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은 한국 영화사를 몇 차례나 새로 썼다. 101편의 작품을 만드는 동안 당대의 흥행 기록을 갱신했으며, 국내 감독으로는 최초로 칸 영화제의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하지만 이 거장은 규모와 내용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과거에 안주하는 대신 사람들의 냉정한 평가 앞에 설 미래를 택했다. 50여 년간 현장을 지켰고 이제 102번째 장편을 준비 중인 그의 역사에는 여전히 마침표가 없다.
임권택 감독은 지난 50여 년간 10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어쩌면 물리적인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욱 강조되어야 할 건 그를 빠뜨리고는 한국 영화의 역사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대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현장을 지켰던 연출자는 기억할 만한 발자국을 여럿 남겼다. 세계 비평계에 국내 영화인들의 존재감을 알렸고, 관객 동원 기록을 갈아치우며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이라는 정서적 환경에서만 가능한 영화 언어를 찾고자 치열하게 고민해온 작가다. 그 노력은 화려한 수상 경력이나 흥행 성적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최근 부산 동서대학교는 거장의 묵직한 필모그래피를 돌아보고자 임권택영화박물관을 개관했다. 그가 이룬 성취들을 생각하면, 결코 과할 것이 없는 예우다. 인터뷰이의 자택을 찾은 시각은 오전 10시였다. 여든의 감독이 직접 현관까지 나와 방문객을 맞았다.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처음 머릿속에 새긴 게 언제였을까. <씨받이>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 소식으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던 열 몇 살 때일 거다. 그러고 보면 나는 그를 통해 비로소 감독이라는 예술가의 존재를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세대에게 임권택은 한국 영화의 가장 익숙한 대명사다. 주름이 깊어진 얼굴이 탁자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따뜻한 녹차를 따라 권했다. 임권택 감독과의 대화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스스로에 대한 그의 객관적인 평가다. <만다라>나 <축제>가 언급될 때는 솔직하게 자부심을 드러냈으며, 전작 <달빛 길어 올리기>는 “너무 큰 이야기 안에서 허우적대기만 하다가 나온 영화”라고 잘라 말했다. 또한 아무리 발버둥친들 자신은 세월을 거스를 수도, 한국적인 정서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편하게 인정했다. 한계를 정확히 읽고 그 안에서 가능한 최선을 찾는 냉철함이야말로 긴 세월을 거치며 얻은 지혜인 듯했다. 모두가 임권택이라는 전설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도 여전히 그만은 고치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인간을 본다. “나는 천재도 뭣도 아니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하느라 늘 열심히 산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오랜 세월을 견딘 예술가의 고백은 괜한 겸손이나 헛된 치장이 없는 담담한 진실이었다. 현재 그는 102번째 작품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김훈의 단편을 원작으로 하는 <화장>은 한 남자의 욕망과 죄책감을 연출자의 나이만큼 성숙한 눈으로 살피는 드라마가 될 것이다. 새로운 걸작이 탄생할 수도,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감독이 만든 것과도 다른 영화가 되리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최근 개관한 임권택영화박물관은 데뷔 이래 지금껏 거쳐온 영화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망라한 공간이다. 완성된 장소를 처음 방문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
지금껏 찍은 작품만 100편이 넘는다. 박물관에 온 사람들이 그 가운데 뭔가를 궁금해하면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 참 난감한 게, 내가 데뷔하고 첫 10여 년 동안 50편 정도를 찍었는데 그중에는 좀 없어졌으면 싶은, 너무 부끄러운 것들이 있다. 정신없이 만들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있는 자료를 안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이고…. 임권택이라는 감독이 그래도 괜찮게 산구석이 있다고 판단해서 박물관도 열었을 텐데, 과거가 그렇게 저급한 영화들로 드러나면 문제가 있겠구나 생각한다. 물론 그 후 열심히 산 흔적도 함께 확인할 수 있을 테지만.
데뷔 초, 즉 1960년대에 만드신 영화들에 대해서는 유독 평가가 인색하다. 스스로의 과거에 필요 이상으로 엄격하신 건 아닐까?
물론 객관적인 의견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나 자신은 내가 판단해야 한다. 다행스러운 한 가지는 시작이야 내놓기 부끄러운 영화 인생이었지만 후에 그런 걸 다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처음부터 모범 답안처럼 산 인생보다는 더 배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있어서 부끄러운 것보다는 없어서 안타깝게 느껴지는 자료가 많지 않을까? 한국의 경우,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카이브 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했다.
