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봄, 그리고 캔버스 속 영원히 숨 쉬는 꽃. 회화 작가 여섯 명의 꽃 그림을 펼쳐보며 새롭게 찾아온 이 계절을 보다 탐스럽게 즐겼다.
알렉스 카츠
한 송이의 위로
1960년대, 인물의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연구에 한창이던 화가 알렉스 카츠는 자연 속에서 뜻밖의 돌파구를 발견했다. 저마다의 속도로 꽃송이를 틔우며 바람에 휘날리는 자연 속 꽃들은 작가의 마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여름이면 별장으로 떠나 자연과의 긴밀한 소통 속에서 작업을 이어온 카츠는 2020년, 다시금 꽃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구작 꽃 회화가 운동감에 대한 연구의 결과물이라면, 새롭게 선보이는 신작 꽃 회화는 꽃의 형상 그 자체에 집중한다. 여전히 카츠만의 파격적인 화면 구성력과 편편한 색조가 돋보이면서도, 그 위에는 음영감이 살아 있는 꽃이 마치 조각인 듯 자리한다. 카츠는 신작 회화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친 세상에 꽃 회화로 심심한 위로를 건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김해나(타데우스 로팍 서울 큐레이터)
사진 캡션: ALEX KATZ, WILDFLOWERS 1, 2010, OIL ON LINEN, 243.8X304.8CM(96X120IN). © ALEX KATZ / ADAGP, PARIS 2021.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ALEX KATZ, YELLOW BUTTERCUPS, 2021, OIL ON LINEN, 182.9X121.9CM(72X48IN).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PHOTO BY CHUNHO AN. ALEX KATZ, IRISES, 2011, OIL ON LINEN,
101.6X127CM(40X50IN). © ALEX KATZ / ADAGP, PARIS 2021. COURTESY THADDAEUS ROPAC GALLERY | LONDON · PARIS · SALZBURG · SEOUL.
클레어 타부레
꽃 너머의 얼굴
장미, 튤립, 허니서클(인동덩굴)이 화병에 탐스럽게 꽂힌 어느 장면. 작년 10월 페로탕 파리에서 열린 개인전 <실내 풍경(Paysages d’intérieurs)>에서 클레어 타부레는 꽃 정물화 ‘Offrande’ 연작을 선보였다. 금방이라도 꽃잎이 후드득 떨어질 듯 만개한 꽃은 생기와 활기를 띠지만 미스터리한 느낌 또한 만연하다. 작가는 모노타입(한 장의 종이에만 판화를 찍어내는 것) 기법으로 제작한 ‘Offrande’를 두고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림에 사람의 존재는 없지만 일종의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이번 작업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초상화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1981년 파리에서 태어나 LA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지난 10여 년간 유년기의 노스탤지어에서 출발한 군상 작업부터 자화상 연작 ‘메이크업’을 펼치며 다양한 방식으로 ‘인물’을 탐구해왔다. 중고품 가게에서 발견한 빅토리아 시대 사진 속 익명의 가족, 친척, 형제자매 등이 그의 화폭으로 초대됐고, 대상이 누구든 작가에게 인물이란 자기 내면을 탐험하는 수단이 되었다. 오랫동안 소장해온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Offrande’는 작가의 말처럼 비록 캔버스 속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꽃을 의인화해 완성한 정물화이자 동시에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물결치는 듯한 가벼운 붓 놀림으로 채색한 꽃 너머로는 비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꽃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관계, 얼굴이 넌지시 떠오르는 듯하다. – 전여울(<더블유> 피처 에디터)
사진 캡션: CLAIRE TABOURET, OFFRANDE (PALE), 2021, ACRYLIC ON PAPER, 76.2×56.5CM(30×22 1/4IN), PHOTO: CLAIRE DORN. COURTESY ALMINE RECH AND PERROTIN.
CLAIRE TABOURET, OFFRANDE (PALE BLUE), 2021, ACRYLIC ON PAPER, 76.2×56.5CM(30×22 1/4IN), PHOTO: CLAIRE DORN. COURTESY ALMINE RECH AND PERROTIN.
CLAIRE TABOURET, OFFRANDE (DARK BLUE), 2021, ACRYLIC ON PAPER, 76.2×56.5CM(30×22 1/4IN), PHOTO: CLAIRE DORN.
COURTESY ALMINE RECH AND PERROTIN. KIM JIWON, MENDRAMI, 2021, OIL ON LINEN, 112X145.5CM. COURTESY OFTHE ARTIST & PKM GALLERY.
