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 사투하는 거야. 죽음과 싸운다는 거야.” 박서보는 죽음을 두려워하진 않는다 했지만, 1931년생인 그가 예술적 노동을 이어간다는 건 죽음에 맞서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앞두고 만난 그는 깊은 맛이 나도록 그리고 싶다고 했다.
8월 어느 낮, 연희동에 있는 ‘기지’를 찾았다. 이곳은 화가 박서보 부부와 둘째 아들 부부가 거주하는 주택이자, 작은 갤러리와 작업실, 업무 공간이 모여 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외피는 알루미늄 타공 패널이지만, 멀리서 봤을 때는 4층짜리 높이의 수직선이 반복되면서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인상이 두드러진다. 물색도 하늘색도 아닌 희끄무레한 ‘공기색’이 투명하게 드러난 듯한 외관과 규칙적인 리듬의 선들. 입장하기 전에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캔버스 위에 밭고랑 같은 요철이 선을 이루며 반복되는 은은한 색의 묘법 시리즈가 떠올랐다. 건물 입구에는 ‘기지’의 자음과 모음을 분리해 조합한 디자인의 현판과 ‘GIZI | Art Base’라는 표식이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예술계의 거장이 주둔하는 근거지이자 그의 재치와 슬기가 흘러나오는 비밀스러운 장소인 걸까? <더블유>에서 온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박서보는 분홍색 티셔츠에 연분홍색 마스크를 쓰고서, 말 대신 주먹을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팬데믹 시대의 인사란 악수를 하는 것보다 주먹 쥔 손 마디끼리 마주치는 게 더 어울리니까. 허리를 굽히려다 말고 예상 밖의 주먹 인사를 나누며 눈을 맞췄을 때, 그의 큰 눈이 환하게 웃음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1931년생, 그는 올해로 91세다.
국제갤러리에서 오는 9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박서보의 개인전 <Park Seo-Bo>가 열린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인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가 열렸지만, 국제갤러리에서는 거의 10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다. 박서보와 국제갤러리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2016년 브뤼셀 보고시안 재단, 2018년 상하이 파워롱 미술관 등에서의 그룹전을 통해 전 세계에 단색화를 알려왔다. 화가로서 70년의 세월을, 또 그 숫자로는 감히 담아내지 못할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고 지금에 이른 박서보다. 박서보의 시간을 지금으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근의 유의미한 방점은 2015년쯤에 찍을 수 있다. 그해 베니스의 팔라초 콘타리니-폴리냑에서 베니스 비엔날레의 병행 전시로 열린 <단색화> 전이 단색화 담론을 일으키는 데 큰 활력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 이우환을 비롯해 작고한 김환기, 정창섭, 권영우 등의 작품을 집대성한 자리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광주 비엔날레, 프리즈 런던, 뉴욕과 LA에 소재한 갤러리 등에서 단색화를 꾸준히 소개해온 움직임 속에 생긴 일이다. 수많은 평론가와 큐레이터 등이 각자의 시선과 언어로 ‘DANSAEKHWA’를 말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단색화와 서양의 모노크롬을 비교하는 해석도 한바탕 오갔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기성세대를 거침없이 비판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기수를 자처한 박서보는 세계 미술계와 ‘시장’이 조명하는 작가가 돼 있었다. 그는 자신을 쇄신하기 위한 해답을 끝없이 갈구하다 드디어 ‘비움’의 방법론을 터득하고서, 이미 수십 년째 ‘묘법’ 시리즈를 작업하는 중이었다. 그 점을 생각하면 시간대에 관한 감각을 잠시 가다듬어야 할 만큼 기이하다 느껴지는 환호이기도 했다.
