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세상 모든 이가 공유하는 언어다. 뮤지션들은 그 언어와 더불어 자신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수단으로 패션을 영민하게 활용해왔다. 여기 자신의 음악만큼 독보적인 비주얼 세계를 추구하는 아티스트, 장르와 스타일의 선두 주자, 컬트적 인기를 누리는 멋쟁이들이 자기 아우라를 오롯이 드러냈다.
새소년 Se So Neon
보컬과 기타의 황소윤, 드럼의 유수, 베이스의 박현진. 지금 가장 새로운 문법을 제시하는 이들, 음악을 통해 틀에서 벗어난 대안적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이들의 다른 말이 곧 새소년이다. Photographer DUKHWA JANG
최근 싱글 앨범 <자유>가 발매됐다. 어떻게 탄생한 음악인가?
황소윤 작년 지금의 세 멤버가 모여 처음으로 발매한 앨범이 EP <비적응>이었다. 갓 사회에 나와 겪는 혼란, 두려움, 불안을 단편적으로 담은 작업인데, 이후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자유>가 나왔다. <비적응> 이후 비로소 우리가 가진 두려움을 직면할 수 있었다면, 이번 앨범을 작업하면서는 각자가 가진 두려움을 직면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야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운드적으로도 평소 시도해보고 싶은 걸 전부 넣어봤다. 어쿠스틱 기타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현도 쓰고 브라스도 동원했고. 편곡도 좀 더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느낌으로 만졌다. 그래서 드럼, 베이스가 곡의 후반부에 터지듯 등장한다.
자유를 찾는 각자만의 방법이 있나?
황소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그러다 보면 거리낄 게 없어진다. 두려움이란 결국 뭔가를 잴 때, 잃을 것을 생각할 때, 앞날을 걱정할 때 드는 감정이니까.
유수 사실 별게 없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정도? 오랜 취미인 바이크도 그중 하나다.
박현진 가끔 부모님이 사시는 시골로 내려간다. 도시에 있을 땐 자동차 소음 하나에도 예민해지기 쉬운데 시골에 가면 소리에 방해받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곳에선 휴대폰도 어디에 방치해둔다. 가령 소윤이가 ‘우리 언제 모여야지’라고 보내온 연락 하나에도 숨이 막혀올 때가 있단 말이지?(웃음) 시골에선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자유라면 자유다.
새소년의 음악을 묘사해본다면?
유수 레고.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지금도 있는 무언가. 어디에 끼워 맞춰도 이야기가 성립하고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황소윤 <자유>가 나오고 친구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어린애들부터 나이 많은 노인까지 다 같이 모여서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음악이라고. 새소년이 하는 음악은 시대, 배경, 성별, 나이 같은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흔히들 우리가 청춘을 말하는 노래를 만든다 하지만, 사실 그걸 염두에 두고 작업하지 않는다. 새소년의 음악은 항상 어딘가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황소윤 세상에 멋있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마이클 잭슨이나 데이비드 보위처럼 역사적으로 길이 남은 스타일 아이콘을 보면 결국 그들 자체였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나 싶다. 사람 자체가 멋있기 때문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아무렇게나 걸쳐도 멋이 묻어나는 거다. 나 또한 항상 꿈꾸는 건 오로지 ‘한 사람’이 되는 거다.
유년기 당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이었나?
황소윤 학창 시절의 성장 환경. 세상과 단절된 자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많은 생각과 결정이 따라야 하는 환경이었다. 몸의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깨어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시간들이 사고방식이나 감수성,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박현진 부모님. 어릴 때부터 항상 들어온 말이 있다. 뭔가를 나서서 하진 말고 친구들을 도와라. 아버지도 사람들과 묵묵히 어울리며 식사하다 마지막 순간에 계산하고 나오는 스타일이다. 이런 것들의 영향으로 베이스를 잡지 않았나 싶다. 기타나 드럼처럼 뚫고 뻗어나가는 사운드가 아니라 기저에서 묵묵히 흐르는 사운드니까. 담당하고 있는 악기랑 성격이 비슷한 것 같다.
유수 나도 집안 환경인데 현진과는 좀 결이 다르다. 교정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엄한 집안에서 자라와서. 어릴 때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억압된 채로 자라 그게 드럼으로 발현된 것 같다. 어쨌든 드럼은 폭발적인 에너지를 전할 수 있는 악기니까.
언젠가 공연하고 싶은 꿈의 무대가 있는가?
박현진 남극 세종기지.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펭귄을 관객으로.
유수 제도적으로 공연이 금지된 곳에서 해보고 싶다. 고궁이나 청와대, DMZ 같은 곳.
황소윤 섬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섬 전체를 무대로 공연하는 것. 코로나19 때문인지 몰라도 자연에서 히피처럼 놀아보고 싶다. 시대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이 윤리적인 것에 집착하고 흐트러짐 없는 것을 좇는데 사실 흐트러질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거든. 다 같이 흐트러질 수 있는 공연이라면 너무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지 벗어도 돼! 웃통 까도 돼!’란 느낌으로.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박현진 퇴근과 클렌징?(웃음)
황소윤 무계획이 계획이다. 아, 올해 단독 공연을 개최하고 싶긴 하다. 정말 그것만 이루면 올해 다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오메가 사피엔 Omega Sapien
2019년 힙합 레이블이자 크루 ‘바밍타이거’에 정식 합류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무경계 얼터너티브 케이팝’을 표방하며 호모 사피엔스에서 한 단계 진화한, 자칭 ‘최종 인류’를 뜻하는 이름 오메가 사피엔으로 활동 중이다. Photographer JUNKYOUNG LEE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 미국, 일본에서 생활하다 지금은 한국에서 영어로 랩을 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나?
