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의 각본을 쓴 정서경 작가의 언어는 이토록 다르다.
한 형사의 구역에 와서 두 명의 남편을 죽인 여자 이야기’로부터 비롯된 수사극이자 이를 매혹적으로 빚어낸 멜로극. 영화 <헤어질 결심>은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을 신호로 평단의 사랑과 열렬한 지지를 독차지했는데, 그 외의 성과가 또 있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 즉 공동 각본가이자 두 창작자의 앙상블이 독보적이라는 명제가 사실임을 재차 증명했다는 점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박찬욱 월드’에서 정서경 작가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탄복하게 만드는 예측 불가능한 서사와 날카로운 장면, 유별나게 반짝이는 캐릭터 그리고 관객을 홀린 듯 그 안으로 끌어들이는 대사. 정서경 작가는 박찬욱 감독과 공동 집필한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에 이어 <헤어질 결심>에서도 영화적 즐거움 이상의 성취를 펼쳐 보였다. 작가가 건넬 신작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기다리며, 지금도 여전히 관객의 마음을 완강히 장악한 정서경의 언어들을 다시 꺼내 물었다.
“난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정서경 작가는 <헤어질 결심>을 통해 누군가를 위해 무너지고 깨지더라도 이를 감내하는 근원적인 사랑을 보여주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 대목에서 우선 떠오르는 명대사가 있다. 형사 해준(박해일)은 믿었던 서래(탕웨이)가 자신의 판단과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토하듯이 내뱉는다.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작가의 언급처럼 영화가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 말은 기이하지만 사뭇 다른 사랑의 언어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산과 바다’처럼 이에 조응하는 서래의 대사. “난 해준 씨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두 사람은 안개 자욱한 이포라는 도시에서 다시 조우하고, 서래는 그곳에 온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미결사건에 집착해 잠도 못 자는 해준. 그런 그의 마음에 평생 부유하며 명멸하고 싶은 서래. 그런 의미에서 이 역시 비밀스럽고도 아주 애절한 고백이다 싶다. 특히나 이 대사가 유독 기억에 남는 건 엔딩 크레딧의 삽입곡 ‘안개’의 가사와 겹쳐지며, 서래라는 캐릭터가 관객에게도 쉬이 잊을 수 없는 사건처럼 입체적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여지껏 내 손으로 씻기고 입힌 것 중에 이만큼 예쁜 것이 있었나?”
한 방송에서 밝힌 정서경 작가의 경험담 하나. 어느 날 자다가 깨서 보채는 자신의 아이를 달래다 ‘누구나 엄마가 필요하다. 그래서 평생 그런 사람을 찾는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이때 머릿속에 ‘엄마가 없는 두 소녀가 서로에게서 사랑을 찾는 이야기’가 자연 발생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영화화되고 우아하고 매혹적인 이미지로 실체화된 결과물이 바로 영화 <아가씨>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경험은 하녀 숙희(김태리)와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를 둘러싼 사건의 구심점이 되는 행동이나 선택, 생각과 감정을 경유하며 그 기원을 짐작할 수 있는 특별한 증거가 된다. 또 이를 숨죽여 따라가다 보면 숙희가 아이 다루듯 히데코를 돌보며 말하는 대사의 의미가 덥석 손에 잡히기도 한다. “여지껏 내 손으로 씻기고 입힌 것 중에 이만큼 예쁜 것이 있었나?” 이는 <아가씨>가 아낌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랑의 최전선에 위치한 대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영화 밖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 한 번만 더 유괴해 주세요.”
대단히 모순적이고 파격적인 대사다. 만나서는 안 될 것 같은 ‘엄마’와 ‘유괴’라는 단어가 이런 뉘앙스로 함께 모이다니. 정서경 작가의 첫 드라마 집필작 <마더>에서 그 모순과 파격은 오히려 간절함과 그리움을 역설한다. 아동 학대로 고통받는 소녀 혜나(허율)와 소녀의 ‘진짜’ 엄마가 되기로 한 수진(이보영)의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 수진은 혜나를 납치한 죄로 체포되고 그로 인해 둘은 떨어지게 된다. 이후 아동보호소에 머물게 된 혜나는 수진과의 통화에서 보고 싶다고 울먹이며 말한다. “엄마…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유괴해 주세요.” 드라마의 서사에는 진정한 모성의 의미와 작고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 그리고 둘 사이의 연대감이 감성적으로 또는 첨예하게 뻗어 나간다. 이 대사는 그 모든 것을 또렷한 울림으로 소환하는 대사라 칭해도 손색이 없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함께한 두 번째 작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개봉 당시 새로운 도전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는 ‘복수 3부작’을 마친 뒤 선보인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였기 때문이다. 정신 병원을 배경으로 자기 자신을 싸이보그라 믿는 영군(임수정)과 그녀를 감싸주고 지켜주는 환자 일순(정지훈)의 독특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전작들에 비해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지금도 그 의미가 꽤 유효하며 가치가 있는 대사를 우리에게 선물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영화 후반부, 싸이보그인 스스로를 충전하기 위해 폭우 속에서 번개가 떨어지길 기다리는 영군에게 일순은 이야기한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냅시다”라고. 희망적인 것을 버리고 힘내라는 말이 희망으로 읽힌다는 의미에서 역설적이고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데, 여기에는 닿을 듯 말 듯한 미래는 미련없이 묻고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꿋꿋이 분투하라는 통찰이 번개처럼 번뜩인다. 어찌 보면 누군가의 마음에 평생 꽂히거나 필요한 힘이 될 수도 있는 메시지. 이를 명랑하고 생생한 입말로 복원했다는 점에서 재치와 의미, 어느 하나 소홀한 구석이 없다.
- 프리랜스 에디터
- 우영현
- 사진
- Courtesy of 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