“수정 반지를 내가 좋아해요.” 박서보와 처음 인사를 나눈 순간부터 눈에 띌 수밖에 없던 보라색 반지와 목걸이. 그 ‘볼드한 액세서리 패션’에서도 예술가적 원기옥이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닐까 상상하던 중, 아주 짧은 순간, 아끼는 물건을 자랑하는 듯한 천진한 아이의 표정이 그에게서 묻어났다. 여전히 하루에도 몇백 자씩 화선지에 붓글씨를 쓰는 나의 97세 친할아버지가 글을 내보이실 때 드러난 표정과 비슷했다. 좋아하는 물건이 많은 사람은 그 물건들에 대해 얘기할 때 신이 난다.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그는 귀갑테 안경(거북의 등껍질보다 꼬리 부위 중 일부가 최고급 소재로 취급받는다), 선물 받은 버마산 블랙 오팔 등에 얽힌 기억을 쉼 없이 풀어놨다. 타이베이에서 마주친, 눈에 사파이어가 박힌 표범 모양의 브로치를 설명할 때는 표범의 역동적인 포즈를 흉내 내기도 했다. 그 브로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않았지만 왠지 알 수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자리를 잡은 후, 그는 재작년에 회고전을 크게 치렀으니 올가을 개인전은 작은 규모로 열기로 했다고 말했다. “전람회를 할 때 공간에 비해 작품을 너무 많이 걸면 영 협소해 보이고 지루해. 좀 널찍널찍하게 그림이 있어야지.” 이번 개인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은 ‘후기 묘법’ 내지 ‘색채 묘법’으로 불리는 2000년대 이후 작업물이다. 그의 회화 역사로 치자면 근작들이다. 검은색, 오방색, 흰색 등 각기 다른 색을 통해 자신이 처한 시대상을 표현하던 그가 강렬한 색감을 내기 시작한 시기의 그림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던 기지의 1층에도 노랑, 빨강, 초록 등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빨간색은 선명했으나 공격적이지 않았다. 노란색 앞에서는 ‘몇 년간 보지 못한 제주도의 유채꽃밭이 저랬을까’ 떠올렸다. 박서보는, 당신은 이미 준비됐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질문하고 싶은 거 있으면 질문해요.”
요즘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박서보 안 좋아.
어젯밤에 충분히 못 주무셨다면서요?
요즘 밤 1시쯤 잠을 청해요. 어제는 올림픽 뉴스 보다가 잠들었는데 5시 되기 전에 깨버렸어. 다시 잠들어지지가 않더라고. 2층에 내 작업실이 있거든. 거기서 작업이나 좀 했지. 최근에 내가 120호짜리 노랑 그림을 하나 시작했어. 연하게, 연하게, 그 연한 톤을 일부러 세 번 반복해서 그려. 그럼 여기서 깊은 맛이 나. 한 번에 쓱쓱 칠하는 게 아니라 수십 번 반복했을 때 쌓이고 쌓이는 그 맛이라는 건, 정말 음식 씹으면서 맛을 느끼는 일 같은 거야. 서양 화가들은 그런 걸 할 리가 없지. 나는 도 닦듯이 하는 거니까.
2019년 회고전 하실 때 신작을 내기도 했죠. 한동안 건강 때문에 작업을 멈춘 시기도 있으셨는데, 다시 시도하다니 대단하세요.
예전에는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놓고 사다리 작업대에 타면서 작업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못해. 자꾸 고꾸라지니까. 그래서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놓고 내가 단 위에 올라가서 그려. 그러다가 단에서 내려오면 현기증이 나고, 팔다리에 쥐가 날 때도 있어.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건 사투하는 거야. 죽음과 싸우는 거야. 그렇지만 나는 즐겁다는 거지.
사진 촬영하는 동안 부인과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있었던 일이며, 안경과 보석 얘기를 재미나게 들려주셨잖아요. 에피소드마다 연도를 짚어주셔서 놀랐어요. 안경을 얼마에 샀는지, 할인은 몇 퍼센트나 받았는지 하는 점을 구체적으로 다 기억하고 계시고.
나는 다 기억하고 있어, 모든 것을.
아이폰을 사용하시나 봐요. 문자 확인도 하세요?
카톡이 오면 답장도 보내고, 그런 건 다 해. 그런데 인스타그램은 내가 직접 편집하고 뭐 하고 그런 건 안 해요. 우리 아들이 해주지.
인스타그램요! 미술 재료조차 마땅치 않던 시절부터 모든 게 디지털화된 지금까지, 작가로서 70년을 살아내셨어요. 디지털과 그 온갖 부산물들, 어떠세요? 어지럽진 않은가요?