지구인. 중국에서 중국말을 잘한다고 중국인이 되는 건 아니거든. 미국,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에 들어오니까 또 한국인은 아니더라고. 딱히 홈타운이라고 느낄 만한 곳이 없다. 어딜 가도 ‘좋다’다. 당장 내일 런던으로 오면 투자해줄 테니 살아라 하면 바로 짐 싸서 떠날 수 있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플레이보이 카티. 그리고 일본 신주쿠의 유흥가 가부키초에 가면 볼 수 있는 호객 행위꾼들. 주로 크롬하츠 제품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데 소위 말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 그런데 4대 도시의 컬렉션을 챙겨 보면서 아주 세련되게 옷을 차려입는 사람들보다 가부키초의 그들에게서 더 강렬하고 순수한 에너지를 느낀다. 또 한국 인터넷의 음지 문화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는다. 눈살 찌푸려지는 것들, 소위 ‘비주얼 쇼크’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라면 모두 좋다.
초록색 머리를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
돈이 많이 들지 않아서?(웃음) 마음에 드는 옷은 대부분 손쉽게 구할 수 없는 오트 쿠튀르니까 헤어스타일로 승부를 보는 거다. 오늘도 바밍타이거의 디렉터 산얀 집에서 머리를 밀고 왔다. 초록색으로 물들인 이유는 크게 없다. 그냥 초록색이 좋아서. 자연에서 가장 많은 색깔이 초록색이자 딱 보는 순간 평화롭기도 하지 않나?
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초등학교를 중국에서 나왔다. 게다가 학교가 영화 <황해>의 배경지인 다롄에 있었는데 재학 당시만 해도 과거 한국의 교련과 비슷한 수업이 있었다. 아침에 전교생이 모여서 체조하고 행군하고. 그런데 내 MBTI 성격 유형이 ENTP거든. 강압적인 환경 아래 화, 분노가 많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힙합을 들었는데 노래에서 뮤지션들이 자유롭게 욕을 하는 거다. 반항 심리 때문에 힙합에 강하게 매료됐던 것 같다.
당신의 가장 큰 야망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학교 다녔을 때 동양인 남자 하면 한마디로 ‘언쿨(Uncool)’이었다. 일단 동양인 음악을 듣지 않고 미디어에서도 동양인은 항상 너드로 소비되지 않나. 그런데 BTS를 기점으로 케이팝이 빵 터졌다. 지금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한국 남자들을 사모하는 소수의 그룹이 있다고 한다. ‘그게 어디냐’ 싶은 거지. 동양 문화의 첫 번째 아이콘은 브루스 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를 잇는 제2의 인물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다.
현재 당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가?
영적인 것, 우주적인 것. 그를 통해 무저항, 무자아의 삶에 다다르고 싶다. 인간이 더 이상 수렵 생활을 하지 않은 이후 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점부터 ‘시간’을 생각하면서 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씨를 뿌리면 몇 달 뒤엔 수확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런데 사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 시간은 허상이라고 생각하거든. 현재가 아닌 과거, 미래를 생각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요즘엔 나를 우주에 속한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려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무저항, 무자아의 상태에 다다를 수 있겠지?
언젠가 공연하고 싶은 꿈의 무대가 있는가?
북한에 가보고 싶다. 여태 많은 뮤지션이 북한에서 공연을 했지만 어딘가 ‘착한 공연’이지 않았나. 나는 그곳에서 소위 ‘깽판’을 제대로 쳐보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해외 유명 프로듀서와의 기상천외한 협업이 기다리고 있다!
태진아
데뷔 50년째, 아이돌 출연진으로 가득한 음악 방송에 출연하는 유일한 그 세대 가수. 지드래곤도 언급한 적 있는 확고한 패션 스타일의 소유자. Photographer JUNKYOUNG LEE
사진 촬영을 즐기나?
직업으로 하는 일은 다 즐긴다. 다만 오늘처럼 촬영이 있는 날엔 식사를 거르고 나온다. 그래야 옷태가 산다. 나름대로 몸 관리를 하느라 어떤 날은 종일 밥 대신 과일 정도만 먹는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몸무게에 큰 차이가 없다.
태진아의 시그너처 룩인 노란색 슈트는 어떻게 시작됐나? 1992년 ‘노란 손수건’을 발표할 때 잡은 콘셉트다. 최초에는 기성복을 구입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한 다음 날 시내를 둘러보다가, 한 상점에 위아래가 모두 완전히 노란색인 의상이 걸려 있는 걸 보고 ‘저거다!’ 싶었다. 이후 한국에서 노란 의상을 맞춤 제작했다. 입다 보니 나에게 노란색이 잘 어울린다는 걸 알아서 그때부터 모자도 의상도 노랑을 자주 취했다.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옛날부터 외국 패션지, 하이패션 브랜드의 쇼 사진을 많이 찾아봤다. 가수라면 자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팬 서비스이기 때문이다. 검정이나 회색 슈트에 보타이를 매는 흔한 스타일은 나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면서 나름의 ‘태진아 스타일’을 추구했다. 내 드레스룸을 보면 무지개색이 펼쳐진다. 반짝거리는 의상도 원색을 선호한다.
