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음악’의 시대가 막을 올린 이후 뮤직비디오의 지위는 단 한 번도 뒷걸음질친 적이 없다. 더욱이 K팝 산업이 거대하게 몸집을 불리면서 K팝의 시각적 요소를 망라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MV에 이 시대의 크리에이티브들이 모여들고 있다. 지금 K팝 MV 신을 가장 흥미롭게 물들이고 있는, 1990년대생 MV 감독 넷을 만났다.
손승희
지금 K팝 아이돌 MV 제작자 중 가장 감 좋고 타율 좋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손승희다. 여기서 감이란 영상미, 타율이라 함은 다름 아닌 유튜브 조회수를 말한다.
(여자)아이들 ‘Tomboy’(2022),
태연 ‘INVU’(2022),
창모 ‘모래시계’(2021),
키 ‘Bad Love’(2021),
뱀뱀 ‘riBBon’(2021) 등
<W Korea> 우선 1억 뷰 축하한다. 최근 당신이 연출한 (여자)아이들 ‘Tomboy’의 MV가 유튜브 조회수 1억을 기록했다.
손승희 어휴, 감사하다(웃음). 나도 예상했던 것보다 스코어가 훨씬 좋아서 깜짝 놀랐다.
올해 <더블유> 4월호에서 (여자)아이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당시가 ‘Tomboy’로 컴백하기 직전이었는데, 다섯 멤버 모두 이를 갈고 앨범을 준비했다는 게 느껴지더라.
정말로 그랬다. 나는 오히려 그런 에너지가 좋았고. 리더 소연과도 사전 미팅을 두 차례나 가졌다. 사실 미팅은 보통 회사 차원에서 하지, 뮤지션과 대면해서 진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소연이 그만큼 적극적이었는데, 그냥 현장에 와서 콘티 보면서 대충 찍겠다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도 준비를 해서 가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제작자인 나도 열정을 갖게 되더라고. 소연이 디렉팅에 많이 참여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결코 여느 클라이언트처럼 굴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이 굉장히 잘되는 사람이다.
이번 ‘Tomboy’에서도 느꼈지만 당신이 연출한 MV에서는 뮤지션들이 모두 ‘예쁘고 멋있어’ 보인다. 기본적으로 연출자가 뮤지션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그런 화면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알아주니까 너무 고맙다. 진짜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다. 사실 내가 다른 감독들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는 좀 자신 있다. MV를 찍을 때 그 뮤지션이 나의 ‘최애’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고 만드는 편이다. 예전 MV부터 라이브 영상까지 다 챙겨 보면서 스스로 ‘입덕’하려고 애쓴다. 팬들이 원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니까. 예를 들어 올해 태연의 ‘INVU’를 기획할 때도 유튜브 클립을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팬들의 댓글을 살폈다. 그런데 ‘언니 쿨톤도 너무 잘 어울려요. 머리 애시로 염색해주세요’라는 댓글이 많더라고(웃음). 이를테면 그런 것들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거다. 이번 ‘INVU’는 태연이 아르테미스라는 설정인데 이때 ‘회색 머리를 해서 쿨한 느낌을 강조하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콘셉트를 발전시키는 거다.
그래서 누군가 태연의 ‘INVU’ MV를 보고 말하더라. ‘힙해진 아르테미스’라고(웃음). 처음 아르테미스라는 설정은 어떻게 떠올렸나?
평소 가사에서 힌트를 얻는 편이다. ‘INVU’는 누군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대를 질투하는 여성이 주인공인 노래다. 딱 듣는 순간 굉장히 자존심이 센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사랑해서 비참해’가 아니라 ‘내 사랑을 받는 네가 질투나’니까. 애초 엔터에서 잡은 브리프 콘셉트가 ‘전사’이기도 했고, 여기서 좀 더 발전시켜 사냥의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기본 설정으로 가져가고 오리온과의 사랑 이야기를 스토리라인으로 삼으면 딱이겠다 싶었다. 아르테미스는 순결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평생 처녀 님프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냈는데, 그런 도도한 여신도 딱 한 번 사랑을 했고 그게 오리온이었다. 계속 자기 사랑을 부정하다 결국 오리온이 죽어서야 자기 사랑을 인정해 별자리로 만들었다는 설화가 유명한데, 마침 ‘INVU’의 주제와 너무 잘 맞아떨어졌다.