필름이고 뭐고 나중에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못해서 당연히 보존도 소홀히 했다. 한창 많이 찍을 60년대에 일기를 쓰긴 했는데, 한번은 쭉 읽어봤더니 순 구라인 거다. 전부 자기 합리화고 상황을 미화시키고 있고…. 차라리 오늘 뭘 찍었고 이런 일이 있었다, 딱 사실만 적었으면 기록으로의 가치라도 있었을 텐데. 내가 봐도 다 거짓이라 태워버렸다. 그래서 그때 기록은 나한테 아예 없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80년대였던가, 어느 날 TV를 보는데 60년대 저질 영화가 돌아가고 있더라. 알 듯 말 듯한 기분으로 끝난 뒤에 자막을 확인하니 내 작품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그때 본 영화 제목이 뭐였는지를 모른다.
진지한 작가로서의 변신을 모색하며 완성한 1973년 작 <잡초>의 프린트 역시 현재 유실된 상태다. 임권택이라는 연출자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작품이기 때문에 더욱 아쉬운 자료다.
저질 액션이나 사극만 찍어오다가 이제 뭔가를 바꿔보겠다고 결심했는데 투자자가 없었다. 결국 지방 흥행사들과 접촉해서 직접 제작을 한 거다. 그런데 원판을 내가 어디다 버렸는지 모른다.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 저질 감독이 크게 발심해서 찍은 영화니까 전 작품들과 대조해보면서 스스로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걸 못했다. 없어진 것 중 <잡초>가 제일 아쉽다. 지금도 어떤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직접 ‘기억’하는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는 <씨받이>부터다. 열한 살 초등학생의 눈에도 당시 강수연의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은 큰 뉴스였다. 돌이켜보면 <만다라> <길소뜸> <씨받이> 등을 내놓은 1980년대 초 중반은 국제 무대에서 비평적으로 주목받으며 수상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내기 시작한 시기다. 그 무렵 상이라는 건 어떤 의미, 혹은 응원이었나?
지금도 평단에서는 유신체제 하의 70년대를 한국 영화의 암흑기로 꼽는다. 아무튼 나는 꾸준히 영화를 찍었는데 다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문예영화 그런 것들이었다. 그때는 정부가 일 년에 4편씩 우수 영화를 선정했고, 해당 작품을 만든 영화사에만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줬다. 나는 종종 그 상을 타는 축이었기 때문에 흥행과 상관없이 작품을 할 수 있었던 거다. 할리우드 3류 영화 흉내를 낸 60년대를 후회하면서 한국 사람의 정서와 속도로 우리다운 걸 찍어야겠다고 고민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마음을 먹는다고 바로 욕심만큼 찍히는 건 아니어서 한 10년간 고생을 했다. 어떻게 보면 참 운이 좋았다. 흥행 걱정 없이 시행착오를 할 수 있었던 셈이니까. 그렇게 체질화된 나쁜 습관을 하나둘 버리고 <족보> 같은 작품도 거치면서 한 명의 감독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80년대에 와서는 큰 상도 타게 된 거다. 그런데 상이라는 게 처음 한두 번이나 기쁘지 그다음부터는 별 감동도 없다. 물론 못 타면 자존심 문제가 생기지만.
지금까지의 트로피 중에서 특히 기뻤던 걸 꼽아주신다면?
하도 많아서 잘 모르겠는데… 외국에서 받은 상 중에는 칸 영화제 감독상(<취화선>)이 제일 좋았다. 왜 그랬냐 하면, <서편제>가 흥행도 되고 하니까 내가 작품을 한다고 하면 무조건 도와주려는 사람이 많았다. 그게 다 영화로 성과를 내고, 외국에 가서 상도 타오라는 뜻인 거다. 그런데 만날 강수연, 신혜수 등 여배우들만 수상하니까 내 안으로는 괜한 조바심이 있었다. 그래서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받았을 때는 이제야 빚을 갚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수상 덕분에 영화가 세계 시장에 배급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상은 그런 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 만든 작품이 보다 많은 관객과 만날 길이 터지는 셈이니까.
처음 현장에서 일할 무렵, 감독님에게 영화는 예술적인 목표가 아니라 생계 수단이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영화가 밥벌이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 건 언제부터였나?