어지럽지. 그런데 하나 좋은 점이 있어. 내가 뒤셀도르프 옆에 있는 랑엔 파운데이션에서 전람회를 하고, 마르세유로 간 적이 있어. 거기서 우리 아들 며느리랑 셋이 샤토 라 코스테(프랑스 남부의 와이너리)에도 갔거든. 세잔의 집에도 가보고. 그러다가 근처 강가에서 낙조를 구경할 만하다기에 들렀지. 와, 이건 뭐, 낙조가 환장하게 아름다운 거야. 그렇게 아름다운 낙조는 처음 봤네. 언덕에 있는 식당이 유명하대서 우리 다 같이 거기서 술도 잔뜩 마셨지.
아름다운 낙조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셨어요?
아니, 파리로 갔어. 내가 아침을 잘 안 먹거든요. 아침을 먹으면 점심을 안 먹고. 그날은 호텔에서 아침 먹기가 싫어서 미슐랭 투 스타 받은 한국 식당으로 갔어. 그런데 건너편 쪽에 있는 사람이 자꾸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내가 우리 며느리한테 내 얼굴에 뭐 묻었냐고 물어봤어. 그런데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오더니 혹시 박서보 아니냐고 묻더라고. 자기가 화가이면서 평론가인데,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작가가 박서보라네. 같이 사진 찍고 명함도 주고받았지. 사람들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곳에서 나를 알아보고, 자기 폰에 저장해둔 내 그림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었고. 파리에서 했던 내 개인전을 취재한 신문기자 말로는 교수랑 대학생들이 내 그림 앞에서 현장 수업을 하고 있더래. 그러니까 이런 게 다 인스타그램이나 디지털 덕이라는 거예요. 며느리가 그랬어, ‘아버지 탤런트 다 되셨다’고.
예술 작품을 화면 속에서 이미지 파일로 볼 때와 실물로 눈앞에서 볼 때의 감상은 분명 다른 것이지만, SNS를 통해 먼 나라의 작가와 작품을 접하고 사는 건 정말 행운이에요.
우리 딸이 쓴 내 자서전 있잖아.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그게 영어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parkseobo.life’에 들어가면 전 세계에서 무료로 그걸 볼 수 있어요.
그 책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아버지에게 거리를 두고 객관적이면서 솔직하게 접근하는 시선도 인상적이었고요.
얼마 전 <뉴욕 타임스>에 내 기사가 크게 났죠? 뉴욕에서 온 기자가 영국 사람이었는데, 그 이도 딸이 아주 솔직하게 썼다는 말을 하더라고. 그 책을 읽고 감명받는 사람들이 많나 봐. 덕분에 내가 점수 따는 데 도움이 됐지요, 허허.
해외에서 인터뷰 요청이 자주 들어오나요? 최근 <월 페이퍼> 매거진에서는 선생님이 좋아하는 요리를 소개하고 싶어 한다고 들었어요.
뭐 별의별 연락이 와. 그런데 질문을 번역하고, 며칠 걸려서 답을 쓰고 나면 그걸 다시 번역해서 보내고, 그러려면 시간이 얼마나 많이 걸려. 내가 그렇게 인생을 낭비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에요. 대신 나에게 찾아오면, 한국말이 가능한 통역자를 데리고오면 얼마든지 인터뷰해줄 수는 있지.
글로벌한 ‘탤런트’가 되시기까지 결정적 씨앗 역할을 한 자리가 2015년 베니스에서 열린 <단색화> 전이죠. 당시 관람객과 여러 도시에서 온 미술 관계자 대다수는 추상적으로만 인식했던 한국의 단색화를 그제야 눈앞에서 확인하지 않았을까요? 그 울림과 파장이 컸다고 봅니다.