얘기를 듣다 보니 프리프로덕션에 공을 많이 들인다는 인상이 든다.
제일 중요하다. 프리프로덕션을 짧게 준비하는 분도 많다고 들었는데, 경험상 첫 단추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스타일이다. 의상이든 미술이든 준비하고 생각한 만큼 디테일의 밀도가 올라가니까. 그래서 기획안에 엄청 공을 들인다.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도 미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아예 PPM(기획서)에 스타일링 장을 따로 만들 정도다.
사실 스타일링 시안을 그렇게 빡빡하게 준비하는 MV 연출자는 흔치 않지 않나? 보통은 엔터의 몫이니까.
그렇지. 그런데 세트에 백날 돈 들여봤자 결국 포커스가 잡히는 건 인물이다(웃음). 지금 우스갯소리로 말했지만 사실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만큼 중요한 게 없다. 같이 일하는 조감독 같은 경우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머리 색깔을 바꾼 것만으로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데, 사실 나는 그런 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아이돌 친구가 이번에 MV에서 핑크색 머리를 하고 나오는 게 어떤 사람한테는 눈물이 나는 일일 수 있는 거다.
K팝 산업, 아이돌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 같다. 요즘 당신이 바쁜 이유를 알겠다(웃음).
하하. 요즘 젊은 제작자라든지 여성 제작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일 거다. 아무래도 K팝 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니까.
특히 당신 같은 1990년대생 여성 감독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MV 제작 신의 변화를 단편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대학생 시절엔 내가 여성 감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여자 동기들은 대부분 미술 감독으로 빠졌으니까. 레퍼런스 자체도 지금처럼 없었다. 과거 신동글 감독님의 인터뷰를 엄청 찾아봤는데, 그 당시 신 감독님이 거의 유일한 여성 감독이어서다. 근 몇 년 사이,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신이 엄청나게 달라진 것 같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교수님 중에 실제로 여학생들의 인사를 안 받아주는 분도 계셨다. 연출부 알바를 나가도 여자라는 이유로 당일 현장에서 잘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K팝 MV만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화려한 코레오그래피 신.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코레오를 잘 찍는 민족은 없다고 생각한다(웃음). 이제는 한국이 코레오 신의 레퍼런스가 될 정도다.
MV 연출에서 당신이 지향하는 것, 또 지양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쨌든 ‘아티스트’의 MV다. 무조건 아티스트가 멋지게 나와야 한다. 가끔 ‘콘셉트에 잡아 먹힌 스타’라는 말이 있지 않나. 만드는 연출자 입장에서 멋질 거라고 생각해 제작했는데, 정작 아티스트가 콘셉트에 먹히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제일 지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누리
확실히 친절하진 않다. 간단한 내러티브도 복잡하게 펼쳐 보이거나, 그 반대의 경우로 진행되며 MV는 영화와 묘한 교집합을 이룬다. 정누리가 연출한 영상이 그렇다.
바밍 타이거 ‘Loop?’(2021),
TXT ‘날씨를 잃어버렸어’(2020),
크러쉬 ‘자나깨나’(2020),
이하이 ‘홀로’(2020),
지코 ‘아무노래’(2020) 등
<W Korea> 혹시 영화과 전공인가? MV 감독으로 입봉하기 전인 2018년 단편영화 <글리제>로 프랑스 낭시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정누리 다들 그렇게 오해하는데 실은 시각디자인과를 나왔다. 디자인 전공이라고 해서 꼭 디자인을 해야 했던 게 아니라 영상 쪽을 살려서 졸업해도 되는 환경이었다. <글리제>는 2018년 나, 촬영팀 2명, 배우 1명이 단출하게 찍은 단편인데 그걸 하면서 영상 분야가 나와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까 영상 기술을 빨리 습득하고 싶었는데, 한국에서는 MV 시장이 모든 기술을 흡수하고 발전하는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해서 MV에 발을 담그게 됐다. 본의 아니게 MV 감독이 된 경우다(웃음).
