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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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88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마치 영국 화가 로즈 와일리(Rose Wylie)를 위해 준비된 문장처럼 느껴진다. 작품 너머 약동하는 천진하고 순수한 에너지, 혹은 길들여지지 않음에서 비롯된 반교양적이고 반항적인 힘은 뒤늦게 예술계 문을 두드린 그녀를 오늘날 ‘스타 작가’로 만들었다. 어느 봄날, 영국 켄트에서 그녀가 보낸 회신이 도착했다.

영국 켄트에 위치한 작가의 화실은 신문지 뭉치, 자료 더미로 가득하다. PHOTO: JOE MCGORTY.

영국의 작은 시골 도시 켄트에 위치한 당신의 아틀리에를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 중인 <Hullo Hullo, Following on> 전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비록 재현된 형태지만 페인트 통과 신문치 뭉치 따위가 자유롭게 조화를 이룬 풍경이 인상적이다. 아틀리에를 보다 자세히 묘사해줄 수 있나?

로즈 와일리 집에서 가장 크고 난방과 통풍이 잘되는 방을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있다. 한낮이 되면 밝은 햇빛이 온 공간을 가득 채운다. 얼핏 지저분하고 정신없어 보이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도구를 재빨리 잡아 바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하는 나만의 정돈법이 있다. 무엇이든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 자료 더미와 드로잉으로 가득 차 사람들은 난해하다고들 하지만 나는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한 번에 알 수 있다(웃음).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 ‘Scissor Girl' 작품 속 여성들은 자신감 넘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SCISSOR GIRL, 2017, OIL ON CANVAS, 183 X 330CM.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 ‘Six Hullo Girls’. 작품 속 여성들은 자신감 넘치고 자유로운 모습이다. SIX HULLO GIRLS, 2017, OIL ON CANVAS, 182 X 330CM.

지금 서울에서는 한창 당신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SNS상에서 당신의 전시회를 언급한 게시물을 대충 모아도 5000건이 넘는다.

한국에서 몇 차례 전시를 했는데, 이번 전시처럼 내 작품 세계를 한눈에 알 수 있게 망라한 전시는 없었다. 내 손길이 담긴 원화 150여 점이 세계 곳곳에 있는 컬렉터의 손에서 전달돼 한국 전시장에 모였다는 점도 무척 흥분된다. 한국 관객들이 SNS에 전시회를 언급하거나 작품을 보고 포즈를 따라 하는 게시물을 보는 게 요즘 나의 최고 관심사이자 즐거움이다.

2020-2021 프리미어리그에서 선전한 손흥민 선수의 골 세리모니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Tottenham Colors, 4 Goals’. 토트넘의 열혈 팬이었던 남편과 축구 경기를 보는 일은 작가의 즐거움 중 하나다. TOTTENHAM COLOURS, 4 GOALS, 2020, OIL AND COLLAGE ON PAPER AND CANVAS, 111.5 X 89CM. COURTESY OF UNC, CHOI&LAGER, DAVID ZWIRNER. PHOTO: SOON-HAK KWON.

당신의 작품만큼이나 살아온 지난 생애가 참 흥미롭게 다가온다. 21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나 45세가 되던 1979년 영국왕립예술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무엇이 당신을 캔버스 앞에 다시 서게 만든 것 같나?

세 명의 자녀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20년 동안 휴식의 시간을 가졌지만 나는 항상 예술에 물든 삶을 살아왔다. 1979년 왕립예술대학에 진학한 후로는 오로지 작업에만 빠져 살았던 것 같다. 비단 작업하지 않을 때도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떤 계기를 통해 드라마틱하게 다시 붓을 쥔 건 아니다. 그저 자녀 양육을 위해 가진 휴식 기간이 마무리되면서 본격적인 작업 세계가 시작됐달까.

만화의 한 장면을 옮긴 듯한 작품 ‘Black Cat an Black Bird’. 작가의 애완 고양이 페트가 담을 넘으려는 모습이다. BLACK CAT AN BLACK BIRD, 2020, OIL ON CANVAS, 183 X 160.5CM.

지난 세월을 돌이켰을 때 창의력의 돌파구가 된 순간이나 작업이 있었나?

결국 규모와 야심의 문제였다.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로 대규모 작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집에서 창 너머로 보이는 잎사귀, 나무, 벽돌, 고양이, 다람쥐, 오로지 플랫 슈즈를 신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나의 모습을 종이에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화위복인 셈인지 이런 작업이 11개의 캔버스로 꾸며진 ‘룸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후 저우드 재단 미술관, CAC 말라가, 서펜타인, 그리고 지금 서울에서 공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창의력의 돌파구가 된 계기가 고관절 수술이었다는 점은 좀 아이러니하지만(웃음).

쿠바 문화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낸 ‘Cuban Scene, Smoke’. CUBAN SCENE, SMOKE, 2016, OIL ON CANVAS, 208 X 340CM.

장소, 시대, 인물을 막론해 대중문화의 여러 요소를 과감히 차용하는 것은 당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큰 줄기다. 당신을 캔버스 앞에 서게 만드는 것들 사이엔 어떤 공통점이 있나?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소재라면 그 무엇이든 나를 캔버스 앞에 서게 만들 수 있다. 창밖의 잡초, 길거리에서 본 광고물, 신문 기사에 실린 사진, 기차에서 본 낡은 건물 등. 차별 없이 사용한다는 게 유일한 공통점이랄까? 쉽게 질리는 성격이라 한 소재를 가지고 일련의 작업을 마치면 그것과는 상반된 무언가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합창하는 북한 아이들 뒤로 야자수를 그려 넣어 독특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 작품 ‘Korean Children Singing’. KOREAN CHILDREN SINGING, 2013, OIL ON CANVAS, 182 X 250CM.

