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가 없는 유행병을 거치며 디지털 혹은 무관중 쇼로 컬렉션을 치러야 했던 디자이너들이 리얼 런웨이로 복귀했다. 2022 F/W 시즌은 다이내믹하고 실험적인 런웨이가 하나둘 부활하며 그간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로맨틱 보이
‘젠더 프리 트렌드’라는 언어가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고정관념을 타파한 패션이 부각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매 시즌 소녀스러운 로맨티시즘을 전파해온 브랜드 미우미우가 남성 모델들에게 짧은 쇼츠와 주름 스커트, 그리고 토 슈즈를 입힌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해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시즌을 휩쓴 로고 브리프 패션도 그대로다. 이제 우리는 한 뼘 남짓한 마이크로 미니스커트와 브리프를 레이어드해 입은 남성을 스트리트에서 보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미우미우가 메가 트렌드를 견인하는 브랜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
다시, 판타지
상상력을 발휘한 아티스틱한 패션쇼를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초현실주의 예술에 빠진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은 이번 시즌 메레 오펜하임, 린다 벵글리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라텍스, 풍선, 3D 프린트 등 다양한 오브제와 기법을 활용해 전위적인 컬렉션을 완성했다. 터무니없을지언정 과장된 디자인에 사로잡힌 재능 넘치는 이들 덕분에 패션 판타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모던걸
여성성에 대한 단일한 정의는 없다. 그러므로 다분히 주관적 관점이지만, 오래도록 페미닌하다고 얘기되어온 밝은 파스텔 색, 깃털, 하늘거리는 소재, 화려한 란제리 룩이 2022 F/W 런웨이 곳곳에 출몰했다. 이와 대비되는 경직된 소재의 큼직한 아우터와의 스타일링을 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
호스 걸스
멋지고 우아하기로 치자면 승마만 한 운동이 없을 것이다. 싱글브레스트 재킷, 큼직한 판초, 무릎까지 올라오는 견고한 승마 부츠, 승마 모자 등이 런웨이에 올랐다. 에르메스는 언제나처럼 곳곳에 하우스 특유의 승마DNA를 삽입한 컬렉션을 펼쳤다. 그런데 이번 시즌의 승마 패션에서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윗부분은 넉넉하고 무릎에서 발목까지는 꼭 끼게 되어 있는 승마용 바지인 조퍼스 팬츠 대신 슬림한 실루엣의 하의가 주를 이뤘다는 것.
새빨간 80’s
돌고 돌아 이번엔 80년대다. 그런데 이 80년대가 그 어느 때보다 대담하고 붉어졌다. 가장 격렬하게 80년대를 환대한 돌체앤가바나는 파워 숄더와 잘록한 허리 라인을 소환해 그 시절 모래시계 룩을 완성했고, 베르사체는 코르셋 원피스, 라텍스 레깅스 등으로 관능적이고도 모던한 해석을 더했다. 화려한 귀환을 알린 80년대 패션도 Y2K 패션을 대신할 힙스터 패션의 상징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할 때다.
#NO WAR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디자이너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발렌시아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뎀나는 1993년 조지아 내전으로 피란민이 된 과거 자신의 상처를 떠올리며 쇼장 좌석에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노란색이 섞인 티셔츠를 놓았다. 인공 눈바람이 몰아치는 런웨이를 힘겹게 걷는 모델의 모습은 전쟁을 겪고 있는 난민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전쟁의 비참함을 떠올리게 했다. 발망의 올리비에 루스테잉 또한 우크라이나 난민을 위해 기도하며, 자유와 존엄을 지키는 평화에 대한 갈망을 컬렉션에 담았다고 밝혔다. 그는 중세에서 영감을 받은 갑옷, 기어, 압축 패드 등 전쟁에서 몸을 보호해주는 장비들을 쿠튀르적으로 구현한 룩을 선보였다. 디올 역시 전쟁의 아픔을 염두에 둔 듯두툼한 어깨 패드, 에어백 코르셋, 방탄조끼 등 컬렉션 전반에 다채로운 ‘보호 장비’를 접목한 룩을 선보였다.
턱스 프리
스트리트 패션과 원마일웨어라는 실용적 트렌드의 긴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인지 빈틈없는 테일러링에 매니시한 스피릿, 섹시함이 깃든 턱시도를 입은 여성이 등장했다. 1960년대 이브 생 로랑의 르스모킹 이후 여성의 옷장을 풍요롭게 채워온 정장 슈트 말이다. 꼭 전통의 턱시도 룩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초슬림 실루엣에서 약간의 오버사이즈, 야구모자와 짝을 이룬 랄프 로렌 컬렉션의 룩까지, 이번 시즌의 턱시도는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니까.
- 패션 에디터
-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