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응용 예술입니다. 모든 디자이너들은 동시대 예술에서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죠.” 파리 출신의 피에르 아르디는 현대미술의 직접적, 은유적 표현에 능한 슈즈 디자이너다. 기하학적 패턴과 미니멀한 형태가 하나 된 슈즈, 백 등의 액세서리는 그의 전매특허. 특히 그의 세련된 예술적 감성을 집약한 스니커즈 라인은 수많은 컬렉터를 양산하며 아이돌급 지지를 받고 있다. 이제 막 서울에 커다란 깃발을 꽂으며 입성을 선언한 피에르 아르디와 더블유 코리아의 첫 번째 랑데부.
파리에 갈 때마다 으레 향하는 곳이 있다. 루브르도 에펠탑도 아닌 팔레 루아얄(Palais Royal)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피에르 아르디와 다니엘 뷔랭의 작품을 동시에 만날 수 있어서다. 260개의 줄무늬 기둥이(다니엘 뷔랭의 작품, ‘두 개의 고원(Les Deux Plateaux)’)이 도열한 안뜰을 지나 피에르 아르디 매장 내부로 이어지는 동선은 매번 강렬한 시각적 감흥을 안긴다. 그곳은 마치 패션과 예술의 교차로와도 같다. 감상하는 예술을 지나 갖고 싶은 예술로 이어지는, 기묘한 통로랄까.
피에르 아르디는 액세서리를 캔버스 삼아 선과 면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아티스트다. 실제로 조형미술을 공부했고, 80년대 이후 오랫동안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해온 그의 브랜드는 ‘미니멀 아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반복적인 줄무늬와 큐브, 선과 면의 기하학적 분할, 건축적인 형태, 대담한 색상의 조합은 피에르 아르디라는 브랜드를 설명하는 키워드. 1999년에 론칭, 이제 15년 남짓의 역사를 지닌, 비교적 젊은 브랜드에 속하지만 그의 신발엔 유구한 역사의 슈즈 브랜드 못지않은 내공이 깃들어 있다. 1987년 디올의 슈즈 디자이너를 시작으로 1990년부터 지금까지 에르메스의 슈즈 라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몸담은 12년간 발렌시아가의 혁명적인 슈즈를 디자인한 이력은 그 이유에 힘을 싣는다.
그의 도전적인 슈즈에 매료된 나라는 무려 31개국.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본격적으로 서울에 아시아 최초의 매장을 오픈하면서 한국을 찾은 피에르 아르디는 자신의 브랜드를 낯선 나라에서 만나는 데 대한 기대와 흥분을 한껏 드러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생각지도 못했다. 무표정한 프로필 사진 속 피에르 아르디는 쌀쌀맞은 파리지앵의 전형이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만난 그는 더없이 친절하고 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인터뷰하기 전날 우연히 분더숍을 둘러보는 그를 멀찍이서 보았지만 차마 인사를 못 건넸다고 고백하자, “왜요. 말 걸지 그랬어요!”라며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잔뜩 경직된 나를 단숨에 무장해제시켰다. 심지어 카메라 앞에서 모델과 포즈를 취하다가도 순간, 순간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어찌나 천진한지!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때론 재치 있게, 때론 묵직하게 대화의 랠리를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흡사 진지한 파리의 현자처럼 느껴졌다.
포털사이트에서 당신의 이름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EXO 슈즈, GD 슈즈’가 뜬다. 그들은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아이돌 가수다. 한국에서 이렇게 특정인의 이름으로 유명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나?
그런 닉네임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지금 알았다. 거부감은 커녕 오히려 칭찬처럼 들린다. 내 신발이 그 사람으로 인해 또 다른 삶을 산다는 의미 아닌가! 에르메스의 가방이 켈리, 버킨 백으로 유명한 것처럼 누군가의 이름으로 알려진다는 것도 재미있다. 심지어 젊은 스타라니! 대부분의 디자이너 슈즈 브랜드가 성숙한 여성을 위한 전유물처럼 여겨지는데 남자 아이돌이 선택함으로써 피에르 아르디라는 브랜드가 다양성을 확보한 것 같아 기쁠 따름이다. 마침 오늘 스튜디오에 오는 길에 가수 리애나가 우리 스니커를 신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내 컬렉션을 신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인데 그 소식을 접한 순간 마치 깜짝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슈즈 디자이너로서 어떤 신발을 신은 여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반대로 추하다고 생각하는 신발은?