난 영화로 뭘 해보겠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냥 여기서 밥은 먹고 살 수 있겠구나 한 거지.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굉장히 재미가 있더라. 이런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구나 싶었다. 평가가 높아지면서부터는 내 생각을 작품에 담아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데서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영화가 세상에 밝고 건강한 기여를 해야 하지, 사람들의 삶을 불운하게 만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다.
요즘 영화도 종종 보시는 편인가?
워낙 만드는 목적이 나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좀처럼 보게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감독이 아닌 관객으로서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작품일까? 예를 들어주실 수 있을까?
그 어떤 재미있는 영화도 다시 보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만은 예외적으로 두 번을 봤다. 영화에 깊게 빠져 지내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삶의 진솔함을 읽고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언젠가 <로마의 휴일>을 재미있게 보면서 아, 나도 이런 오락 영화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생각했지만 그런 예가 많지는 않다.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우리의 삶과 무관한 영화에는 별 흥미를 못 느낀다.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본 적이 있나?
해방 이후 좌익에 가담한 친척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집안 전체가 엄청난 소용돌이를 겪었다. 어린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연좌제의 불이익을 겪어야 했으니 못 참고 가출을 한 거다. 이후로도 한국의 수난사를 전부 몸으로 체험하면서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런 그늘 아래서 살아야 하고 이런 수난을 겪어야 하는지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오락보다는 삶에 관한 성찰을 담는 영화를 추구하게 된 데는 그런 영향이 있지 싶다.
한국 영화계에서 50여 년 동안 현역을 지키고 있는 유일한 감독이다. 개인의 욕심이나 바람, 몇 차례의 운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 많다. 그런데 결국에는 그런 체험이 나로 하여금 영화를 만들게 하고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힘을 주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은 노장이 설 자리가 유독 좁은 나라다. 감독님 연배는 고사하고 50~60대만 돼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출자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런 현실이 아쉽게 느껴질 때는 없나?
60대, 70대, 혹은 8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한국 관객들은 절반 이상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굉장히 손해보고 있는 게 그런 부분이다. 우리 나이나, 그게 어려우면 60대들이라도 팽팽하게 활동해야 서로 경쟁 관계를 이룰테니까. 나는 최근에 와서 영화는 자기가 산 만큼, 본인 나이만큼 찍는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 외국 친구가 재작년쯤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만다라>를 다시 봤더니 전에는 읽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이 눈에 들어오더라고. 그러면서 세계 틈새 시장을 겨냥해 한 번 더 배급하면 어떻겠느냐는 거다. 얼마 전 TV에서 <축제>를 틀었던 모양이다. 거기 출연한 변호사 한 분도 전화를 걸어왔다. 영화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한 채로 참여했었다는 걸 이제야 느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 영화에도 문제가 있는 거다. 나는 도리 없이 내 나이를 찍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작품을 계속해야 하나, 그런 의문을 갖게 됐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지금 여든인데 그렇다고 여든 먹은 사람만 알아보는 영화를 찍으면 그걸 누가 봐주겠냐 싶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실제로 쌓인 나이에 따라 좌우된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가능한 한도 내에서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 나와 비슷한 연배의 감독들이 많이 활동 중이라면 관객들도 그런 이야기에 좀 더 훈련이 될 테고 내가 이해받을 여지 역시 커질 거다. 그런데 나 혼자 맨날 옛날 것들 찍고 있으니까 점점 힘들어질 수밖에(웃음).
하나의 작품을 마치고 나면 누구의 평이 가장 궁금한가?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신지?
내 영화에 오랫동안 깊은 관심을 보여온 평론가가 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 물론 만들 때는 전혀 개입이 없는데, 시사회에서 영화 끝나고 나면 한마디씩 심사 괴롭히는 소리를 하니까….
사모님은 누구보다도 솔직한 말씀을 들려주시는 분일 것 같다.
맞다(웃음).
얼마 전에는 102번째 영화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김훈의 단편인 <화장>의 각색 작업을 진행 중이신데, 이 작품은 어떤 이유로 택하게 되었나?
김훈의 문장이 주는 박진감이 인상적이어서 오래전부터 그의 소설을 한번쯤 영화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은 사위어가고 시들어가는 부인과 새로운 생명력으로 다가오는 후배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성적인 문제일수록 특히 그러한데,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가리고 사는 부분이 있다. <화장>이라는 소설이 그 일부를 정직하게 드러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에 내 나이의 관점을 더해 영화로 만들어보자 한 거다.
- 에디터
- 피처 에디터 / 정준화
- 포토그래퍼
- SHIN SUN HY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