<글리제>의 로그라인이 독특하다. ‘지구와 닮은 행성 글리제. 그곳의 마지막 생존자는 땅이 끝나는 곳까지 멈추지 않고 가면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전설을 굳게 믿는다.’ 비록 러닝타임은 9분 20초지만, 장르는 SF다.
나도 그걸 SF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도 전혀 SF 영화 같지 않지만 SF적인 요소가 잔뜩 녹아 있다. 딱 그런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인간이 지구에서 더는 살 수 없게 됐을 때 갈 수 있는 대체 지구인 슈퍼지구로 원래는 케플러 행성이 제일 유력했는데, 꽤 최근에 지구와 크기, 밀도, 나이 등이 비슷한 글리제라는 행성 직군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시작한 작업이다. 글리제로 보내진 복제인간들이 그곳에서 살다 망했는데 훗날 누군가가 돌아와 자신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신화를 믿고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계속 어딘가 끝으로 향해 가는 로드무비 형식이다. 영상 후반부에는 행성 두 개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먼 미래엔 인간의 정신이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지고 행성에도 인격이 있다는 추상적인 상황을 콘셉추얼하게 영화화한 거다. 이런 개념이 과거 영화 <AI>, <에반게리온>, <아키라> 등에 등장한 적도 있고.
영화가 MV 연출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기도 하나?
너무나. 나는 영화 레퍼런스를 MV에 엄청 넣는 편이다. 작년 연출한 바밍 타이거의 ‘Loop?’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 <캐리>에 대한 오마주였다. 그래서 멤버 소금이 얼굴에 피 칠갑을 하고 등장하는 거다(웃음). 바밍 타이거 멤버들이 굉장히 안 좋은 컨디션으로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설정인데, 이건 영화감독 가스파 노에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늘 불안에 떨고 있다는 데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가 <엔터 더 보이드>를 비롯해 자신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한 1인칭 POV 시점의 컷도 많이 넣었고. 그리고 작년 연출한 이하이의 ‘홀로’도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대한 오마주였다.
언뜻 폭력적인 슬래셔 무비 같던 ‘Loop?’가 있는가 하면, 재작년 연출한 크러쉬의 ‘자나깨나’는 ‘MV의 밈화’라고 느껴진다. MV 한 편에 유명 짤방 ‘잔든건’, 인터넷 쿡방, 강형욱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등 밈이 총집결한다.
맞다. 그때 밈 공부를 엄청 했다. ‘자나깨나’는 크러쉬가 팬데믹 시국을 빗대 쓴 곡이기 때문에 MV 콘셉트도 ‘팬데믹 비디오’로 잡은 경우다. 다만 팬데믹으로 모두가 답답하고 지루하니 ‘무조건 웃기게 가자’로 콘셉트를 잡았다. 찍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웃길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그런데 웃긴 게, 같은 해 연출한 TXT의 ‘날씨를 잃어버렸어’도 팬데믹 비디오였다. 다만 10대 팬데믹을 주제로 한다. 멤버 모두가 2000년대생이기도 하고 가사에 ‘끝이 없는 3월 1일의 저녁에 난 남겨져 있어’, ‘교실 안 콘서트’ 등이 등장한다. 내가 10대가 아닌데 10대 팬데믹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당시 Z세대 공부를 진짜 많이 했다. Z세대가 어떻게 미디어를 소비하는지 연구하면서 줌 화면, 핸드폰 셀카 같은 요소를 넣었다.
K팝 MV만의 특징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작년 TXT의 ‘Frost’를 연출했는데 멤버들이 우연히 점성술사를 만나 자기 운명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린다. TXT란 그룹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MV인 셈인데 세상 어디에도 ‘세계관 MV’라는 말은 없지 않나. 이런 점이야말로 K팝 MV만의 특이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K팝 MV에선 코레오그래피 신이 빠질 수 없는데, 반대로 이런 신들은 정말 퓨어한 시네마토그래피 같다고 느껴진다. 또 장르적 특징은 아니지만 MV를 소비하는 팬들의 피드백이 즉각적이라는 거? 가끔 메일이 오거든. 누구 분량이 왜 없냐, 너무한 거 아니냐며(웃음).
당신의 연출 스타일에 영향을 준 인물이 있나?