김성윤
시공이 뒤섞인 가상의 부케
‘아름답다.’ 실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 김성윤의 꽃은 아름답다. 고전적 기법을 활용하여 인물, 정물을 구상 회화로 포착하고 기발한 동시대적 개념까지 담아내는 작업을 펼쳐온 김성윤. 100호가 넘는 사이즈임에도 단순한 재현이 아닌, 꽃이 가진 ‘미(美)’를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그는 꽃 정물화를 고전주의 화풍으로 아름답게 그려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현대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 그의 꽃다발은 개화 시기나 지역과 무관하게 조합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꽃 정물을 통해 재현이 아닌 당시 국가의 경제적 풍요나 도덕적 교훈을 담는 식의 의미 구축을 위해 다양한 꽃을 모아 그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브뤼헐과 얀 반 휘섬의 작업 방법론과 유사하다. 하지만 사진, 온라인 등 다양한 출처를 끌어오고 포토샵 합성을 통해 구성된 시공을 초월하는 김성윤의 꽃다발은 의미 구축보다는 현시대의 기술적 측면과 다양한 컨텍스트가 뒤섞인 혼성적인 모습을 반영한다. 나이키, 코카콜라와 같이 브랜드 로고가 들어간 유의정 작가의 도자 작업이 꽃병으로 등장하는 것도 실체 없이 뒤섞이는 현시대 문화의 혼종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설명으로는 그의 꽃이 가진 아름다움을 전달하기에 무언가 부족한 듯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가 작업 발단 계기에 있다고 덧붙이고 싶다. 아내에게 꽃 선물을 하다 꽃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것. 작가는 말한다. “꽃은 흔한 대상이지만 꽃이라는 매개체로 꽤 많은 세상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 김민수(갤러리현대 아티스트&전시 매니저)
사진 캡션: KIM SUNG YOON, ASSORTED FLOWERS IN THE CELADON VASE IN THE SHAPE OF NIKE BASKETBALL, 2020, OIL ON CANVAS IN FRAME, 117X91.5CM.
톰 안홀트
사라짐의 여정
톰 안홀트의 꽃은 피어남의 순간보다 사라짐의 여정에 주목한다. 자연에서 도려낸 색의 무리가 유리 화병 속 얕은 물을 머금고 선다. 가만히 시드는 절화의 시간이 슬프게도 아름답다. 그러다 떨어뜨린 작은 꽃봉오리, 못다 피운 삶의 하강을 쓰다듬는 작가의 붓질이 유난히 다정하다. 화면은 사랑의 서사를 품고 있다. 영원이라는 환영을 좇는 대신 조용히, 그러나 찬란하게 스러지는 사랑의 이야기다. 여기 작은 낙화는 사랑의 이면, 한시적 낭만 이후의 불안과 고독을 상징하는 소재다. 사라지는 존재들은 애틋해서 더 특별하게 빛난다. 영국 출신 회화 작가 안홀트는 미술사와 가족사, 일상에서 수집한 다양한 경험적 요소를 화폭에 끌어들인다. 최근 서울, 뉴욕, 런던, 베를린, 코펜하겐 등 세계 각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동시대 가장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 박미란(학고재 전시 디렉터)
사진 캡션: TOM ANHOLT, FALLEN FLOWER I, 2021, OIL ON LINEN, 170X150CM. © 2021. TOM ANHOLT. COURTESY OF THE ARTIST, GALERIE EIGEN + ART LEIPZIG/BERLIN,
AND HAKGOJAE GALLERY. TOM ANHOLT, FALLEN FLOWER II, 2021, OIL AND ACRYLIC ON LINEN, 40X30CM. © 2021. TOM ANHOLT.
COURTESY OF THE ARTIST, GALERIE EIGEN + ART LEIPZIG/BERLIN, AND HAKGOJAE GALLERY.
문성식
꽃이자 삶, 삶이자 꽃
문성식의 작품에서 꽃은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가녀린 나뭇가지에 매달려 한껏 웅크린 꽃봉오리부터 꽃잎이 만개한 풍경까지, 작가는 ‘꽃’이라는 대상을 섬세하고 소박한 선으로 표현한다. 식물 키우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목련, 봉숭아, 사루비아 등 각종 나무와 꽃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는 자연스레 꽃의 호흡이 삶의 방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내 나비와 같은 곤충과 꽃 사이의 근원적인 ‘당김’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장미 연작 ‘그냥 삶’에서 꽃 본연의 아름다움과 복잡미묘한 추함을 모두 품은 붉은 장미를 시작으로 순수, 결백, 젊은 영성에 대한 숭배 등의 꽃말을 가진 백장미까지 그렸다. 작가는 어쩌면 꽃이 숨기고자 했던 본성, 아름다운 동시에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의 일부를 세필화를 통해 말하고자 한 건 아닐까? – 이승민(국제갤러리 어소시에이트 디렉터)
사진 캡션: SUNGSIC MOON, 그냥 삶, 2020, MIXED MEDIA ON CANVAS, 130.5X97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 박동석. SUNGSIC MOON, 장미와 나, 2020-2021, MIXED MEDIA ON CANVAS, 26.8X48.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 임장활. SUNGSIC MOON, 그냥 삶, 2020, MIXED MEDIA ON CANVAS, 100X10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PHOTO: 안천호.
- 피처 에디터
- 전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