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제9회 아트 바젤 홍콩이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코로나19 시대의 미술 축제를 고심한 페어 측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형태의 페어를 기획하며 미래를 위한 전시 모델을 제시했다. 닷새간 열린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스토리가 여기 있다.
초여름의 햇살, 그 속을 거니는 사람들의 개운한 표정과 가벼운 옷차림. 5월의 홍콩은 근 2년 만에 활기가 넘치고 생기를 띤 느낌이었다. 알다시피 홍콩은 2019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그해 도시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직후, 코로나19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도시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혹독하고 암울한 2년을 보내고 올해 5월 19일부터 닷새간 아트 바젤 홍콩이 정식으로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땐 예술계뿐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큰 흥분이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행사 마지막 날인 5월 23일, 일반 관람객이 입장 가능한 2시가 되자 행사장 입구에 채 끝을 내다볼 수 없는 긴 행렬이 펼쳐졌다. 잠시 시곗바늘을 과거로 돌려본다. 2018년부터 홍콩한국문화원에서 전시 큐레이터로 근무하며 총 네 번의 아트 바젤과 연계 아트 위크를 경험했다. 2018년, 그리고 국가보안법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19년에도 3월이 되면 페어장의 문은 활짝 열렸고 홍콩은 세계 각국에서 출장 온 미술인들로 넘쳤다. 그야말로 당시는 아트 마켓의 최대 호황기였다 할 수 있다. 이후 2020년 아트 바젤의 취소 소식은 팬데믹이 이렇게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믿지 못했던 우리 모두를 충격에 빠트렸다. 같은 해 11월 아트 바젤 홍콩은 홍콩의 유서 깊은 아트페어인 ‘파인 아트 아시아’와 파트너십을 맺고 ‘홍콩 스포트라이트 바이 아트 바젤’을 소규모로 개최했다. 그리고 올해, 모두의 염원을 담아 페어가 성공적으로 개최됐다. 3월에서 5월로 개최 시기가 늦춰졌고 예년과 비교하면 1/3 정도의 규모였지만 화랑과 컬렉터, 일반 관람객 모두를 만족시킨 가뭄의 단비 같은 페어였다. 마침내 찾아온 홍콩의 오늘, 그곳에서 건져 올린 흥미진진한 장면을 소개한다.
하이브리드 아트페어의 탄생
올해 아트 바젤 홍콩의 개최가 확정되며 모두가 던진 질문 하나. 도대체 어떻게 페어를 오프라인 형태로 진행할 것인가. 홍콩은 팬데믹 초기부터 엄격하고 신속하게 국경을 봉쇄했고, 입국 시 자국민도 예외 없이 무려 3주에 걸쳐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는 방침을 오랫동안 고수했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 아트 바젤 홍콩은 위성 부스의 운영, VIP 대상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온라인 뷰잉룸(OVR) 등 비대면 예술 관람 방식을 총동원하여 팬데믹 시대에 걸맞은 하이브리드형 아트페어 시스템을 구축했다. OVR은 작년 스위스, 미국, 홍콩까지 총 세 국가에서 진행되는 모든 아트 바젤이 취소되자 페어 측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시스템으로, 현재는 이미 대중화되어 많은 갤러리에서 물리적 전시와 함께 이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다. 오프라인 아트페어가 팬데믹 이전의 영광을 되찾더라도 비대면 OVR은 계속 병행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다양한 시도 중 ‘위성 부스’는 이번 페어에서 최초로 도입된 전시 모델이다. 현지 방문이 어려운 해외 갤러리들이 본국의 작품을 홍콩으로 보내고, 아트 바젤 홍콩에서 고용한 현지 딜러가 관람객에게 작품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한발 나가 갤러리들은 온라인 화상 채팅 프로그램을 통해 현지 관람객에게 작품을 직접 소개할 수도 있었다. 이 외에도 주최측은 ‘아트 바젤 라이브: 홍콩’을 신설하여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현장을 실시간 중계하거나 해외 VIP를 위한 큐레이토리얼 투어를 진행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현장성을 보강했다. 올해의 아트 바젤 홍콩은 미술계에 닥친 한파를 어떻게 격파해낼 것인지에 대한 근사한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예술가를 주목하라