연출 스타일이라기보다 커리어 면에서 영향을 준 사람은 있다. 일본계 미국인 감독 히로 무라이. 차일디시 감비노의 ‘This is America’ MV의 감독이자 넷플릭스 시리즈 <아틀란타>를 연출했다. 찾아보니 과거 영화도 찍었더라고. 그처럼 MV, 영화, 시리즈물을 넘나들며 경계 없는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왜 미셸 공드리도 MV를 찍다 영화로 분야를 넓혀갔고, 스파이크 존즈도 스케이트 필름을 찍다 MV, 광고, 영화 등의 작업을 했으니까.
MV 제작 과정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
기획 단계. 프리프로덕션 때 트리트먼트를 굉장히 섬세하게 짜려고 한다. 사실 그게 8할인 것 같다. 즉흥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 준비가 돼서 나오는 즉흥이 있고 아닌 즉흥이 있는데, 어쨌든 즉흥이 되려면 다 플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병적으로 스토리보드대로 찍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래야 오히려 현장에서 새로운 걸 시도할 수 있으니까.
최근 당신을 가장 놀라게 한 영상물은 무엇인가?
샘 레빈슨이 연출한 HBO 드라마 <유포리아>. 웰메이드를 넘어서 나는 그 영상의 모든 문법이 전부 좋았다. <유포리아>를 보면 핀터레스트로 보인달까. 굉장히 뻔한 하이틴 장르가 될 수 있는데도 화면 한 장 한 장의 완성도가 높다. 심지어 엄청 긴 호흡으로 전개되는데도.
당신이 가장 애정하는 MV는 무엇인가?
제너레이션, 070셰이크의 ‘Neo Surf’.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로메인 가브라스의 최신작이다. 머지않은 미래의 아테네를 배경으로 하는데, 화려하거나 복잡한 비주얼 이펙트 없이 순수한 시네마토그래피로 전달되는 이 허구의 세계가 비록 MV 작업임에도 너무나 영화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수호
‘나는 당신의 불편함을 사랑해.’ 이수호의 MV를 볼 때면 그가 종종 이 같은 말을 건네고 있다는 인상이 스칠 때가 많다. ‘불쾌’, ‘충동’, ‘그로테스크’. MV 감독, 프로듀서,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그의 작업 세계를 이해하는 단어들이다.
씨엘 ‘Spicy’(2021),
우원재 ‘Uniform’(2021),
새소년 ‘자유’(2021),
릴체리&골드부다 ‘하늘천따지’(2020),
드레스&소금 ‘My Taste’(2020) 등
<W Korea> 우리 작년 Z세대 인물 35명을 소개하는 ‘Z 35’ 기사로 만난 적 있다. 그때가 새소년의 ‘자유’ MV 연출을 막 끝내고, 뮤지션으로서 당신의 첫 정규앨범 <Monika>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이수호 맞다. 사람들이 보통 나를 영상감독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영상도 음악 때문에 시작한 거다. MV는 보는 음악과 다름없으니까. 학창 시절 혼자 만든 음악을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면서 꽤 오래전부터 음악 작업을 해왔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 사업 때문에 멕시코 몬테레이로 이사했는데 그때부터 혼자 뭔가를 계속 만들었다. 당시 너무 할 것도 없고 친구도 없어서 인터넷 세계로 빠지다 보니(웃음).
뮤지션과 MV 제작자 사이의 밸런스를 맞추기 어려울 것 같다.
모드가 좀 다른 것 같다. 음악을 만들 땐 좀 더 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게 맞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 것’을 만들어야 하니까. 반대로 MV를 연출할 때는 해당 아티스트를 브랜딩한다고 생각하고 접근하는 편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과 타협하고, 아티스트가 가진 걸 기반으로 그 사람을 멋있게 만들어주는 작업이니까.
작년 연출한 새소년 ‘자유’ MV가 큰 화제를 모았다. 영상미도 영상미지만, 배우 유아인이 출연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는데, 그 MV를 볼 때면 기분이 좀 이상해진다. 내가 작업한 비디오 중에서 가장 내면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영상이랄까. 기존의 MV적인 접근으로는 같이 붙을 수 없는 컷들과 파운드 푸티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복합적인 감정을 만들어낸 것 같다. 유아인 씨도 열연해줬다. 그가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을 통해서 프레임 너머 감상자를 지켜본다는 느낌을 연출하고 싶었거든.
