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의 트렌드가 공존하는 이번 시즌, 길고 짧은 옷의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를 포착하다.
타이츠 살 결심
만족스러운 쇼핑을 위해서는 허울 좋은 핑계가 필요한 법. 이번 시즌 주목해야 할 트렌드는 모두 허리 아래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성기를 구가 중인 미니스커트의 후광을 받고 파생된 트렌드가 꽤 많으니 말이다. 허전한 다리를 채워줄 타이츠도 마찬가지. 대표적으로 미우미우는 프레피 감성이 느껴지는 플리츠 미니스커트에 울 니삭스를, 마린 세르는 패치워크 미니스커트에 타탄체크가 연상되는 도톰한 니트 타이츠를 착용해 룩의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
세트로 갈게요
셋업이라 하면 클래식한 정장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셋업의 하의가 미니스커트라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재와 컬러, 심지어 디테일까지 한 가지로 통일한 룩은 강인한 여전사의 자태를 드러낸다. 주목해야 할 점은 각 브랜드의 시간대가 다르다는 것. 데님의 명가 디젤과 엠부시는 세기말 시절로, 에르메스와 펜디는 현재에, 발망은 미래로 향하며 미니스커트의 영역을 드넓게 확장했다.
클래식 한 스푼
극단에 있는 트렌드를 조금 편하게 즐기는 현묘한 처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클래식한 아이템을 더하는 것이다. 자타공인 미니스커트 트렌드의 선구자, 미우미우가 발명한 ‘셔츠 더하기 미니스커트’의 공식을 기억하면 쉽다. 이 외에도 질 샌더와 베르사체, N°21의 재킷 룩에서 아이디어를 얻어도 좋다.
신발이라는 완충제
한도 끝도 없이 짧아지는 미니의 세계! 몇 시즌째 지속되고 있는 미니 열풍이 이번 시즌엔 가죽 부츠와 함께 등장했다.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한 솔루션일까? 이번 시즌 가장 짧은 의상을 선보인 알렉산더 왕과 지방시는 치마와 부츠 사이의 틈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사이하이 부츠를 매치했다. 흘러내리는 듯 자연스러운 주름을 연출하는 슬라우치 부츠를 활용한 이자벨 마랑의 룩에서 힌트를 얻어도 좋을 듯하다.
감추며 드러내기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요소를 조합하는 익숙한 방식은 언제나 성공하는 패션 법칙이다. 이 공식을 맥시 트렌드에 대입하면? 감추되, 드러내는 묘한 매력의 시스루 맥시 드레스가 탄생한다. 신발의 앞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내려오는 맥시 드레스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런웨이를 압도했는데, 대표적으로 발렌티노와 맥시밀리언 데이비스, 16알링턴은 실오라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얇은 소재로 몸의 실루엣이 훤히 보이는 맥시 드레스를 무대에 올렸고, 돌체앤가바나와 디온 리는 각각 언더웨어와 뷔스티에로 센슈얼한 무드를 더한 맥시 스타일을 제안했으며, 몰리 고다드와 랄프 로렌은 노르딕 패턴 니트 스웨터를 활용해 일상에서 즐길 만한 맥시 룩을 선보였다.
검은 사제들
팬데믹에 이별을 고하는 물결이었을까? 그 어느 때보다 검게 물든 런웨이에는 생로랑, 지방시, 버버리, 앤 드뮐미스터의 용맹한 전사들이 자리했다. 흥미로운 점은 검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일관성이 있었다는 것. 바로 길고 가느다란 롱앤린 실루엣이다. 검은색이 내포한 강렬한 무게감이 미니멀한 실루엣에 조용한 카리스마를 부여하자 단순하지만 어딘가 오묘한, 묵직한 오라가 드러났다.
트로피 드레싱
맥시의 세계관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 디자이너들은 트로피 모양과 닮은 의상으로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풍성한 볼륨감의 맥시 스커트로 안정적인 균형 감각을 전달하는 디올과 캐롤리나 헤레라,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로 독특한 실루엣을 창조한 로에베와 리차드 퀸, 쿠튀르 요소로 룩에 한 방을 선사한 MSGM과 발렌티노의 의상은 어딘가 전시해두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마치 빛나는 트로피처럼!
런웨이에서 길거리로
이번 가을/겨울 시즌 런웨이에서도 리얼웨이로 넘어와도 위화감이 없을 실용적인 룩이 속속 등장했다. 유서 깊은 하우스 브랜드와 스포티즘 미학의 만남이 꾸준히 반복되는 만큼, 편안한 옷을 어떻게 멋지게 입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맥시 드레스는 오랜 시간 사랑받을 듯하다. 아크네 스튜디오의 프린지 장식 드레스는 자칫 평범해 보일 수 있는 티셔츠를, 루이 비통의 우아한 실크 드레스는 스트라이프 티셔츠를 런웨이 위 화려한 아이템으로 탈바꿈시켰다.
- 패션 에디터
- 김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