거대한 초국가적 미술 시장에서 ‘국적’을 따지는 일은 다소 촌스러운 처사일 것이다. 하지만 국내 갤러리의 참여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각 갤러리는 어떤 구성으로 작품을 소개하는지, 해외 갤러리에서 소개하는 한국 작가들은 누구인지를 살펴봄으로써 한국 미술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다. 올해는 한국의 전시 기획자로서의 사심을 배제하더라도 스타 작가, 신진 작가 할 것 없이 한국인 작가들의 전방위적 약진이 두드러진 해로 기록될 만하다. 아트페어의 스테디셀러 이우환, 윤형근, 김종학, 이배, 서도호 등 중견 작가들의 작품은 국내외 다양한 갤러리의 부스와 OVR에 간판격으로 출품되어 관람객의 발길과 이목을 사로잡았다. 국제갤러리는 이우환의 ‘관계항’ 연작의 대표작인 ‘Relatum – Seem’을 단독 부스 형태로 출품했다. 홍콩에서 한국 작가들의 전시를 여러 차례 개최해온 벨기에 갤러리 악셀 베르보르트는 김수자의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 ‘Encounter – A Mirror Woman’을 선보이며 이번 행사장의 가장 핫한 포토 스폿이라는 별명을 얻어냈다. 김수자의 작품은 벽면과 바닥 전부를 특수 거울로 제작하고 중앙에는 병풍처럼 접은 거울을 세운 작업으로, 이 안에 뛰어든 관객은 거울 너머 다층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일시적인 ‘헤테로토피아’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2019년 아트 바젤 홍콩 입구 한쪽을 채운 이불의 거대한 설치작 ‘Willing To Be Vulnerable’과 견줄 만한 화제작이었다. 거울이 반짝이는 곳 건너편 P21 갤러리 부스는 미술관, 대안공간 할 것 없이 다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작가 최하늘의 조각 연작 네 점을 선보였다. 작가 주위의 성소수자 친구들을 미니멀한 조각으로 형상화한 작품들로, 직관적이고 유머러스한 형상은 친절한 부스 어시스턴트의 부가 설명 없이도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국제적 페어장에 단독 부스로 소개된 이 젊은 조각가, 최하늘을 보도하려는 현지 언론의 뜨거운 취재 열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 가장 뜨거운 홍콩의 로컬 갤러리들
지금 홍콩에서 ‘핫’하게 떠오르는 로컬 갤러리를 발견하고 홍콩 아트 신을 살피는 것은 아트 바젤 홍콩을 즐기는 백미다. 가고시안, 페로탕, 데이비드 즈워너 등 이름난 대형 갤러리 부스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홍콩의 로컬 갤러리에 주목한다면 개성 넘치는 홍콩 신예 작가의 작품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갤러리는 블라인드스폿(Blindspot). 사진 미술에 특화된 화랑으로 유명하지만 현재는 회화,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현대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페어에서는 지난 몇 년간 갤러리에서 전시한 전속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볼 수 있었다.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두 작품은 홍콩 길거리를 세밀한 붓 터치로 묘사한 회화 작가 예웅통룽(Yeung Tong Lung)의 작품 ‘Kam Wa Street’, 그리고 동서양이 융합된 복고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라 라이(Sarah Lai)의 회화 작품들. 갤러리 엑시트(Gallery Exit) 또한 홍콩의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데 ‘진심’인 대표적 로컬 화랑이다. 올해 이곳에서는 열다섯 작가의 회화 및 조각 작품을 출품했는데, 이 중 미술관과 같은 대형 전시에서 볼 수 있던 윌슨 시에(Wilson Shieh)의 회화 연작 ‘Architecture Series’도 페어 현장에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윌슨 시에는 홍콩미술관, M+ 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홍콩의 대표적 현대 수묵 작가로 홍콩의 기념비적 건물을 여성으로 의인화한 수묵화가 특히 유명하다. 이 외에도 엠티 갤러리(Empty Gallery), 갤러리 드 몽드(Galerie du Monde), 한아트 TZ(Hanart TZ), 오라-오라(Ora-Ora) 등이 홍콩을 대표하는 현지 화랑들이다. 그동안 아트 바젤과 같은 국제적 아트페어에 있어 홍콩은 그저 행사를 개최하는 장소쯤에 불과했다. 더욱이 정작 지역 예술계를 소외시키며 ‘그들만의 축제’라는 현지의 비판적 시선을 오랜 시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에 올해 특색 있는 홍콩 화랑들이 보여준 활약은 이러한 편협한 시각에 대한 강력한 ‘한 방’과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해에도 작지만 강한, 현지 화랑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페어에 등장한 NFT 예술품