유아인의 울먹이는 듯 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에게 어떤 디렉팅을 줬는지 늘 궁금했다.
유아인 씨가 한 시퀀스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서 MV를 보는 사람과 피사체의 관계가 반대로 뒤집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카메라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을지 상상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해줘라.’ 딱 이 정도 디렉팅으로 어떻게 보면 모호하게 열어놓고 맡겼다. 어쨌든 그도 아티스트니까. 오히려 본인이 느끼는 바를 표현하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그가 울먹이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웃음을 짓는 즉흥 연기를 보여줬다.
새소년 ‘자유’에선 대형 화재 현장이 등장하고 우원재의 ‘Used To’에선 주인공 우원재의 얼굴이 점차 흉측하게 썩어가고, 우원재의 ‘Job’에선 양 갈래로 머리를 딴 귀여운 소녀의 얼굴 위로 곡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김아일의 얼굴이 난데없이 합성된다. 당신의 연출색 중 하나로 ‘그로테스크’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요즘 MV는 굉장히 ‘샤랄라’하지 않나.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징그럽고 불쾌한 요소가 담기면 엄청 리스크 있는 작업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이돌 MV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데 ‘이건 너무 가지 않았나?’ 싶어서 그런 요소를 빼고 빼다 보니 결국 샤랄라한 기획만 남는 것 같다. 사실 샤랄라한 연출도 대중을 위해 하는 것인데, 내가 생각하기엔 대중이 그렇게 샤랄라만 원하는 것 같진 않거든. 돌이키면 옛날 MV들, 빅뱅이나 서태지의 것처럼 차트에서 1위를 하고 대중에게 소위 먹혔다 싶은 MV들은 굉장히 실험적이고 멀리 가 있는 지점이 많았다. 요즘 그런 작업을 내면 ‘뭘 이런 걸 냈어?’라는 반응이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내가 연출하는 작업에는 조금 불편한 지점을 쑤셔 넣으려는 것 같다. 다행히 여태까지 프로젝트 모두 ‘더 쑤셔달라’는 요청이 많았고(웃음).
유난히 야외 로케이션 촬영과 다인원이 등장하는 연출을 즐겨 쓰는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우선 물론 세트에서 촬영하면 나도 편하고 모두가 편하겠지만 그러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웃음). 대규모 세트 촬영이라면 작년 씨엘의 ‘Spicy’가 거의 처음이었는데 그걸 하면서 많이 배웠다. 코레오그래피 신으로 퍼포먼스에 어울릴 스테이지 형식을 가져갔고, 프롭에도 많이 신경 썼는데 노래가 강한 만큼 재치 있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어서 피카츄로 래핑된 람보르기니를 사용하거나 조각가 강재원의 대형 용 조각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 건 일종의 필살기다(웃음). 머리수가 많으면 안 멋있어 보일 수가 없다. 우원재의 ‘Uniform’에선 심지어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떼로 등장하는데 노래의 미니멀한 느낌을 살리고자 컬러감이 없는 구조적인 공간에 검은색 옷을 입을 무리를 기하학적 배열로 세워 찍었다.
한편 당신의 앨범 의 수록곡 ‘몸’ MV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당신과 피처링에 참여한 새소년의 황소윤을 비롯한 친구들이 괴상하게 생긴 조각을 들고 산 넘고 물 건너 어딘가로 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 괴상한 조각이라 하면 조각가 곽인탄에게 의뢰해 제작한 아트피스를 말하는 것 같다(웃음). 어딘가 생명체처럼 느껴지는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애초 를 만들 때 하나의 ‘인격체’를 조형한다고 생각하면서 작업해서. 그래서 앨범명도 사람 이름 같은 ‘모니카’다. 아트피스를 만들 때 조각에 고프로를 엄청나게 달아 특이한 기법을 연출할 수 있는 우리만의 장비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그거로 찍은 화면을 후반부에 빠르게 편집해 넣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기법적으로 예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웃음). 또 ‘아트피스를 들고 외곽으로 나가서 동물을 찍자!’란 내용이었는데, 딱히 어떤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니고 그저 우리끼리 노는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K팝 MV만의 특징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좋은 방향으로 ‘컬트’적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세트 짓고 군무를 추고 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MV의 완성도를 말할 때 절대 음악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데, 기본적으로 사운드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곡이 많다.