2010년대, 젊은 세대 힙스터들 사이에서 형형색색 패션이나 아래위로 색깔 맞춤을 하는 게 유행한 걸 알았나?
지드래곤이 가끔 나와 비슷한 걸 추구했지. 그 친구가 예전에 방송에서 내 스타일을 언급한 적도 있다. <전국노래자랑>이나 모창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노란색은 태진아 스타일’이라는 인식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걸 느꼈다.
2014년, 비가 ‘La Song’으로 활동할 때 선보인 비×태진아 합동 무대는 유명하다. 그때의 스타일은 어떻게 탄생했나?
비는 나에게 평소 태진아 스타일대로 양복 입고 나오라고 했는데,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봤다. 비의 스타일을 내가, 내 스타일을 비가 입는 식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 곡 활동 때 비가 한 것처럼 내 뺨에도 키스마크 표시하자고 했고.
아티스트로 성장하는 동안 스타일 면이나 음악 면에서 영감을 준 사람은?
평생 스타일리스트 없이 활동했다. 내가 알아서 입고, 맞춤복 디자인도 의뢰한다. 예부터 외국의 가수와 배우를 보면서 영감을 받곤 했다. 오랫동안 좋아한 이는 엘비스 프레슬리. 일본 가수 중에서는 이츠키 히로시, 모리신 이치. 배우 중에서는 알랭 들롱과 디카프리오.
트로트의 현재를 어떻게 보나?
트로트의 맥은 예전부터 이어져왔고, 주기적으로 대형 가수가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 트로트가 눈에 띄게 발전했다는 건 젊은 세대도 트로트를 좋아하게 됐다는 말이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이후 트로트 가수 개인별 팬덤이 생겼다는 것도 큰 변화다. 아이돌처럼 임영웅 팬덤, 이찬원 팬덤 식으로 형성되면서 팬덤 문화가 크게 확산됐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트로트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
오래가려면 히트곡이 나와야 한다. 가수는 히트곡으로 말한다. 그것 없이는 언제 불씨가 꺼질지 모른다. 무대에서 남의 노래가 아니라 자신의 히트곡을 부를 수 있어야 큰 가수로 오래갈 수 있다.
트로트도 글로벌해질 수 있을까?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이미 한류 팬을 모으고 있다. 케이팝이 세계를 거의 이끌어간다는 느낌이다. 거기에 큰 역할을 한 BTS뿐 아니라 그 이전에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빅뱅 등등이 일조했다. 해외에서는 BTS나 <미스터트롯>의 톱 세븐이나 모두 ‘케이팝’이다.
트로트의 핵심을 ‘한’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정서인 한이 해외에서도 통할까?
사람들이 자꾸 트로트와 한을 연결하는데, 요즘 <미스트롯 2>에 출연하는 김태연과 김다현은 초등학생이다. 아홉 살에게 무슨 한이 있나? 그 아이들이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건 한 때문이 아니다. 가수로 타고난 재질이 있는 데다 무수한 연습을, 큰 노력을 했다는 뜻이다.
어떤 꿈이 있나?
기회가 닿으면 드라마 제작을 꼭 하고 싶다.
인생에서 아쉬움으로 남는 점이 있다면?
‘왜 악기를 배우지 않았을까’ 하는 점. 기타 하나라도 익혀볼 것을.
당신이 소유한 아이템을 숫자로 말해볼 수 있을까?
현재 모자는 150개 이상이다. 지난 연말 TV 조선의 <2020 트롯 어워즈>에서 받은 트로피는 내 219번째 트로피였다.
추다혜
2018년까지 퓨전 국악 음악 그룹 ‘씽씽’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지난해 ‘사이키델릭 샤머닉 펑크’를 표방하는 4인조 밴드 ‘추다혜차지스’를 결성했다. 펑크와 굿을 결합한 실험적 앨범 <오늘 밤 당산나무 아래서>를 발표하며 2021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음반’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Photographer DUKHWA JANG
지난해 당신이 이끄는 ‘추다혜차지스’의 첫 정규 앨범 <오늘 밤 당산나무 아래서>가 발매됐다. 어떻게 탄생한 앨범인가?
시작은 전통 무가(굿 음악)였다. 실제 굿판에 가보면 많은 걸 느끼게 된다. 무당이 타인을 대변해 아파하고 울면,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교감하고 치유를 받는다. 무당 자체가 카운슬러이자 힐러, 예술가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뮤지션인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표면적으로 차용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2018년 ‘씽씽’ 활동이 끝나면서 2년 동안 소리를 배우러 전국 각지의 선생님을 찾아 나섰다. 그러는 사이 실제 나를 무당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라이’란 소리도 참 많이 들었다(웃음).
앨범을 발매하고 들은 피드백 중 가장 인상적인 말은 무엇이었나?