지금 미술계에 폭넓은 가능성을 불러일으킨 주인공, NFT. 발 빠르게 NFT 작품을 내세운 갤러리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한국의 PKM갤러리는 소속 작가 코디 최의 NFT 디지털 회화 ‘Animal Totem Series’ 중 한 점을 출품했다. 1980~1990년대 신개념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코디 최는 1997년 “21세기 창조는 작가의 상상력이 아니라 데이터를 근원으로 삼는다”라고 선언하며 일찍이 데이터 근원의 회화 ‘데이터베이스 페인팅’을 연구했다. 이번 페어에 NFT로 출품한 그의 작품 ‘Animal Totem Series’는 부스 한쪽에 차려진 컴퓨터를 통해 감상할 수 있었다. 한편 홍콩 현지 갤러리 오라-오라에서도 중국 현대 작가 펑지안(Peng Jian)과 신디응(Cindy Ng)의 NFT 작품을 최초로 선보였다. 코디 최는 출품작을 7만 이더리움, 즉 약 2천억원으로 책정하며 작품을 시장에 내놓은 행위를 실체 없는 NTF 시장에 대한 풍자라고 밝혔다. 반면 오라-오라는 작품의 결제 수단으로 이더리움뿐 아니라 비트코인까지 허용해 가상화폐 시스템을 미술 시장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첫 사례가 됐다. 현재 전 세계에서 NFT 작품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뒤섞인 가운데 아트 바젤 홍콩은 자유 시장 및 시대 정신에 입각해 규제 대신 허용을 선택했다. 머지않아 스위스, 미국에서 개최되는 아트 바젤에서도 NFT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모두의 축제로, 홍콩 아트 위크
아트 바젤이 소수를 위한 축제가 아닌 데는 더욱 분명한 이유가 있다. 아트 바젤이 개최되는 기간 동안 홍콩 곳곳에서는 상업적이고 또 비영리적인, 크고 작은 전시와 예술 행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풍성하게 채워지는 홍콩 아트 위크를 올해도 만끽할 수 있었다. 매해 3월 개최되던 ‘아시아 호텔 아트페어’는 올해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트 바젤의 지역 아트페어로 불리는 ‘아트 센트럴, 크리스티 옥션 프리뷰 및 경매가 같은 기간에 컨벤션 센터에서 개최되며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아트 바젤 홍콩이 개최되는 컨벤션센터와 센트럴 하버프런트 사이의 거리는 약 1.5km. 편한 신발과 강한 체력, 미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을 갖췄다면 ‘1일 2페어’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기회였다. 한편 올해 5월 홍콩미술관, 패러사이트, 타이쿤 등에서 개최된 홍콩 주요 전시들을 언급하자면 지면이 모자란다. 2년 전 개관해 한국에는 아직 낯선 신생 문화 예술 공간과 그곳에서 진행하는 전시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과거 면방직 공장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CHAT’는 췬완 지역에 위치해 홍콩섬과는 거리가 있지만 방문해볼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5월부터 오는 7월 18일까지 뉴욕과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이자 교육자 최태윤이 기획하고 참여한 대규모 전시 <Interweaving Poetic Code>가 진행되고 있다. 최태윤은 코딩 등의 테크놀로지를 접목한 텍스트, 드로잉, 회화, 퍼포먼스 다큐멘터리 등의 작업을 선보인다. 방직공장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CHAT는 섬유와 연계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데, 이 전시는 방직과 코딩의 연결 고리에 방점을 두고, 타이틀대로 코드를 엮어 완성한 텍스타일 작품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한다.
- 피처 에디터
- 전여울
- 글
- 우한솔(홍콩한국문화원 전시 큐레이터)
- 사진
- COUTESY OF ART BASEL HONG KONG, KIM CHONG HAK, LEE BAE, PERROTIN, CHAT, AXEL VERVOORDT GALLE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