당신이 가장 애정하는 MV는 무엇인가?
1999년에 나온 에이펙스 트윈의 ‘Windowlicker’.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감독 중 한 명인 크리스 커닝햄이 연출했다. 커닝햄 작업물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적인 불쾌함을 좋아한다. 그가 연출한 이 MV는 한 300년이 지나도 안 촌스러울 것 같다.
이혜인
이혜인은 지금 가장 스타일리시한 화면을 제시할 줄 아는 MV 감독이다. 그는 주로 ‘유스’란 주제를 비디오에 녹여내는데 특유의 VHS스러운 거친 화면 질감이 그와 만나며 더욱 근사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마크 ‘Child’(2022),
로렌 ‘All My Friends are Turning Blue’(2021),
비아이 ‘Uncertainty, The Beauty Of Youth’(2021),
태연 ‘What Do I Call You’(2020), 소금&드레스 ‘Dreamer, Doer’(2019) 등
어떻게 MV 연출을 시작하게 됐나?
이혜인 사실 MV 감독으로 독립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다. 물론 이전에도 MV 작업을 종종 해왔는데, 그보다 사진가 조기석이 운영하는 패션 브랜드 ‘쿠시코크’에 있으면서 촬영과 디자인을 맡고, 조기석 스튜디오에서 퍼스트 어시스턴트로 근무하는 것이 메인 잡이었다.
3~4년 전 당신이 SNS에 습작처럼 올린 개인 영상 작업을 좋게 봤다. 여러 영상 소스를 짜깁기한 몇 초 분량의 모션 콜라주 작업이었지?
맞다. 원래는 사진만 다루다 영상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는데, 영상 장비를 제대로 다뤄본 적도 없고 다만 VHS의 질감을 오래전부터 좋아해서 캠코더를 사서 찍고 다니다 재미로 만들어본 작업이다. 그걸 소스로 모션 콜라주 작업을 하다 ‘디지털로 찍어보고 싶네?’ 하면서 콘티, 스토리, 콘셉트를 짜면서 본격적으로 영상 작업을 이어갔다. 그걸 우연히 좋게 봐준 소금&드레스가 노래가 있는데 함께 작업해보지 않겠냐고 해서 처음 입봉한 MV가 2019년 ‘Dreamer, Doer’다. 스스로에게 몽상가(Dreamer)인지, 실천가(Doer)인지를 끊임없이 묻는 내용의 곡이라, 등장인물이 자신과 체스를 둔다는 설정으로 촬영한 작업이다.
제작자에 따라 누구는 여자를, 누구는 남자를 더 잘 담는다는 인상이 있는데 당신의 경우 남자가 피사체일 때 제 실력이 나오는 것 같다. 또 공교롭게 최근 작업이 모두 NCT 마크, 로렌, 비아이이기도 했고.
따지고 보면 정말 여성 뮤지션과 함께한 작업은 재작년 태연의 ‘What Do I Call You’뿐인 것 같다(웃음). 소금&드레스의 ‘Dreamer, Doer’도 뮤지션이 직접 등장하지 않고 남자 모델과 촬영한 작업이라. 아무래도 남자가 편한 것 같긴 하다. 내 성향상 러블리한 것보다는 조금 어둡고 ‘멋’, ‘느낌’으로 갈 수 있는 것을 선호하다 보니. 패션 브랜드, 패션 포토 스튜디오에서 6~7년 일한 것도 무시 못할 거다. 마냥 예쁘고 샤랄라하게 찍기보다는 어떤 스타일리시한 지점을 적어도 한두 방울은 담으려고 하는 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블리하게 찍어주세요’ 같은 의뢰가 나한테 안 들어온다. 내가 그런 걸 못한다는 걸 알아서인가?(웃음) 오히려 러블리와 반대로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나를 찾는 것 같다.