한 음악 평론가로부터 들은 ‘전례가 없는 음악이 나왔다’는 말. 무가는 원래 세상에 있어온 음악이지만 세상에 없던 음악과도 같이 느껴지거든. 무가가 보통 ‘음악’처럼 소비되진 않으니까. 굿판에 찾아가야만 들을 수 있고, 무가 앨범이 시중에 유통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이번 앨범 작업은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아온 무가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시도나 다름없었다고 느껴진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누군가를 봤을 때 ‘저 사람은 아이콘이자 힐러구나’ 느꼈던 순간이 딱 한 번 있었다. 노르웨이 싱어송라이터 오로라.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한 에너지, 상대를 정화하는 기운이 있는 뮤지션이다. 사람 자체가 요정 같고, 힐러 같달까?
평소 드레스업하는 걸 즐기는 편인가?
무(無)에 가까운 스타일을 즐기는 것 같다.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고 깔끔한 스타일을 좋아한다. 무채색 계열의 옷을 주로 걸치고. 물론 무대에선 총천연색을 입은 전사로 변신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창의력의 돌파구가 된 순간이나 작업이 있나?
2018년 최정화 작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MMCA 현대차 시리즈:최정화-꽃, 숲> 전시를 개최했을 당시 개막 공연을 맡은 적이 있다. 미술관을 20분가량 돌아다니며 굿 퍼포먼스를 펼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정식으로 공연을 올리기도 전 주최측으로부터 곱지 못한 시선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일말의 오기가 올라오더라고. 예술가인 나조차 이렇게 무시를 당하는데 실제 무당들은 얼마나 오랜 세월 미신이라 치부당하며 천대를 받아왔을까. 그때부터 무가를 정말 영리하게 잘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대변자가 되고 싶었고. 무당이 인간과 신의 매개체라면 나는 무당과 사람들의 매개체가 되리라 생각한 순간이다.
언젠가 공연하고 싶은 꿈의 무대가 있는가?
수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마을을 지켜온 나무를 당산나무라고 부른다. 나무 아래 사람들을 삼삼오오 불러모아 나만의 굿판을 벌이는 상상을 자주 한다.
사이코러스 황태와 양미리
사이코러스는 tvN <코미디 빅리그>의 한 코너 명이자 황태(황제성)와 양미리(양세찬) 듀오의 이름이다. 유명 가수들의 원곡에 그들 방식으로 코러스를 넣는다. 요즘 가수들 측에서 먼저 콜라보하자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Photographer JUNKYOUNG LEE
사이코러스 무대에서 양미리는 빨간색, 황태는 파란색에 한 쪽 어깨를 드러낸 의상을 입으며, 둘 다 웨스턴 스타일 장화를 착용한다. 그 의상 콘셉트는 어디서 어떻게 영감 받은 것인가?
황태 런던 보이즈. 우리 둘은 예전부터 개그의 결이나 호흡이 잘 맞았다. 그런 점을 살리고 싶었다. 세상에서 호흡이 제일 잘 맞는 듀오 가수는 누가 있을까 조사해보니, 런던 보이즈가 최고였다. 그들 영상을 찾아보면 ‘할렘 디자이어’ 활동 때 우리와 똑같은 복장을 한 모습이 있다.
코러스 가사를 만들 때 유지하려는 태도가 있다면?
황태 우리 작법의 기본 뼈대는 ‘원곡의 내용이 이상해지게’ 코러스를 집어넣는 것이다. 실력 있는 가수들, 어떻게 보면 접근하기 어려운 느낌의 가수들을 불러놓고서 노래를 되바라지고 이상하게 만든다. 가수들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으니까 그들은 가만히 서서 정상적으로 노래하고, 우리가 알아서 웃기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자는 것. 우스운 사람 말고 웃기는 사람.
양미리 ‘사이코러스 송대관 편’을 보시라. 코러스 가사, 그리고 가사와 맞아떨어지는 박자 등의 면에서 우리가 애초 구상한 사이코러스의 느낌이 잘 살아난 게 ‘네 박자’에 넣은 코러스다.
당신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음악인이 있나?
양미리 김현아 님. 나훈아, 조용필, 이선희, 보아, 소녀시대, 홍진영, 조성모 등등 수많은 가수들 곡에 코러스 작업을 했고, 만화 <세일러문> 오프닝 곡을 부른 분이다. 그분이 <놀면 뭐하니?>에서 유산슬의 곡에 코러스 작업하는 모습이 공개된 적 있다. 녹음실에 나타나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면 돼’ 하더니 자기 할 일 툭툭툭 하고서 스윽 사라진다. 그분의 여유 있는 스웨그와 1타 강사적인 면모야말로 전문가답다. 우리의 롤모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금까지 30명 이상의 가수가 사이코러스와 무대에 섰다. 그중 어려운 미션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황태 이박사의 곡이 꽤 어려웠다. 가사 세 줄이 노래 내내 반복되는 식인 데다 원곡의 박자감이 워낙 재밌어서 그걸 더 신나게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작업하기 어려울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후크송처럼 같은 가사가 계속 반복되는 노래거나 가수들의 성향 자체가 특이한 경우.
팀으로서 목표가 있나?
