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에 관한 사적이고 공적인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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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생기로운 번잡함에 휩싸여 있을 때, 김창열 화백의 타계 소식이 들렸다. 한국 추상미술의 거인과 그 작품을 가까이서 지켜본 세 필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김창열을 추억하고 애도했다.

2013년, 화업 50주년을 기념하는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 김창열 화백.

파리의 사랑방에서 평창동과 드라기냥까지

나는 파리에서 1987년부터 1992년까지 김창열 화백의 어시스턴트를 했다. 어시스턴트가 하는 일은 작업을 준비하거나 단순 반복 과정을 대신하는 것이다. 파리에 유학한 많은 화가들이 70년대부터 김창열 아틀리에에서 어시스턴트를 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용균 감독이 여기에서 일했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작업 과정은 매우 조용하고 집중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다. 간혹 선생님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주로 당시 파리에서 열리는 전시나 공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높은 연배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예술과 동시대 예술에 대한 선생의 안목과 통찰력은 매우 폭넓고 깊어서, 젊은 유학생인 내가 예술의 높은 수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간혹 김창열 화백은 내게 “꽃다운 이야기 좀 해보라우”라며 침묵을 깨곤 했다. 파리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흥미진진한 연애담을 전해드리면 가늘게 눈을 뜨고 미소를 띤 채로 한동안 음미하시는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김창열 화백의 파리 아틀리에는 ‘파리의 사랑방’으로 불렸다. 197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약 40년간 수없이 많은 한국과 유럽, 일본의 저명 인사들이 6구의 노트르담-데-샹(Notredame Des Champs) 44번지를 방문했다. 파리에 들를 때마다 센강 근처의 라 루이지안(La Louisiane) 호텔에 묵은 백남준 선생은 저녁이면 종종 식사하러 오셨는데, 당시 파리에 작업실을 새로 연 이우환 선생이 동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 분이 모이면 한국에 대한 이야기, 각자의 근황과 파리, 도쿄, 뉴욕의 동정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마르틴 부인이 끓여주는 소꼬리국은 가장 인기있는 메뉴였다. 프랑스에선 소꼬리를 잘 먹지 않아 값이 쌌지만, 지금은 꽤 올랐다고 한다. 이경성 초대 국립현대미술관장님, 국현으로 가시기 전의 배순훈 관장님 내외, 백건우와 윤정희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아틀리에를 즐겨 찾았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김창열 화백을 찾은 이유는 그의 자상함과 상대를 편안하게 받아주는 포용력 때문이다. 말수 적은 그가 미소를 띤 채 다른 이들이 하는 얘기를 한참 듣다가 간혹 한마디씩 하면 모두가 기탄없이 웃곤 했다. 그의 말은 어눌하지만 항상 부드럽게 의표를 찔렀다.

김창열 화백은 세 군데에 작업실을 두었다. 파리 외에 1980년대 중반 평창동에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한 작업실 겸 자택이 지어졌다. 한국에서 가족들과 살기 위한 집이었다. 나는 여름이면 방학 때 선생님을 따라 한국에 들어왔는데,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고지대여서 마을버스도 오가지 않을 때는 등산하듯 걸어 올라갔다. 작업실에 도착한 뒤에는 다시 샤워를 해야 할 정도 였다. 90년대 들어 프랑스 남부의 드라기냥(Draguignan)이라는 소도시에도 새로운 작업 공간을 마련했다. 그 근처 산중에 중세에 지어진 가톨릭 수도원이 하나 있어, 선생님과 함께 거기까지 산책하곤 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찾아다녔지만, 작업 스타일에 있어서는 묵묵히 자신의 세계를 고수했다. 나는 지금도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여타 노동자들처럼 쉬지 않고 규칙적으로 작업하던 화백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게 그는 파리, 서울, 드라기냥 사이를 오가면서 여생을 보냈다. 낭만을 떠올리기에 앞서 그는 나로 하여금 노동이 예술가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화업을 이어 나가면서 김창열 화백이 가족 외에 가장 가깝게 의지한 이들은 ‘앵포르멜(Informel)’ 세대의 작가로 불리는 박서보, 이우환, 고 윤형근, 정상화 등의 친구들이 아닐까 한다. 특히 박서보 화백과의 우정과 서로에 대한 존중은 유명하다. 1929년생인 김창열 화백이 1931년생인 박서보 화백보다 손위지만, 서로 격의 없이 지냈다. 두 작가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때로는 짓궂은 청년들처럼 보이기도, 때로는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연륜을 뿜어내기도 했다. 이 세대는 전후의 한국 미술사를 재건하고 주도했다. 앵포르멜 세대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이들을 제외하고 1960~70년대의 한국 미술을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예술은 죽음과 함께 불멸의 독보적 의미를 품는다. 현재를 가득 채우는 예술 작품들이 궁극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의 이름으로 불릴 때다. 이제 예술가는 가고 그에 대한 기억만 남았다. 그의 예술은 시대가 남긴 많지 않은 소중한 의미 중 하나가 되었다.