이번 전시장에선 북한 아이들을 그린 작품 ‘Korean Children Singing’(2013)도 만날 수 있었다. 노래하는 북한 아이들 뒤로 독특하게 야자수를 그려 넣었던데, 작품을 구상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사실 야자수는 북한 아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야자수다(웃음). 램버스 브리지 북쪽 어딘가에서 본 야자수, 장 드 브루노프의 동화 <코끼리 왕 바바> 속 야자수, 멕시코 길거리 광고물에 그려진 야자수 등 여태 흥미롭게 목격한 야자수를 작품에 옮겨봤을 뿐이다. 어느 날 <옵저버>지 기사 사진에서 본 북한 아이들의 헤어스타일, 얼굴, 복장은 완전히 나를 사로잡았다. 그토록 완벽하게 반복된 모습이란! 사실 이 작품은 그러한 ‘겉모습’, 또 작품에서 주로 다뤄온 ‘반복’에 관한 페인팅이지 특별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은 아니다.

영화 <페이퍼보이>의 시사회에 참석한 배우 니콜 키드먼의 드레스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NK(Syracuse Line-Up)’. NK(SYRACUSE LINE-UP), 2014, OIL ON CANVAS, 185 X 333CM.

영화 <시리아나>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 ‘Pink Table Cloth(Long Shot)(Film Notes)’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늘 당신에게 영감을 주는 매체였는데, 특히나 당신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준 영화가 있나?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아름다운 흑백 영상미가 느껴지는 <바다의 침묵>이다. 좀 더 최근에 좋아하게 된 영화를 꼽자면 <토리노의 말>이 있겠고.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도 굉장히 좋아한다. 그의 영화 <줄리에타>와 <귀향>은 언제나 내게 영감을 준다. 영화 그 자체가 영 마음에 와닿지 않더라도 시각적으로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들어오면 작품으로 옮겨보기도 하는데, 재미있게도 방금 당신이 언급한 <시리아나>가 그런 케이스였다(웃음).

당신의 작품 앞에 서면 언제나 복잡한 사유는 사라지고 오롯이 눈으로 그림을 즐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간 여러 인터뷰에서 작품의 ‘가독성’을 추구한다는 말을 밝혀왔는데,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가독성이 있는 그림은 어딘가 뚜렷하다. 그림의 소재들이 단순히 예술성을 위해 신비화되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주고 고리타분한 반복에서 벗어날 여지를 던져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가독성을 강조해온 게 아닐까?

만화의 한 장면을 옮긴 듯한 작품 ‘Black Cat an Black Bird’. 작가의 애완 고양이 페트가 담을 넘으려는 모습이다. BLACK CAT AN BLACK BIRD, 2020, OIL ON CANVAS, 183 X 160.5CM.

당신은 언젠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이 든 사람들을 환영하는 쪽으로 기류가 바뀐 건 알지만, 그래도 나이가 아닌 작품으로서 알려지고 싶다.’ 당신의 작품을 논할 때면 반드시 함께 거론되는 당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항상 말했듯 작가에게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늘 나이가 아닌 작품으로 인정받고 기억되고 싶을 뿐이지. 물론 나처럼 늦은 나이에 인정받게 되면 성공과 실적의 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건 사실이다(웃음). 그보다 원하는 대로 좀 더 마음 편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달까? 그리고 나의 나이와 작업이 누군가에게, 특히나 늦게 작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면 굳이 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지.

당신 앞에 아장거리는 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가 당신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해줄 건가?

예술은 누구든 할 수 있다. 물론 침대를 정돈하는 것처럼 삶에서 꼭 해야만 하는 무언가는 아니지만 예술은 세상의 혼을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너무나 중요한 요소다. 또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자기 자신 밖의 세상을 내다보는 도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내 앞에 아이가 있다면 지금 뭐든 많이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모든 예술이 좋은 것이고 영원한 것은 아니거든.

작업실에서 채색 중인 작가의 모습. PHOTO: JOE MCGORTY. COURTESY OF UNC, CHOI&LAGER, DAVID ZWIRNER. PHOTO: SOON-HAK KWON.

작가로서 무엇을 가장 회의하나?

허술한 보도와 미약한 비판.

프란시스 고야, 엘 그레코 등 당신은 예술사의 유명 화가를 작품에 거리낌 없이 인용한다. 그 많은 화가 중 가장 천재적이라 생각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세잔. 특히 그의 초기 작품은 천재적이다. 작품 속 형태가 울룩불룩하고 ‘추하게’ 보일 여지가 있어 당대엔 많은 비평이 따랐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겠지.

새, 고양이, 코끼리 등 다양한 동물은 작가가 유난히 사랑하는 작품 소재다. 동물의 실제 크기나 비율을 무시하고 단순화해 표현하는 게 특징이다. RED PAINTING BIRD, LEMUR & ELEPHANT, 2016, OIL ON CANVAS, 183 X 499CM.

오늘날 회화는 더는 탐구할 이유가 없는, 새롭지 않은 매체가 되었다는 시선이 있다. 그럼에도 당신이 생각하기에 회화만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자면 그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한 작업은 그 사람의 수많은 의사결정의 집합체다. 특히 드로잉은 많은 재료와 공간 없이도 누구나 시도할 수 있지만, 자신의 모든 미적 결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 점이 선물이냐 고문이냐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라는가?

그저 한 페인터로 기억되고 싶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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