황태 선생님들의 디너쇼에 게스트로 서는 것. 거기에 최근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앨범을 내는 것. 코러스가 메인이고, 가수는 피처링이자 서브 역할로. 유희열의 토이 같은 방향이지.
양미리 우리는 가수들의 콘서트 도중 일부 시간 동안만 무대에 서면 된다. 그로 인해 콘서트의 퀄리티나 재미에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입소문이 나면, 게스트로 투어도 다닐 수 있다.
콜라보하고 싶은 뮤지션은 누구인가?
양미리 이적, 윤도현, 박효신, 비, JYP, 싸이, 임재범 등등.
황태 한국의 대표적 남자 보컬리스트, ‘김나박이’를 기다린다.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일단 버티고 있겠다.
콜라보 사례가 늘어나면서 코러스 작법이 뻔해질 우려는 없나?
양미리 그런 걱정은 없다. 가수들마다 가사 스타일도, 내용도 다 다르다. 신조어도 계속 생기고 있다. 세상이 바뀌면서 현재의 공감대와 옛날의 공감대라는 비교 거리도 생긴다. 우리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도 받아칠 수 있다. ‘엄마야 지금 강변 시세가 얼만데 / 누나야 역세권으로는 가지 말자.’
황태 동요를 가지고도 우리 식 유희가 가능하다는 소리다. ‘퐁당퐁당 / 여당야당.’ 노래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존재할 수 있다, 쭉.
사이코러스에게 홍잠언이란?
황태 척추. 코어 근육. 엔진. 어떻게 보면 우리의 전신. 귀여우면서도 농익은 느낌이 우리와 비슷하지 않나?
김오키
2013년 첫 앨범 <Cherubim‘s Wrath(천사의 분노)>를 발표한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친일 청산, 시인 김수영, 소설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등 한국의 역사, 예술, 대중문화를 소재로 한 다수의 앨범을 발매했다. 팀 김오키동양청년, 김오키뻐킹매드니스, 김오키새턴발라드로도 활동한 바 있다. Photographer JUNKYOUNG LEE
유년기 당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이었나?
어릴 때부터 닌자를 좋아해 꿈이 닌자였을 정도다. 음습하게 적을 공격하는 자객, 킬러가 등장하는 대중문화 콘텐츠는 빠짐없이 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당한 ‘가스라이팅’의 반작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웃음). 닌자가 영주 한 명에게 충성하며 그가 내리는 모든 명령에 복종하지 않나. 내가 그랬다. 강요받는 걸 싫어하는 성격임에도 주말마다 교회에 강제적으로 나갔다. 그럼에도 닌자를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것을 보면 확실히 유년기 성장 환경이 크게 한몫하는 것 같다.
평소 드레스업을 즐기는 편인가? 어릴 때 춤을 오래 췄다. 방송 백업 댄서로도 서보고, 비보이 활동도 했다. 그래서인지 스트리트 패션을 즐겨 입는다. 반스 운동화는 거의 매일 신고 다니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로망을 가지고 있던 브랜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제품이 나오면 선물로 부쳐주더라. 더 좋아졌다(웃음).
올해 단색화가 윤형근에게 영감을 얻은 앨범 <Yun Hyong-keun>을 발매했다. 어떻게 탄생한 앨범인가?
사실 미술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점 하나 톡 찍고 명작이라 치켜세우는 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윤형근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모니터 너머 작품 사진만 보곤 ‘나도 그리겠다’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난해 윤형근의 개인전에 가 실제 작품을 감상하곤 확실히 느꼈다. 압도적이라고 해야 하나? 평소 크고 웅장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무서워한다. 윤형근의 작품에선 직관적으로 그 웅장함이 느껴졌다. 그림이 마치 음표로 다가왔는데 긴 호흡의 앨범으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에게 위대한 아티스트를 꼽는다면?
조 핸더슨, 덱스터 고든, 스탄 게츠, 파로아 샌더스, 아치 셰프.
지금 당신에게 음악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가?
요새 재즈는 거의 듣지 않고 1990년대생 여성 뮤지션이 만드는 음악을 많이 듣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동시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나 싶어 이들 음악으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연구 중이다. 민수, 청하 음악을 특히 많이 듣는 것 같다.
당신을 설명하는 말 중 가장 황당했던 표현은 무엇이었나?
재즈계의 이단아, 시니컬한 뽕끼.
앞으로의 계획이 있나?
얼마 전 직접 연출한 27분짜리 단편영화 <다리 밑에 까뽀에라>를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영화가 당선된다면 조만간 선보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삶이나 외모에 싫증이 나면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 사람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살아가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요즘 SNS상에서 계정을 삭제하고 다시 생성하는 사람들을 보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3월 29일엔 새 앨범도 나온다. 굉장히 재미있는 앨범이다. 딱 들어보면 알 거다.
선우정아
싱어송라이터이자 재즈 보컬리스트, 프로듀서, 뮤지컬 음악감독. 16개의 사랑 노래를 엮어 완성한 정규 3집 <Serenade>로 2021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인’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Photographer DUKHWA JANG
당신이 하는 일에 비주얼은 얼마나 중요한가?
비주얼은 음악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필수 요소 같다. 내가 얼굴 없는 가수는 아니니까. 얼굴을 드러내고 무대에 설 거면 음악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포장지를 갖춰야 하지 않나. 상품에 포장지가 있듯 음악에도 이와 가장 잘 어울리는 껍데기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거다.