글 |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운영위원)

1991년의 ‘회귀’. 물방울이 어떤 질감의 바탕과 만나는지, 바탕에 문자가 있는 상태에 놓여있는지에 따라 자아내는 느낌도 다르다. 김창열, <회귀(Recurrence) PA1991>, 1991, 캔버스에 먹과 유채, 194.5 162.5cm

2008년의 ‘회귀’. 김창열, <회귀(Recurrence) PBL08007>, 2008,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유채, 162.2 130.3cm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휘가로지’(1975). 모래, 나무, 종이, 신문 등 물질성이 두드러진 재료를 다각도로 이용해 물방울의 효과를 모색하던 시기다. 김창열, <휘가로지(Le Figaro)>, 1975, 뉴스에 수채물감, 53.5 42cm

물방울 회화, 그 탄생과 변주

‘왜 물방울인가?’ 생전에 김창열 화백이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물방울 회화의 ‘탄생’에 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요약하자면 이렇다. 1969년 미국에서 프랑스로 간 김창열은 파리에서 약 15km 떨어진 팔레조에 자리를 잡는다. 낡은 마구간을 개조한 곳에서 생활하며 작업실로도 사용했다. 너무 가난해서 캔버스를 재활용해야 했고,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이 잘 떨어지도록 했다. 어느 날, 그렇게 뿌린 물방울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장면을 보며 ‘유레카’와도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처음부터 물방울 형태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반의 작품에는 공간의 틈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물컹한 액체 형상이 등장한다. 그 액체는 점차 유리병 모양으로, 다시 물방울의 형태로 변신한다. 1972년, 마침내 물방울 회화 ‘밤에 일어난 일’(1972)이 세상에 공개된다. 까맣게 칠한 정사각형 캔버스의 오른쪽 하단에 부유하는 투명한 물방울 형상은 어둠의 침묵을 깨듯 빛을 받아 세상의 모습을 일부 반사한다. 마구간, 빛과 어둠, 그리고 머나먼 동양에서 당도한 한 사내까지, 물방울 회화의 탄생 배경은 기독교적 서사와 여러모로 닮았다(김창열은 12월 24일생이며, 그는 프랑스에서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1970년대 김창열은 물방울 회화를 다각도로 실험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다. 1973년 파리의 놀 인터내셔널에서 물방울 회화만을 모은 첫 프랑스 개인전이 열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 같은 물방울을 캔버스에 사실적으로 그린 30점을 출품했다. 살바도르 달리, 알랭 보스케 등 초현실주의 계열의 작가와 평론가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유화 기법과 뉴욕에서 넥타이를 만들며 배운 에어브러시 기법을 활용해 다양한 모양과 크기, 표면 효과를 지닌 물방울을 열정적으로 그려간다. 바닥에 놓은 캔버스에 물에 적신 스펀지를 짜서 실제 물방울이 표면에 맺힌 모습을 촬영하거나, 종이를 물방울 모양으로 오려 캔버스에 세심히 배치하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했다. 1974년부터 그는 물방울을 완벽하게 담아낼 ‘지지체’를 찾기 위해 실험을 이어간다.