디자이너로서 신발 종류를 두고 미추를 가늠하고 싶진 않다. 즉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건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니다. 패션은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서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존재니까. 다만 이 얘기를 하고 싶다. 패션이라는 존재는 가면과도 같다.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패션은 변덕이다. 이 변덕스러운 존재를 갖고 놀았으면 좋겠다. 때론 가면을 쓰듯 슈즈로 다른 인물이 되어보기도 하고 변덕을 부리듯이 변화를 주라는 이야기다. 그러다 보면 더 멋진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런데 한 가지. 사실 굽이 15cm 이상인 하이힐은 차라리 키 큰 여자가 신는 편이 낫다. 키가 작은 여자가 너무 높은 하이힐을 신으면 상대적으로 종아리가 더 짧아 보인다. 비율은 스타일링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개인적으로 하이힐은 내게 너무 큰 고통이자 도전이다. 나 같은 하이힐 포비아에게 조언을 한다면?
하이힐은 이중성을 지녔다. 보통 하이힐을 신으면 키가 커지고 관능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에 약해지기도 한다. 난 반드시 모든 여성이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이힐을 신어도 아름답지 않은 여성이 있고, 반대로 납작한 운동화를 신어도 관능적인 여성이 있다. 여자가 하이힐을 신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렸으면 좋겠다. 동시대에서 하이힐은 그저 선택 사항일 뿐이다. 그저 가끔 놀이처럼 즐겨보라고 얘기하고 싶다.
많은 디자이너가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산다. 당신의 삶에 있어 가장 큰 모험이나 전환점은 무엇이었나?
나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다. 슈즈 디자인을 시작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왔다. 크게 불안정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1999년 내 브랜드를 시작했을 당시엔 아무래도 위험 부담을 안고 시작한 만큼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다. 에르메스의 슈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랜드 론칭은 인생에서 가장 큰 모험이었다.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내 것이 아닌 브랜드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일종의 역할 놀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이 이미 써놓은 각본 속에서 움직여야 하는 만큼 창작에 한계가 있다. 일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샘솟는데 그중엔 그 브랜드에서 구현할 수 없는 것도 많다. 그런 순간이 계속 이어지면서 결국 그 아이디어들을 현실화할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신은 여전히 에르메스의 신발을 디자인하고 있고 발렌시아가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었는데 이들 브랜드와의 협업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게 에르메스와 발렌시아가가 갖는 의미는 매우 다르다. 우선 니콜라 제스키에르라는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와 함께한 12년은 대단히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그로 인해 내가 상상력이 더 풍부해짐을 느꼈다. 매 시즌 그가 제안하는 다채로운 콘셉트에 따라 내 아이디어를 확장할 수 있었으니까. 니콜라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 되어 매번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 모른다. 반면 에르메스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초대형 브랜드다. 아무래도 발렌시아가처럼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보다는 헤리티지를 재해석하는 데 힘을 쏟는다. 지금은 신발 외에도 에르메스의 주얼리 라인을 맡고 있는데 모두 브랜드의 비전에 맞춰서 디자인하고 있다.
당신은 에르메스에서 마틴 마르지엘라, 장 폴 고티에 그리고 지금의 크리스토프 르메르까지 3명의 디자이너와 함께 일했다. 에르메스라는 브랜드의 변하지 않는 비전에 맞춘다면 디자이너의 변화에 맞출 필요는 없었던 건가?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을지 몰라도 심도 있는 변화는 분명히 있다. 같은 H 심벌을 보고도 누군가는 미니멀하게, 또 다른 이는 바로크적으로 해석하니까. 의상을 맡고 있는 디자이너가 갖고 있는 시선에 따라 내가 맡은 슈즈의 디자인도 함께 맞춰갔다.
혹시 세컨드 라인 계획이 있나?
세컨드 라인은 우리 같은 브랜드보다 매장이 많은 초대형 브랜드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격과 타협하기보단 더욱 고급스럽고 창조적인 것을 만드는 데 매진하고 싶다.
당신이 말하는 고급스럽고 창조적인 제품, 즉 하이엔드 패션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지 않나. 즉 일반 대중에겐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피에르 아르디를 비롯한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SNS 활동이나 매체 인터뷰 등으로 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서는 건 좀 모순된 행동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매우 민감한 질문이다. 실제로 브랜드들은 극도로 세련되고 패션에 대한 정보력이 뛰어난 소수를 중시하면서도 보다 많은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엔트리 가격대의 제품도 함께 선보인다. 피에르 아르디 역시 스니커나 좀 더 단순한 디자인의 신발이나 패브릭 파우치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브랜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독창적이고 특별한 것을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일부분은 대중에게도 어필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말처럼 이것은 브랜드가 갖고 있는 모순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현상이 흥미롭기도 하다.
‘PierreHardyNews’라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 중인데 이는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서려는 노력인가?