당신의 스타일 아이콘은 누구인가?
뷔욕. 어떤 단어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뮤지션인 것 같다. 물론 ‘컨템퍼러리’니 ‘현대미술적’이라느니 얘기할 순 있지만 어느 누가 뷔욕은 어떤 스타일의 뮤지션이라고 딱 잘라 정의할 수 있을까? 뷔욕을 알고 그녀의 팬이 되고부터 감각적인 무대 연출이나 음악의 한 표현 수단으로서의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사실 이전까진 패션에 별 관심도 없었고, 중요성도 몰랐다. 한때 휘트니 휴스턴의 ‘I Have Nothing’을 부르는데 말도 안 되는 ‘드러운’ 힙합을 입고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웃음). 뷔욕을 알면서 음악을 미술적으로도 느끼게 되었다.
당신의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앨범 아트워크가 있다면?
3집 <Serenade>. 다섯 트랙씩 EP 형태로 만들어 세 번에 걸쳐 발매한 작업인데, 아트워크를 통해 얼굴을 점진적으로 드러냈다. 첫 번째 EP에선 얼굴이 돌로 가려진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고, 두 번째에선 망사 사이로 눈이 조심스레 드러난 컷, 마지막엔 내가 곧 창문을 향해 세레나데를 불러줄 것만 같은 디바로 변신해 ‘짠’ 하고 등장하는 아트워크를 선보였다. 날 서고 삐뚤어져 숨기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수줍지만 반짝거리는 것이 존재함을 말하는 음악의 스토리텔링과 아트워크가 잘 맞아떨어진 작업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신의 음악을 묘사해본다면?
한때는 ‘찬란한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만드는 곡은 이와는 결이 좀 다른 것 같다. 지금은 마사지와 같은 음악을 만들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마사지인데 다만 아픈 곳을 한 번 더 지그시 누르는 느낌이랄까? 일말의 짓궂음이 있지만 결국엔 위로를 주고 힘을 보탠다는 점에서.
올해 싱글 앨범 <동거(in the bed)>가 발매됐다. 어떻게 탄생한 음악인가?
노래를 듣는 순간 기분 좋은 침구 안에 안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노래였다. 그래서 이불을 바스락거릴 때 ‘사악’ 하며 나는 소리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침대에서 노래가 시작되는 셈인데 결국 지극히 일상적인 것, 그중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구질구질한 순간도 많고 로맨틱하지 않은 일투성이지만 그럼에도 ‘너’와 사는 것 자체가 너무 로맨틱해서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노래를 만들어 남편에게 들려주니 사기 치지 말라더라(웃음).
유년기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이었나?
여섯 살 즈음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봤다. 불법 복제 비디오로 본 탓에 자막도 없고 한국어 더빙도 없었는데 그때부터 막연히 ‘아, 이 영화처럼 내 인생에 음악이 항상 함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돌파구가 된 순간이나 작업이 있나?
YG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했을 당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면서 굉장히 학구적인 쪽으로 음악에 빠졌다. 그때는 어렵고 난해한 음악을 연구했고 팝이나 가요는 무시하는 쪽이었거든. 그렇게 한창 머리가 커 YG와 일을 하게 됐는데 그때 굳게 가지고 있던 편견이 한순간에 깨지게 된 것 같다. ‘듣기 쉬운 음악은 쉽게 만들 것이다’는 것. 실은 듣기 쉽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어렵게, 그것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민하는지를 직접 알게 된 거지. 짧았던 치기 어린 시기가 단숨에 깨지더라. 그런데 그게 ‘다운’이 아닌 완전 ‘업’으로 발현됐다. 그때를 기점으로 음악적으로 확 넓어진 것 같다. 더 쉽게 표현하고 더 쉽게 곡을 쓰게 됐다.
사람들이 당신의 음악을 어떻게 경험했으면 하나?
동네에 있는 오래된 나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잊을 만하면 ‘맞다, 저기 나무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게 되는. 한결같아 보였는데 어느 날 문득 ‘모양이 달라졌네? 쟤도 늙었네? 요즘 좀 파릇해 보이네?’라고 깨닫는. 굉장히 오랫동안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음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현재 당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인가?
남편인 것 같다. 어쩔 수가 없다. 마치 종교처럼 남편에 대해 너무 절대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남편에게 음악에 관한 피드백을 받을 때 정말 맘먹고 받아야 한다. 안 그러고 싶어도 말 하나에 온 마음이 휘둘려서. 남편이 ‘좀 아쉬운데?’라고 툭 한마디 던지면 며칠을 못 잔다. 아무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가장 칭찬받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다.
릴 체리 & 골드부다 Lil Cherry & GOLDBUUDA
마이애미에서 유년기를 보낸 후 힙합 기반의 음악을 하며 각자 솔로로, 또 듀오 프로젝트로 활동하는 남매. 적어도 다음 두 곡의 뮤직비디오는 봐야 이들을 감잡을 수 있다.‘G et A Whiff Of Dis’, ‘하늘천따지 1000 Words’. Photographer DUKHWA JANG
당신들의 음악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골드부다 ‘파 이스트 디즈니(FarEast Disney)’. 서양의 디즈니가 어린이층에 더 어필하는 전체 이용가라면, 우리는 다크함을 가진 전체 이용가, 동양의 디즈니 킹덤 같은 세계관을 비주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컨트롤이 가능한 카오스’를 모토로 삼는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두 사람은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그 모습은 한국, 중국, 일본의 특징이 복합적으로 섞인 국적 불명의 동양인이다.
