트가 테마인 2014 F/W, 그물 효과를 낸 이번 컬렉션을 보면 당신도 소재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재의 접근은 현대 패션의 가장 핵심적인 포인트로, 나 역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는 클래식한 동시에 새로운 재료에 집중했다. 특히 전통적인 기법인 자수를 시폰, 오간자를 섞은 복합성 재료에 접목해보았다. 손을 일일이 사용해 만든 자수가 뭔가 퇴폐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뉘앙스를 주길 원했다. 슬라이버 섬유의 혼합률이 높은 드레스는 신축성이 탁월해 몸의 곡선을 부각시킨다. 이처럼 클래식한 실루엣을 만들되, 새로운 기술을 통해 구현해보았다. 크리스토발이 사용했던 자수는 티셔츠와 탱크톱 등 현대적인 아이템에 접목했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운’ 것들이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히 보이도록 신경 썼다.
이번 시즌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우선 파리 컬렉션에서의 쇼 시간이 바뀌었다. 아침 첫 쇼에서 저녁 8시로 옮겨졌고, 장소 역시 팔레 드 도쿄의 야외 정원으로 옮겼다. 어떤 의도였나?
늘 컬렉션에 다니는 에디터와 바이어들은 특정 브랜드의 쇼 장소와 시간에 익숙하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할 필요를 느꼈고, 이번 컬렉션이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팔레 드 도쿄에 분수가 있는 곳을 늘 좋아했는데 아무도 여기서 쇼를 한 적이 없다고 해서 놀랐다. 특히 분위기를 살릴 수 있도록 밤에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컬렉션과도 잘 어울리고.
이번 S/S 컬렉션은 가장 발렌시아가답고 동시에 가장 알렉산더 왕답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어떤 점을 보여주고 싶었나?
하우스에 합류한 이래, 나는 늘 스스로와 발렌시아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왔다. 개인 컬렉션에서는 자수나 화려한 장식을 깊게 다룬 적이 없었는데, 이번 시즌 ‘화려함(Opulence)’이라는 콘셉트를 출발점으로 삼으면 흥미롭겠다고 생각했다. 지난여름에 파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때 자수처럼 화려하고 비싼 요소들을 실용적, 기능적이면서도 너무 비싸지 않은 부분에 다뤄보자고 떠올렸다. 그래서 선글라스의 스트랩이나 신발, 포켓 등에 자수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최근에 새로운 향수를 하나 론칭했는데 옛 살롱 바닥 타일에서 영감을 얻어 향수병을 디자인했고, 나아가 이번 컬렉션 전반에 쓰인 V형 무늬와 다이아몬드 모양 주머니, 쇼장의 플로어 디자인까지 그 콘셉트를 적용했다.
모터백 위주로 흐르던 액세서리 파트에도 많은 변화가 감지된다. 케이블 백을 비롯한 모던한 백들이 추가되었고 코스튬 주얼리도 인상적이다. 주요 액세서리는 어떤 의도로 만든 것인가?
케이블의 경우, 백팩이나 쇼퍼백 등 일상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시키기로 했다. 그리고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길을 걷는 여자의 이미지를 생각했다. 이를 발렌시아가다운 느낌으로 표현하면 재밌겠다 싶어서 메탈 와이어 손잡이로 미래적인 부분도 표현해봤다. 한편, 늘 딱딱하면서도 동시에 입체적 인 가방을 만들어보고 싶어서 탄생한 르딕스 백은 구조적인 서류 가방을 모티프로 시작한 것이다. 가방이 앉고 서는 모양도 중요 하기에 특히 바닥에 신경을 썼다. 사실 르딕스는 런웨이에서 선보일 예정이 아니었는데, 계획과 다소 달라졌다. 코스튬 주얼리는 어린아이가 대충 묶은 듯 엉성하면서도 간결한 디자인에 메탈 장식을 더했다. 가볍고 간편하게 접근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쇼핑백을 여러 개 든 여자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SNS를 통 해 이 룩을 처음 본 세대들은 당장이라도 발렌시아가에 달려가 쇼핑백을 겹쳐 들고 나오고 싶었을 것이다. 당신의 창작물과 라이프스타일은 SNS를 통해 많은 젊은 세대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해 당신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SNS는 나와 내 고객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갈수록 중요해 지고 있다. 대중에게 접근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바꿔놓기도 했고. 새롭고 흥미롭기에 나도 SNS를 즐기고 있지만 아무튼 핵심은, SNS로 무언가를 말할 때에는 굉장히 진실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진짜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만 멋지다고 말해야 한다.
당신의 합류 이후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젊고 역동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먼저, 로고 디자인을 바꿨다.
아주 근본적인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더라. 예전에 사용하던 로고들을 통합하고 싶어서 새로운 폰트로 바꿨다.
스티븐 클라인(여성복), 조쉬 올린스(남성복)가 참여한 광고 캠페인 역시 시각적인 변화를 잘 유도하고 있다. 광고를 통해 어떤 메 시지를 전하고 싶었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주 많다! 강한 캐릭터를 통해 시선을 사로잡고 싶다. 요즘엔 수많은 광고가 있지 않나. 최근 몇 시즌간 우리는 ‘전환(Transformation)’이라는 테마로 작업했다. 다리아나 지젤같이 아이코닉한 모델들을 발렌시아가의 방식으로 전환해 보여주고 싶었고, 재능 있는 신인 모델에게는 전에 없던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해주고 싶었다. 스티븐과 조쉬가 아주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이를 시각화해주었다.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대로 패션의 바로미터가 된다. 옷과 디자인을 제외하고 최근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음 컬렉션에 영향을 줄 만한 요소를 찾았나?
나는 쇼나 아트 등 뭔가를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타입의 사람이 아니다. 살면서 자연스러운 속도로 앞으로 나갈 뿐이다. 발렌시아가에서의 시작 단계에서 아주 많은 것을 했기 때문에 나는 늘 뭘 해봤고, 해보지 않았는지 생각하고, 새로운 도전과 언어에 대해 생각한다. 재해석할 발렌시아가의 아카이브에 대해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점점 다양한 것을 더하고 또 더하며 각각의 요소에 숨은 의미를 찾는데 집중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협업에 매우 적극적이다. 아이코닉하며 동시에 베스트셀러인 협업 제품도 여럿 탄생시켰다. 반면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협업의 예가 거의 없다. 혹시 계획하는 프로젝트가 있나?
지금은 계획이 없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요즘엔 너무 훌륭한 협업이 많고 대중은 이에 익숙하며 눈도 높아졌다. 따라 서 만약 할 거라면 굉장히 좋은 스토리에 기반해야 할 것 같다. 왜 하는지 이유도 분명해야 하고. 아무튼 지금은 계획이 없다.
마지막으로 현대 패션에서 ‘젊은 디자이너’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당신처럼 이른 나이에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가 있다면?
세상에,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진지하게 생각하며) 나는 학교를 마치지 않았기에, 나처럼 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책임할 수 있으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정확히 정하고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내 경우는 졸업을 안 했기 때문에 주변에 인맥이 없었다. 핵심은, 일어날 일이라면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반드시 오고, 누구보다 스스로가 ‘왔구나’라고 느낄 거라는 거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비로소 올 것이다.
- 에디터
- 패션 디렉터 / 최유경
- 포토그래퍼
- 홍장현, 유영규
- 모델
- 김성희
- 헤어
- Dennis Lani(알렉산더 왕), 한지선(김성희)
- 메이크업
- Tatyana Makarova(알렉산더 왕), 박이화(김성희)
- 프로덕션
- Sasha Jenny Park (SJP Production)
- 어시스턴트
- 임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