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프린트 룩으로, 화려했던 ‘나’로 돌아가기.
팬데믹 기간 동안 프린트 공장들이 봉쇄에 들어가면서 2021년 가을/겨울 컬렉션을 준비하던 디자이너들은 시즌 테마에 맞는 프린트를 준비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전 시즌과 비교했을 때 도드라지게 많은 프린트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전대미문의 상황에 대처하고자 고심한 흔적은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난관이 신선한 시도를 낳은 셈이랄까. 새로운 프린트의 원단을 제작하기보다 재고 프린트를 소진하는 방식을 택한 디자이너들의 현명함은 지속 가능한 패션을 추구하는 시대적 이상과 맞닿았다. 긴 팬데믹 기간 동안 일상을 함께한 스웨트셔츠, 홈웨어와는 이제 작별을 고할 때. 한편 화려했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들도 많다. 익숙함은 많은 것을 잊게 만들고, 적응하게 만드니까. 그렇다면 가장 짧은 시간에 예전의 화려하고 트렌디했던 나로 돌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시대의 향기를 담은 프린트 옷을 입는 것!
백화만발
꽃무늬가 단순히 봄과 여름 시즌만을 위한 프린트가 아님을 상기시킨 이번 시즌. 수채화처럼 보이는 작고 가벼운 꽃들을 자카드 천에 프린트해 낭만적인 꽃밭을 만든 지암바티스타 발리, 꽃을 그래픽 패턴화한 프린트를 과감하게 팬츠로 만든 이자벨 마랑, 크로셰 니트 드레스에 꽃무늬 천을 패치워크해 실험적이고 지속가능한 디자인 행보를 보여준 팔로모 스페인, 마음에 드는 프린트 천을 구하기 어려웠을까? 하나하나 꽃을 그려 프린트를 만든 콜리나 스트라다, 동화적 판타지가 느껴지는 디올과 에르뎀의 어둠의 꽃밭까지. 꽃무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했다. 올겨울 꽃무늬 의상을 입고 주변을 싱그럽게 환기시키는 긍정의 효과를 체험해볼 것.
극사실주의
이번 시즌 프린트의 가장 도드라진 현상은 실사 프린트의 물결이 아니었을까? 디자이너들이 팬데믹 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터넷 서치였을 터. 그들은 직접 볼 수 없고, 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상황에 온갖 꿈과 희망을 담은 세상의 모든 것을 프린트로 표현했다. 데이지 꽃밭을 전신 레깅스에 담은 콜리나 스트라다, 날개를 활짝 편 나비를 흑백 사진으로 프린트해 부드러운 실크에 담은 질샌더, 여자들의 화장대에 놓여 있는 립스틱을 프린트해 파티 드레스의 원단으로 활용한 재치 있는 랑방, 이탈리아 디자인 아틀리에 포르나세티와 협업해 그들의 조각품 사진을 프린트화한 루이 비통, 그로테스크한 여인의 손 사진을 케이프 셔츠에 넣은 코트 셔츠로 시대를 거듭할수록 강력해지는 여성의 파워풀한 힘을 표현한 니나리치 등 그 면면도 다채롭다.
펑크 스피릿을 더해
팬데믹으로 인한 긴 봉쇄가 디자이너들에게 펑크 정신을 되살아나게 한 모양이다. 이번 시즌 그 어느 때보다 그래픽적이고, 펑키한 프린트가 눈에 많이 띄었다. 그들은 표현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마음을 말과 행동으로 옷감에 담은 것. 마린 세르의 패치워크 펑크 프린트, 그래픽 콜라주, 락 밴드 소닉 유스의 앨범 재킷을 프린트한 R13, 그라피티 월을 떠오르게 하는 돌체&가바나의 드레스까지, 이번 시즌 터프한 펑크 프린트로 자신만의 컬러와 목소리를 내보는 것도 좋을 듯 보인다.
뉴오리엔탈
이토록 오리엔탈 무드가 세련되게 표현된 적이 있을까? 동양적인 프린트가 트렌드라 할 만큼 주목받은 시즌은 아니지만, 이전과는 다른 어떤 강력함이 있었기에 이 섹션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즌 전만 해도 동양풍은 그저 동양의 화려함만을 부각한 1차원적인 표현이었다면, 지금은 동양의 다층적인 정서를 접하고 그것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모습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Act.N1에서는 수수하고 담백한 동양의 정서를 이해하고 동경하는 듯한 수묵화 느낌의 프린트를 선보였고, 마린 세르는 주술적인 무드를 그래픽적으로 표현해 트렌디하고 힙한 무드를 강조했다. 특히 Act.N1의 수묵화 느낌의 프린트는 마치 동양의 디자이너가 만든 것처럼 그 표현이 섬세했다. 지금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K문화 덕분에 디자이너들이 동양의 다양성을 접할 기회가 늘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새로운 세대의 디자이너가 바라본 동양의 표정과 그 접근 방식이 무척 신선하다. 또한 몸에 딱 붙는 사이클복 소재를 가지고 고리타분할지 모르는 페이즐리 프린트를 유쾌하
추상 작품처럼
“패션의 재미와 행복감을 다시 받아들이거나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시기의 자신의 표정을 새롭게 상상할 때입니다. 그간 사람들은 럭셔리 패션에서 냉소적인 시선을 더 자주 발견했죠. 그보다는 패션이 방출하는 엔도르핀, 즐겁고 행복한 기분을 주는 그 무언가가 패션에 있다고 생각해요. “ 조나단 앤더슨이 로에베 컬렉션을 만들며 언급한 말에서는 그가 왜 지그재그 패턴 프린트, 아방가르드한 추상 작품 같은 프린트, 청량감 넘치는 비비드한 컬러 블록을 활용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디자이너 록산다도 흥미로운 프린트를 선보였는데, 피카소의 드로잉을 연상시키는 러프한 여성의 누드화를 실크 드레스에 프린트하고, 추상회화 3~4점을 패치워크한 듯한 콜라주를 통해 그 어느때보다 아티스틱한 면모를 뽐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조나단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의 말처럼 우리 인생은 이미 충분히 심각하니, 우리 패션에 대해서만큼은 조금 가볍고, 유쾌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다. 팬데믹으로 우린 많이 지쳤고,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 패션 에디터
- 김신
- 사진
- JAMES COCHR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