골드부다 음악을 캐릭터로 표현할 때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본다. 자신의 키워드를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 음악관과 세계관을 판타지형으로 보여주는 캐릭터. 우리는 후자 쪽이다. 어릴 때 살던 마이애미 동네에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굳이 나라와 갈래를 구분하기보다 좀 더 넓은 관점에서의 동양인으로 점점 스스로를 인식했다. 우리의 피부가 동양인이니까. 결국 우리 모두 ‘원 러브’ 아닌가.
해외 팬들이 당신들의 음악을 두고 케이팝이라고 할 때 어떤 기분인가?
골드부다 음악을 시작할 때 힙합을 가장 좋아했기 때문에 케이팝 장르로 불리는 것에 약간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고맙다. 오히려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해외 팬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케이팝만의 개성과 고귀함이 있다. 케이팝 바운더리 안에서 우리가 낯설고 새로운 케이팝을 선보일 수 있다는 것, 그 확장성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뮤직비디오에서 그래픽 작업을 이용하거나 다양한 요소로 현란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편이다. 패션 역시 맥시멀리스트에 가까워 보이는데, 손수 제작하는 아이템이 많나?
릴 체리 70~80%는 엄마가 직접 제작해주신다. 리폼을 거쳐 탄생한, 놀랍도록 멋진 의상과 소품들이다. 엄마는 원래 패션 쪽 꿈을 키우다가 음악을 전공하셨는데, 이제 우리와 같이 콜라보하면서 패션 작업을 하는 셈이다.
언제부터 패션에 눈뜨게 됐나?
릴 체리 사실 몇 년 안 됐다. 패션에 있어서는 엄마 말을 듣는 게 낫다는 걸 깨달으며 눈뜨게 됐다. 어릴 적 사진들을 보면 엄마 말을 안 듣고 내가 입고 싶은대로 고집하던 시기가 보인다. 헬로 키티 티셔츠만 좋아한다거나. 지금은 아래 위로 통일되게 색깔 맞춤 하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골드부다 마이애미에서 살기 시작할 무렵, 무시를 당하거나 인종차별 상황을 겪으면서 다른 친구들의 문화에 관심 갖게 됐다. 그 문화에 자연스럽게 젖어 들고 잘 섞여야 나에게 불이익이 적었으니까. 그렇게 힙합에 빠지고, 비보이에 빠졌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패션 취향도 자연히 달라졌다. 비보이를 하며 스키니 진에 스몰 셔츠를 즐겨 입던 시절도 있고. 요새는 뉴 웨이브 힙합에 빠져있다.
당신들에게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골드부다 피카소, 앤디 워홀, 퍼렐 윌리엄스. 프로듀서이면서 아티스트이고 패셔니스타인 퍼렐은 내 음악적 롤모델이다. 최근 그가 인종 문제에 관한 철학이 담긴 음악을 발표했는데, 그가 음악을 만들 때의 마인드셋이 나와 많이 닮았다. 건축을 전공해서 프랭크 게리도 좋아한다.
릴 체리 얀 투 고(Yarntogo). 우리 엄마다. 엄마의 주 스킬이 뜨개질이라, 커스텀 메이드 아이템에 실을 활용한 게 많다. 내가 공연 때 ‘샤라웃 투 얀 투 고!’ 하면 바로 우리 엄마를 부르는 거다.
골드부다는 건축을 전공하고서 어떻게 음악의 길을 걷게 됐나?
골드부다 파슨스에서 건축 전공으로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공학을 공부했다. 원래 회화나 조각에 관심이 있어서 건축을 전공할 때도 모델링 작업을 좋아했다. 그런데 대학원에 가니 아무래도 행정적인 부분을 많이 배우더라.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진로를 유턴하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 고민했지만, 결국 음악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트렌드 읽기를 즐겼다. 음악 방송을 보면서 가수들의 공연 자체보다 자막으로 흐르는 순위 소개에 더 눈길이 가는 식이었다. 누구는 이번 주에 몇 계단 순위가 오르고, 누구는 새로 진입하고, 그런 흐름을 기억하는 것 말이다. 음악을 할 때도 감성에 휘말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음악이라는 게 구상하고 나서 바로 선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작업과 과정을 거친 후 세상에 공개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런 시차까지 고려해서 작업하려 한다. 트렌드도 공부한 만큼 보이는 것 같다.
릴 체리는 NYU에서 시를 전공했다. 시를 배운 경험이 랩 작업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나?
릴 체리 내가 쓴 시를 모아놓은 노트가 있었다. 몇 년 전 오빠가 프리 스타일을 한 번 해보라고 했을 때, 노트 속의 시에 리듬만 붙여서 불러본 게 우리의 첫 음악인 ‘모토롤라(Motorola)’로 완성됐다. 시와 음악의 연관성은 크다. 전공 수업 때 시를 두고 사운드적인 공부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발음에 따라 어떤 말은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소리가, 어떤 말은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소리가 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시를 그저 읽어보면서 단어의 뜻은 몰라도 사운드만으로 느낌을 토론해본 경험, 소리에 따른 감정을 표현하는 걸 배운 경험이 음악 작업에 큰 도움이 된다.