국제갤러리 덕을 봤지. 그 전람회를 통해서 세계가 내 작품을 봤으니까. 이건 나도 나중에야 들은 이야긴데, 그때 베니스 비엔날레를 다 못 둘러보더라도 한국의 <단색화> 전만은 꼭 봐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하네. 거기서 기자들이 모인 자리가 있었어요. 원래는 모이는 시각이 오전 11시였다가 9시로 바뀌었어. 기자들이 모였으니 그 앞에서 누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하잖아. 이우환 씨가 철학을 전공해서 굉장히 논리적인 사람인데 그날은 단색화에 대한 설명이 뭔가 좀 부족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 선생, 나 한마디 합시다’ 하고 나섰어. ‘단색화는 다른 것들과 이렇게 다르다. 하나, 행위의 무목적성. 둘, 행위의 무한 반복성. 단색화는 내가 수신이라는 행위를 하는 마당이고, 그림은 수행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 행위를 반복해서 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셋, 행위들을 통해 파생된 그 물성을 정신화하는 것.’ 이러니까 이우환 씨가 지금껏 그 누구도 단색화에 대해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하진 못했다고, 정말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고 놀라더라고. 그가 순수한 데가 있어요, 누가 보든 간에 기자들 앞에서 나를 막 껴안아.
저는 한편으로, 서양 미술에 익숙한 정서와 사고 구조를 가졌을 이들이 과연 단색화의 정신성을 온전히 이해할지 늘 궁금했어요. 예술을 해석하지 않고 그저 감상했을 때의 울림이라는 것도 있지만요.
아니, 보면 다 느껴요. 내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개인전을 한 적이 있어. 그때 총감독이, 카셀 도큐멘타 부회장이 내 그림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전해줬어. 당시 개념적인 그림이 많았는데내 그림에서는 정신이 살아 있는 걸 느낄 수가 있다고, 박서보 그림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다고. 그때가 1988년이에요. 내가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어. 위대한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갖춰야 하는 기본 조건 두 가지. 첫째는 시대를 통찰하는능력이고, 둘째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 세자르라는 조각가가 만약 석고를 살돈이 있었다면 석고를 떠서 조각했겠지. 전쟁통에는 그럴 돈이 없어. 그런데하고 싶은 열정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막 돌아다녔을 거야. 돌아다니다보니 고물이 보이고, 폐차도 보이고, 그 덩어리를 압축하면서 자기 작품을 만들었겠지. 돈이 있었으면 그런 폐물로 작품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궁핍이나가난은 창조의 어머니야. 그 전제는 예술에 대한 열정이 막 치밀어 오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고. 그런 사람의 눈에는 뭔가가 띄어.
한국을 넘어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 솔직한 마음으로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나요?
너무 늦게 왔다고 생각했어. 전부터 말해왔지만, 우리가 예뻐서 외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아니야. 서양 미술에는 시작부터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성이라는 게 있는데 나는 무목적성을 주장했잖아요. ‘그림은 수행의 도구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라고 딱 잘라 말하고. 그러니까 그들한테는 이게 ‘전혀 다른 생각’으로 다가오는 거야, 그림도 ‘다른 그림’이고. 저희한테는 없는 걸 했기 때문에 서양 미술이 우리를 껴안는 거라고, 저희 역사를 보충하기 위해서. 르네상스가 위대하다는 건 그때원근법이라는 게 발견되었기 때문인데, 원근법이 뭐예요? 서양의 인간중심주의로 사물을 봤기 때문에 태어난 게 원근법이잖아. 내가 젊을 때는 많은 작가들이 그런 서양 미술 같은 걸 우리나라에서도 해야 하는 줄로 알았는데, 그런 사고가 잘못됐어. 내 결론은 ‘비워내야 한다, 나를 다 비워내야 한다, 무의 상태로살아야 한다’였어. 1970년대부터 그 마음을 주장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그리지않는다’라고 생각했지. 어떤 이미지를 그리지는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가 아는 것과 믿는 바를 어떤 형태로 실현시켜야 하는가, 그 방법을 찾는 일이 쉽지 않잖아요. 모든 예술가에게는 결국 표현의 문제가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아요.
미술이라는 건 ‘방법론’이거든요. 마음으로는 깨달았는데, 그럼그걸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는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실망스러웠지. 그 시기에 우리 둘째 아들이 세 살이었어. 형이랑 다섯 살 차이가 나니까 아이가 형을 어려워했어. 형이 없을 때 형의 공책을 펼쳐놓고 거기에 글자를 쓰며놀았지. 애들 공책이 왜 방안지처럼 돼 있잖아. 얘가 네모 칸 속에다가 ‘한국’이라는 글자를 써보려는데, ‘ㅎ’만 한 칸 속에 들어가고 ‘ㅏ’는 옆 칸으로, ‘ㄴ’은 아래 칸으로 빠져나오게 써지는 거지. 아직 어린애니까 아무리 한다고 해봐도 네모 칸 속에 제대로 글자가 들어가지 않는 거야. 얘가 지우개로 박박 지우면서종이가 구겨지고 찢기고 하다가, 나중엔 화가 나니까 ‘에이’ 하면서 연필로 종이 위에 막 그어버렸어.