모래, 나무, 종이, 신문 등 물질성이 두드러진 재료를 물방울이 그려지는 배경으로 사용함으로써 빛의 반사와 그림자, 충만함과 축축함 등 일종의 ‘물방울 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특히 김창열은 물방울 회화를 반복해 그리며, 물방울에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상실감 등을 극복하는 정화와 치유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가 “모든 것을 물방울로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보내기 위한 행위이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虛)’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투명한 물의 이미지에 맑은 강물이 흐르던 고향 맹산을 향한 추억과 그리움도 담았다.

1980년대 물방울은 한자, 획, 색점, 면과 만난다. 1980년대 초반, 김창열은 캔버스가 아닌 거친 마대를 주로 사용하며 표면의 물성과 물의 번짐과 얼룩 효과를 특별히 강조한다. 날것의 바탕과 캔버스 뒤에서 스민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 물방울의 이질감이 더욱 두드러졌다. 1980년대 중반에는 물방울과 대구를 이루는 획이나 색점, 면 등이 등장하는 ‘해체’ 연작을,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자를 물방울 회화에 도입한 ‘회귀’ 연작을 본격적으로 제작한다. 먹으로 한지에 문자를 겹쳐 빼곡하게 쓰거나 캔버스에 인쇄한 듯 또박또박 천자문과 도덕경의 일부를 쓰고, 그것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무리 지어 있도록 화면에 그렸다. 캔버스는 한자가 담긴 해석 가능한 텍스트가 되었고, 그 위에서 물방울은 자유롭게 표류한다. 이후에도 물방울 회화의 변신은 멈추지 않았다. 1990년대 그는 돌과 유리, 모래, 무쇠, 나무, 물 등을 사용해 물방울 회화를 설치미술로 확장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노랑, 파랑, 빨강 등 캔버스에 다양한 색상을 도입하며 또 다른 도약을 시도했다.

작가의 생전 마지막 전시가 된 갤러리현대의 <The Path(더 패스)>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물방울과 함께 거대한 맥을 형성하는 ‘문자’에 초점을 맞췄다.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1975년 작 ‘휘가로지’를 출발점으로 삼고, 2010년대 ‘회귀’ 연작까지 망라해 호평을 받았다. 작가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작품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묵직한 감동을 전할 것이다. 시대에 따라 무수하게 변신한 김창열의 ‘물방울 회화’를 재해석하는 일이 우리의 숙제로 남았다. 글 | 김재석(갤러리현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1958년 서울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가협회의 전시장에서. 왼쪽부터 하인두, 장성순, 김창열, 박서보, 전상수, 김청관이다. 김창열과 박서보의 젊을 적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낯설고 새롭다.

90년대,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모습.

불과 얼마 전까지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김창열 개인전 <더 패스>에 노장은 2018년 작을 출품했다.

한국 미술사에서 본 김창열

김창열 화백이 세상을 떠난 날, 나는 페이스북에 짧은 추모의 글을 남겼다. 선생과의 영원한 이별 앞에서 나는 그의 너그러운 인간미를 간절하게 불러냈다. “(…)무언의 따뜻한 눈빛으로 언제나 듣는 쪽을 즐기신 분이다. 그러다 평안도 사투리가 섞인 떨리는 저음으로 촌철살인의 단문을 내놓는다. 마치 물방울 그림에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아내듯…. 단자(Monad)의 수사랄까?”

나는 선생의 생전에 해외에서 열린 개인전을 여러 번 참관한 바 있다. 파리, 베이징, 브뤼셀, 타이중, 홍콩 등에서 열린 그 전시들에 대해 여러 차례 글을 썼다. 마스터 김창열은 자신의 작품에 너무 겸손하다. “옛날에 달마 대사는 벽만 쳐다보는 수행 끝에 득도 해탈했다는데, 나는 미친놈처럼 물방울 그리기로 50년을 보냈는데, 세속의 욕망에 사로잡혀….”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작품을 과시한 적이 없다. 언젠가 평창동의 아틀리에에서는 이렇게 말하셨다. “나 죽고 나면 그때 잘 봐줘.” 지금, 나는 그 말씀이 마치 유언처럼 들린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잠언 그대로, 이제 ‘물방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김창열의 예술혼은 여전히 뜨겁게 살아 있다. 그 예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이야말로 후대의 몫이다. 김창열 예술이 한국 미술사에 차지하는 가치는 무엇이고, 어떤 면에서 조명해야 할까.