좋아하는 시인은 누구인가?
릴 체리 우리 할아버지! 신춘문예에 두 번 당선된 전영경 시인이다. <선사시대>, <나의 취미는 고독이다> 같은 시집도 내셨고, 검색하면 정보가 나온다. 할아버지가 한 가지에 빠지면 강한 집착으로 파고드시는 분이었다. 식물에 빠졌을 때는 집 안에 걸어다닐 틈이 부족할 정도로 식물을 가득 수집하신 스타일. 그런 마인드셋을 내가 닮은 것 같다.
골드부다 시인들은 지금 시대와 같은 형식의 랩이나 음악이 존재하기 전에 운율로 감동을 주는 인물이었으니, 록스타의 면모가 있는 이들이다.
요즘 관심사는?
골드부다 록.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은 모두 록스타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도 록스타다. 요즘 미국에서 2000년대 초반의 얼터너티브 록 스타일이 다시 유행한다. 힙합 트렌드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록과 맞닿는 부분이 분명 있다. 이젠 록이 좀 더 본격적으로 힙합 안에 들어오면서 2021년만의 사운드가 생기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선보일 음악에도 록 사운드가 있다. 아이콘이라면 하나의 장르에 만족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장르를 두루 한 바퀴 도는 느낌으로 음악을 선보인 다음에는 다시 예전의 ‘올 유 캔 잇(All You Can Eat)’ 때와 같은 바이브로 돌아가고 싶다.
릴 체리 정신 건강, 몸 건강. 또 솔로 계획. 내 경우 음악이라는 길을 얼떨결에 찾았고, 힙합이 나의 제일 큰 우산이지만 꼭 그것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보다 팝에 가까운 음악도 생각한다. 오빠가 마이애미의 크렁크 뮤직에 자기 터치를 더해 ‘부다 크렁크’라는 장르를 만들었는데, 예전 마이애미에서 유행한 춤을 한국으로 가져와보고 싶다. 한마디로 흥이 있고, 저절로 춤출 수 있는 음악을 선보이려 한다.
마이애미적인 사운드의 특징이란 뭔가?
골드부다 굉장히 에너지 넘치고, 화끈하다. 미국에서는 각 지역마다 추구하는 플로우의 뉘앙스가 다르다. 그 지역 출신이 아닌 자가 그 지역의 특정 스타일을 구사하면 접하는 이로 하여금 물음표가 생길 수도 있다. 우리는 마이애미 출신이지만, 우리의 ‘스킨’ 때문에 완전 마이애미 사운드를 구사했을 때 거부감이 되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마이애미 사운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좀더 팝에 맞춘 우리만의 사운드를 내고자 한다. 힙합 아티스트들이 잘 착용하는 그릴즈의 경우, 남부의 그릴즈는 알이 크고 화려한 편이다. 또 남부에서는 아이스라는 개념도 중요하다. 내가 한국에서 ‘풀 아이스드 아웃 그릴즈’를 선보이는 제1호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웃음).
뮤지션으로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나?
골드부다 최대한 많은 장르를 수용하는 인물이고 싶다. 우리는 지금까지 새로운 장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여왔다. 한 장르에 만족해서는 아이콘이 되기 힘들다. 내 경우 비보잉, 그라피티, 디제잉, 엠씨 등 힙합의 4대 요소라고 하는 것들을 두루 경험했다. 음악을 시작한 후에도 내가 어떤 역할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지, 어떤 인재가 될 지 몰라 프로듀싱, 영상 편집, 커버 디자인 등 여러 가지를 해봤다. 훗날 마침내 ‘리스펙트’를 받는 사람이 되려면 다양한 경험이 있어야 내가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 목표에 돈이 차지하는 부분은 얼마나 큰가?
릴 체리 음악을 하며 살 수 있다는 건 아주 행운이지만, 동시에 힘든 부분 역시 아주 크다. 따라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 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골드부다 지금까지를 돌이켜 보면, 우리가 한국에서 아직 선보인 적이 없는 힙합 음악을 선보였을 때 가장 큰 성취감을 느꼈다. 그런 걸 보면 내 경우 명예욕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 금전욕이 더 컸다면 보다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차 두 대에, 아들과 딸, 그리고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집에서 살 수 있는 정도로는 벌고 싶다.
어떤 제약 없이 조건이 갖춰진다면 공연해보고 싶은 장소가 있나?
릴 체리 우리가 자란 마이애미의 야외 공연장에서 공연할 수 있다면, 커리어가 완성되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골드부다 마이애미에서 공연한 이후엔 평양의 무대에 서보고 싶다. 힙합에는 사실 디스나 경쟁보다 ‘러브’가 더 어울리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그 점을 잊는 듯하다. 결국에는 우리 모두 ‘원 러브’다. 그게 모든 문화의 원동력이다. 원 러브를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상징적 무대가 평양일 것이다. 또 아트 바젤 같은 데서 공연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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