바로 그 역사적 순간이네요.
‘저게 바로 체념이구나.’ 자식을 통해서 그 순간 깨달았어. 캔버스에 화이트 칠을 하고, 자를 대어 연필로 방안지 모양처럼 긋고서 거기다가 ‘에이’ 하듯이 나도 흉내를 내봤어. 그것이 내 ‘묘법’의 출발이야.
글자를 칸 속에 잘 써보겠다는 목적이 자꾸 실패하니까 체념을 한 셈인데… 보통의 엄마들은 아이가 연필로 지그재그 휘갈기면서 공책을 찢으면, 야단을 치거나 ‘얘가 누굴 닮은 건가’ 생각할 것 같아요(웃음).
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그 구하고자 하는 것이 보이게 돼 있어. 나는 절실하게 구하고 싶어 했으니까눈에 보인 거지.
박서보의 몸 몇 군데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작업에 매진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꿰매야 할 정도로 다쳤기 때문이다. 안경테에 가려진 콧등 쪽에도 반창고가 보였다. 캔버스 모서리 쪽에 얼굴을 처박았다고 한다. 안경이 부러지며 눈을 찌를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재밌는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구입했던 그 안경이 워낙 튼튼했던 덕분에, 코를 다쳤을지언정 눈을 다치는 위험은 면했다(사진 속의 그가 착용하고 있는 물소뿔 소재의 안경이 바로 그 안경이다). 안경을 가리키던 그의 손에 시선이 갔다. 세월의 주름이 없었다면 매끈하고 고왔을 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던 그에게 손 좀 보여달라고 한 인민군이 있었다. 군대 훈련 받은 사람의 손에는 굳은살이 있다는 이유였다. 에피소드를 꺼낼 때마다 장면을 묘사하듯 말하는 박서보의 이야기는 전쟁과 군사정권 시절로 흘러갔다. 넘어지며 생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겠지만, 그가 살아낸 시대가 남긴 흔적은 그와 함께 가고 있는 듯했다.
그런 20세기에도 작가로서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스스로 평한 그는 21세기를 맞으면서 더 이상 성공적으로 살 자신이 없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지켜온 것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해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박서보와 21세기가 화합할 실마리는 역시 과거부터 쌓아온 것에 있었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 늘 비우는 작업이었는데, 그것이 21세기에 더욱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 비어 있는 것을 통해 관중이 치유되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세상에서 각광받는 몇몇 그림 스타일을 언급하다 말고 그 폭력성이 아찔한지 표정을 찡그렸다. 20세기와 또 다른 21세기의 혼란함과 불안, 스트레스 등을 치유하는 장을 만드는 것. 정적인 활력을 지닌 화면으로 부정적 감정을 빨아들이는 예술. 박서보는 그렇게 자연의 색들을 2000년대의 그림으로 끌어왔다. 어느 시절에나 박서보는 오직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자신에게 먼저 집중했던 사람 같다. 대작가로 향하던 과정에서 그는 세상에 ‘통’할 수 있는 작품이란 어때야 하는지 골몰하기보다 스스로에게 ‘너는 누구냐’고 끝없이 물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별것 아닌 놈’이란 답을 얻은 후에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지만, 그것 역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정신적 수행의 하나였을 것이다.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 당시 도록에서, 미술사학자인 조앤 기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근현대미술사에서 박서보가 가진 위상은 그가 한국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기인하기보다는 그의 회화적 프로젝트가 보여준 순수한 야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선생님에게는 어떤 약점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어떤 마음을 하나 먹으면 그걸 절대로, 끝까지 지켜. 나는 약점투성이인 사람이야. 원래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았다고. 반대로 넘치는 점도 너무 많아. 이것들을 내가 스스로 조절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절에 찾아가기도 한 거지. 1955년 수덕사에서 김일엽이라는 스님을 만났어. 김일엽은 스님이 되기 전에 문학을 하던 현대 여성이야, 현대 여성.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를 읽으면서 그분과의 만남에 관한 대목이 기억에 남았어요. 히어로 무비에서 주인공이 각성하는 계기 같더라고요.