일부분은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SNS 활동은 패션의 생태계가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엔 대부분이 오프라인 매장과 잡지로 패션을 접했다면 이젠 온라인을 통해 접하는 숫자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패션은 뉴 미디어에 관심을 갖고 빠르게 적응해야 한다. 원래 일러스트레이터였고 이미지를 만드는 걸 좋아해서 인스타그램 같은 이미지 중심의 채널로 패션을 표현하는 것도 꽤 재미있다.
요즘은 디자이너가 셀레브리티가 되는 시대인데, 개인 계정도 운영하나?
나는 셀레브리티가 아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 계정은 갖고 있지 않다.
피에르 아르디가 어떤 브랜드로 다가서길 바라는지 묻고 싶다.
관능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브랜드. 하지만 너무 관념적으로 느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보기에는 추상적이고 콘셉추얼하지만 신는 순간 유혹적으로 보이는 신발이랄까. 사람과 어우러졌을 때 관능미를 발산하는 것이다. 무릇 패션 브랜드란 새로운 여성성을 제안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나는 꽃, 레이스, 스팽글 등 소위 여성스러운 소재나 장식을 쓰지 않고 또 다른 의미의 여성성을 구현하는 브랜드로 여겨졌으면 한다.
2000 S/S 피에르 아르디의 초기 작품은 유선형의 ‘Blade Heel’을 사용해 마치 작은 건축물과도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띤다.
2003 F/W 대담한 볼륨감과 여성미의 대비가 돋보이는 슈즈가 대거 등장했다.
2005 S/S 극적인 곡선을 그리는 형태와 기하학적인 면의 배치가 조화를 이뤘다.
2006 S/S 60년대 옵아트를 슈즈로 표현하면서 반복적인 줄무늬가 등장했다.
2006 F/W 마치 조형미술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당시의 슈즈는 대조적인 소재의 매치가 두드러진다.
2007 S/S 모던 아트에 대한 동경을 슈즈로 옮긴 이 시즌의 슈즈는 격자무늬의 플랫폼 슈즈와 메탈릭한 웨지힐이 등장했다. 이는 파리 1주의 정원인 자르뎅 뒤 팔레 루아얄의 분수조각에서 받은 영감과 키네틱 조각가인 폴 뷰리의 작품에 대한 경의 그리고 이탈리아의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에토레 소트사스의 색채와 모양에서 받은 인상을 슈즈로 표현한 것이다.
2008 S/S 보티첼리의 작품 속 신발에서 영감을 받아 미래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스트랩 하이힐과 플랫 슈즈를 선보였다.
2008 F/W 자유분방한 그래픽 효과를 강조한 이 시즌엔 건축적인 디자인과 선으로 유명한 팝 아티스트 제임스 로젠퀘스트에 대한 오마주를 신발에 담았다.
2009 S/S 밧줄, 고무밴드, 스트랩 등 다양한 선이 엉켜 있는 모습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했다.
2009 F/W 해부학적인 곡선과 추상적인 그래픽이 맞물려 대담하고 강렬한 디자인의 신발로 태어났다.
2010 S/S 획기적인 비율과 소재의 특징, 색상 등을 기하학적으로 조합해 독특한 여성미를 표현했다.
2010 F/W 유선형의 볼륨감 넘치는 형태를 테마로 그래픽적인 패턴과 스웨이드 소재 등을 사용해 관능적인 슈즈를 탄생시켰다.
2011 S/S 60년대 모더니즘과 70년대의 예술에서 모티프를 딴 이 시즌엔 바우하우스, 젠 스타일과 같은 요소와 팝한 색상이 조화를 이뤘다.
2011 F/W 발 전체를 감싸듯 흐르는 디자인을 시도했다. 이 당시의 신발은 마치 발을 보호하는 듯한 껍질 같은 인상을 준다.
2012 S/S 미니멀한 힐과 화려하고 복잡한 발등 장식의 조화가 대조를 이루는 이 시즌엔 건축적인 느낌이 유독 두드러진다.
2012 F/W 40년대의 쿠튀르적인 무드와 80년대의 록 감성이 극적인 조화를 이룬 시즌.
2013 S/S 팝적인 프린트, 스파이크 힐, 거칠게 가공한 가죽, 메탈릭 컬러 등을 이용해 여성 슈즈의 전형을 넘었다. 2013 F/W 그 어느 때보다 구조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이 시즌에는 상반된 소재의 결합과 컬러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 에디터
- 컨트리뷰팅 에디터 / 송선민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모델
- 송경아
- 스탭
- 헤어 / 한지선, 메이크업 / 오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