첫째, 김창열은 ‘해방 후 제1세대 작가’다. 일제 강점의 사슬을 벗은 후 새로운 대학 체제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작가에 속한다. 이들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서 유학한 선배 세대와는 다른 역사적 운명을 짊어졌다. 6·25전쟁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1950년대 후반 화단에 진출했다. 청춘기에 내지른 도전과 장년기에 거둔 성취는 20세기 후반 한국 미술사의 핵심 쟁점과 고스란히 겹친다. 그것은 국전(國展)으로 대변되는 제도권 미술에 대한 반발, 집단적 미술 운동의 실천, 비엔날레와 같은 국제전 참가, 미술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 등으로 실현되었다.

둘째, 추상화가로서의 위상이다. 1957년에 창립한 현대미술가협회는 당대의 새로운 서구 미학이었던 앵포르멜을 이 땅에 개척했던 전위 그룹이다. 앵포르멜은 전쟁의 비극적 체험으로 내면에 응축된 불안과 저항의 심리를 표출한 작품을 말한다. 김창열, 하인두, 박서보 등 동년배뿐만 아니라 윤명로, 김봉태, 김종학 같은 후배 작가들까지 동참해, 한국 모더니즘 회화의 골간을 다졌다.

셋째, 물방울 그림으로 이룩한 국제적 성가(聲價)다. 김창열은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 파리에 입성했다. “내 작품이 국제 공통어가 돼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국을 훌쩍 떠난 그의 그 꿈은 마침내 1972년부터 시작한 물방울 그림에 맺혔다. “파리 땅만 밟아봐도 좋겠다”던 간절함을 넘어 김창열은 국제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단적인 예가 2004년 파리의 국립 죄드폼 미술관 개인전이다. 죄드폼에서 개인전을 연 한국 작가는 이우환뿐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 국제 무대에 알려진 한국인 작가는 누구인가. 김창열의 선배로는 뉴욕의 김환기, 파리의 이성자와 이응노가 있다. 후배로는 백남준, 이우환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의 단색화가 각광받은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무엇보다 김창열은 반세기 동안 파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그는 ‘미술의 메카’ 파리를 거쳐 간 수많은 후배의 멘토였다.

넷째, 이른바 ‘인기 작가’로서의 면모다. 물방울 그림은 사람의 시적 감성을 파고든다. 물방울은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는 국제 공통어다. 그 감동은 현재진행형이다. 2017년의 일이다. 홍콩 펄램(Pearl Lam) 갤러리에서 김창열 개인전이 열렸다. 하나의 물방울이 화폭에 기다란 궤적의 물기를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작품이 압권이었다. 이 작품 앞에서 두 외국인이 30분간 진지하게 논평을 주고받았다. 자세히 봤더니, 명실공히 세계 1위 갤러리인 가고시안의 주인이었다. 내 일인 양 우쭐했다. 앞으로 김창열의 그림값이 어떻게 전개될지 더욱 궁금하게 만드는 기억이기도 하다.

김창열 화백은 파리 아틀리에 지척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자신의 무덤 자리를 오래전에 마련해뒀다. 프랑스 부인과의 관계로 보나 파리 생활의 역사로 보나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 빈소에서 이 문제를 유족에게 물었더니, 선생의 유해는 2016년에 건립된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곁으로 간다고 한다. 유해가 우리 땅에 묻힌다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미술관은 ‘예술가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집’이다. 그 집에서 김창열 예술이 숨 쉬는… 글 | 김복기(월간 <아트인컬처> 대표, 경기대 교수)

피처 에디터
권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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