그 만남이 내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어. 불경을 다 읽고서 깨달으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 그런 이들 만나서 시비를 걸면 거기서 무언가가 나올 수 있어. 내 식량을 챙길 수 있는 거지. 그에게 ‘그래서, 스님은 부처님을 만나봤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단 말이야. 자기는 지금이라도 당장 만날 수 있대. 허허, 이스님이 거짓말을 하네, ‘만나봤더니 어때요?’ 했더니 ‘만나보니 부처가 바로 나’ 더라는 거야. 내가 그때 ‘꽈앙!’ 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부처가 곧 나다.’ 그 말을 들으니까 ‘이 사람은 진짜 만났구나’ 하는 걸 알겠더라고. 딱 마음으로부터 존경심이 솟아나면서 굴복했어.
어떻게 하면 좋은 예술가가 되겠냐고 스님에게 물었을 때 ‘수신을 하면서 당신을 비워내라’, ‘비워내려면 부처님 앞에서 불공을 드려보라’라는 말을 들으셨잖아요. 선생님은 왜 우상 앞에서 예배를 하냐고 반문하셨고요. 스님이 ‘그럼 아무 돌이나 주워 놓고 집중해보라, 그것도 싫으면 그냥 당신 이름을 반복해 불러보라’라고 했을 때까지는 시답잖게 느끼셨을 것 같은데… 그 이후에 정말 ‘박서보, 박서보, 박서보’ 해보셨어요?
물론 한동안 했지. 나중에는 뭐 일부러 안해도 눈 감고 일어서면 저절로 빠져들어갔어.
비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지만, 화가로서 하나의 방법론을 찾기까지는 그 이후로도 10년 정도는 더 걸렸네요. 노자, 장자, 불경과 여러 책을 보셨잖아요. 그중 무엇과 제일 궁합이 맞던가요?
나는 서양 미술 같은 그림과는 다른 예술을 하고 싶어서, 그 길을 깨닫기 위해서 이것저것 봤지만, 여러 가지 중에서 내가 필요한 것만 구해. 내 버릇이 그래. 뭘 읽고 나서도 내가 필요치 않은 이야기면 상관도 안 해. ‘젊은이들에게 해줄 말 없냐’고 누가 물으면 나는 그래, ‘되도록 책을 많이 읽어라. 대신 읽고 나서 절대로 기억하지 말고 다 버려라.’ 왜냐면그 책에 실린 매혹적인 구절들이 사람을 노예처럼 잡아당기거든. 그러면 그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책은 다만 내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 보약 먹듯이 보는 거야. 보약은 국물만 따라 마시고 버리는 거잖아? 책에서 얻은지식을 나열하고 살면 자기 이야기는 어딨어?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해.
살면서 ‘천재’라고 보신 인물이 있나요?
천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봐. 예를 들어 이중섭 씨가 천재성이 있는 분이지. 그 시절엔 나라가 가난했기 때문에 종이에 그릴 수밖에 없었어. 에나멜 화이트나 검정, 오일 컬러로 그리면 종이는 그것을 쭉쭉 빨아들여요. 에나멜은 마르는 속도가 빠르기도 하고. 그 쭉쭉 빨아들임을 통해 필력이 생기는 거야. 천재성과 시대의 빈곤이 겹친 결과지. 가난이 한 작가를 천재화한 경우라고. 그 시절을 좀 지나서 캔버스가 등장한 후였다면, 캔버스에 오일 컬러로 그렸다면, 그런 그림이 안 나왔을 거야.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분석해봐야 한다는 말이지.
가족을 제외하고 평생 ‘내 편’이라고 여긴 존재는 누가 있나요?
내 편… 전우들, 그리고 같이 그림 그리던 패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장성순 씨가 돌아가셨더라고. 현대미술가협회 창립 멤버였는데, 94세인가 95세로 가셨을 거야.