가장 당신의 아이덴티티가 잘 녹아든 MV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로렌의 ‘All My Friends are Turning Blue’. 밴드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는 작업이었다. 영상 인트로에서 프런트맨이 스튜디오 호리존에 앉아 인터뷰한다든지, 중간에 밴드 멤버들이 아지트에 가서 논다든지 하는 장면을 각본대로 연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촬영하는 이틀 내내 메인 카메라를 돌리는 것 외에 캠코더도 3대 붙여서 가능한 한 연출되지 않은 장면을 포착하려고 했고. 그래서 특유의 러프한 느낌이 잘 산 것 같다. 뮤지션도 굉장히 의욕적이었고 자율도가 높았던 작업이라 ‘하고 싶었던 거 다 넣어보자’ 하면서 신나게 찍은 기억이 있다. 여느 아이돌 MV처럼 얼굴을 타이트로 예쁘게 담아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고, 굉장히 즐겁게 촬영했다. 가장 혼을 불태우기도 했고, 주변에서 반응도 제일 좋았던 작업이다.
그 MV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점은 인트로부터 아웃트로까지 담배 피우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거였다 (웃음).
하하. 한국에서 MV 하면서 언제 그렇게 담배 피우는 장면을 많이 넣어보겠나!(웃음) 아이돌 엔터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나서 마지막 아웃트로 장면도 성냥에 불을 붙여 담배를 태우는 장면으로 끝냈다.
로렌의 ‘All My Friends are Turning Blue’도 그랬지만 NCT 마크의 ‘Child’, 비아이의 ‘Uncertainty, The Beauty of Youth’ 모두 ‘20대 청춘’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주제를 전하되, 셋에 어떤 디테일의 차이를 뒀나?
로렌의 작업에선 확실히 밴드의 우정을 강조했고, 마크의 ‘Child’를 연출할 때는 가사에서 힌트를 많이 얻으려고 했다. ‘Child’는 마크의 첫 솔로곡인데 내용이 굉장히 자전적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이라 팬들 사이 반응이 ‘우리 마크 많이 힘들었구나’였을 정도다. 노래에서 마크가 자신이 느끼는 어떤 ‘책임감’ 을 말한다고 느꼈고, 그걸 토대로 마냥 어리기만 한 20대 청춘의 느낌을 최대한 지양하려고 했다. 비아이는 4개의 곡을 한 MV에 담는 트랙 필름이었는데 그때는 ‘사랑’을 주요 장치로 사용했다.
주로 무엇에서 MV 연출의 아이디어를 얻는 편인가?
가사. 가사를 읽을 때 번뜩 스치며 떠오르는 장면을 믿고 나가는 편이다. ‘이런 가사엔 이런 장면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것이 하나씩 엮이며 블록 쌓듯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것에 맞는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는 거지. 이때부터는 영화에서 아이디어를 길어온다. 태연의 ‘What Do I Call You’를 예로 들자면, MV에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 주인공의 기억이 왜곡될 때 화면을 빨리 감기하는 듯한 효과를 적용한 컷이 몇몇 있다. 그리고 박찬욱의 <올드보이>의 지하철 개미 신이라든지, 최민식이 여행 가방에서 나오는 장면이라든지 하는 미장센을 기억해뒀다가 MV에 어울리겠다 싶은 장면이 있을 때 오마주하는 편이다.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필름 메이커는 누구인가?
쿠엔틴 타란티노. 사실 그가 연출한 <킬 빌>이나 <장고>, <펄프 픽션> 등이 내가 하려는 MV와 맞닿아 있는 지점은 거의 없다. 그런데 타란티노 영화에 나오는 영상 기법이나 트랜지션을 보면 ‘이 시대에 어떻게 이 기법을 사용할 생각을 했지?’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틸로만 봐도 예쁘고. 나는 물론 스토리라인도 중요하지만 스틸로 딱 캡처했을 때 멋있어야 한다. 근데 타란티노 영상이 내게는 그런 작업으로 다가온다.
당신이 가장 애정하는 MV는 무엇인가?
마이클 키와누카의 ‘Black Man In A White World’. 전체적으로 롱테이크 기법에, 흑백으로 화면을 담아냈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이런 요소가 오히려 집중도를 끌어올린다. 이만큼 집중도 있는 MV를 뽑아내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애정한다. 또 중후반에 나오는 상징적인 반전 요소들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아서 더 기억에 남는다.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포토그래퍼
- 박종원, 최영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