‘100세 철학가’로 통하는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를 혹시 아세요? 여전히 일하고 인터뷰도 하시는데, 인생에서 제일 살맛 나고 좋았다고 느낀 시기가 60세부터 75세까지였대요. 나이 60세는 되어야 그때부터 진짜 창의적인 생각이 쏟아진다는 말도 하셨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말은 일리가 있어. 그전까지 치열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젊은 날의 치열한 경험이 되살아나면서 또 다르고 새로운 생각을 생산해낼 수 있거든. 젊을 때 치열하지 않았으면 그 나이에이른다고 그렇게 되지 않아. 그런 뜻으로 그가 한 말이라고 봐, 나는.
2000년대가 열릴 때 선생님의 70대도 열렸잖아요. 세기가 바뀐 만큼 시대도 변화했으니, 작가로서의 고민도 분명 따랐을 것 같아요.
동경 화랑에서 내 칠순을 축하해주려고, 칠순에 맞춰 개인전을 열었어. 그때 후쿠시마현에 있는 반다이산에 갔거든. 단풍이 절정인 시기였어.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단풍 구경을 했는데… ‘으악!’ 소리가 절로 나와버렸어. 골짜기에서 새빨간 불길이 나를 태울 듯이 쳐들어오는 그 느낌. 충격적인 감동을 받았어. ‘자연은 이렇게 위대하구나. 이런 감동을 그리고 싶다.’ 자연의 색을 화면으로 유인하기 시작했지. 나는 자연의 색을 쓴다고 말하지 않고, ‘유인’한다고 표현해. 자연에 대항하지 않으려는 거야. 20세기의 그림들이 그걸 보는 사람을 공격하는 면도 있었다면, 21세기의 그림은 보는 사람이 편안하고 안정감을 찾게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해. 최근에, 컬러를 쓰던 기존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오면서 방법은 또 새로운 쪽으로 시도해본 게 있거든? 고건 또 전혀 다른 맛이 나. 그런데 그리다가 몸에 쥐가 나면 그날은 손 털어야지, 뭐. 몸이 찌뿌둥한 채로 일하면 그림에 그게 그대로 배어 나온다고. 나는 보는 사람이 아주 유쾌해지도록, 그러면서 그림에는 깊은 맛이 나도록 그리고 싶어.
인생에서 아쉽거나 후회하는 일이 있다면요?
후회하는 일은 없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으니까. 사람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남한테 자신을 노출시켜서 비판도 받는 게 좋아요. 자꾸 성을 쌓고 자기를 보호하는 식으로 가면 망하는 거야. 거친 물결 속에 내동댕이쳐서 씻기고 부딪치면서 살아남아야 해. 나는 내가 자초해서 그렇게 했어.
꿈이 있으세요?
꿈? 꿈이 있느냐고? 훗날 ‘참 잘 살다 간 예술가다’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모자랐던 예술가로 기록되고 싶지는 않아요.
‘잘 살았다’에는 뭐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죠?
김환기나 이중섭 선생이며, 김창렬이며, 이우환이며, 그 훌륭한 누구도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소리는 못 들어. 해외에서는 ‘박서보’ 하면 그렇게 부른다고. ‘한국 단색화의 아버지’라고 하거나. 왜 그런 줄 알아요? 나는 한국에서 공부했고, 한국에 머물면서 단색화 운동을 했거든. 갖은 욕설 들어가며 운동해서 체계화를 시켰어. 그걸 전 세계에 ‘이거다’ 하고 내놓아서 그래. 또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내기도 했고. ‘박서보는 참 그 어려운 시대의 한국에서 제대로 일하다 갔다, 고맙다.’ 이렇게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주면 좋겠어.
여전히 그리기라는 노동을 하시고 이제는 또 새로운 작업 방식을 시도해보신다니, 과거의 박서보보다 현재와 미래의 박서보를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늙는다는 게 뭔 줄 알아요? 나는 늙는다는 말을 쓰기가 아주 싫어. ‘늙는 게 아니라익어간다’는 노래 가사가 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좋단 말이지. 생명체는 풋것이거나 익은 것이거나 할 텐데, 다 익으면 언젠가는 나무에서 떨어지게 돼 있어. 모든 생명이란 그런 거야.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HYEA W. KANG
- 작품 사진
-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