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세상에서 사람들은 ‘뉴노멀’을 외쳤고, 트로트는 세대 간극을 뛰어넘어 온 나라에 열풍을 일으켰다. 극장을 떠난 한국 영화는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섰으며, SNS에서의 고백과 폭로는 상찬 혹은 난장을 낳았다. 숨 가삐 달렸으니 이제는 잠시 멈춰 설 때, 해시태그로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 2020년이 여기 있다.
응답하라, #2020 가요 TOP 10
<더블유>가 묻고, 국내 가요계에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세 명의 전문가가 답했다. 2020년 가요계의 천태만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01 올해의 가장 영리한 소속사는?
임희윤(<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졌다. 지난해만 해도 일부 팬의 반발을 산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를 안착시켰다. 이제 다른 회사 아이돌도 제 발로 들어오는 케이팝 팬 포털로 키워냈다. 상장을 앞두고 ‘Dynamite’를 작심하고 터뜨렸다. 외환(外患)이 올 땐 겉으론 과묵하되 물밑에서 기동했다.
김윤하(대중음악 평론가) 크래커 엔터테인먼트. 옛말 가운데 ‘바보와 천재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다. 엠넷 <로드 투 킹덤>에 출연해 우승했지만 <킹덤> 제작이 연기되고, 온라인 콘서트를 열었지만 운영 서버 문제로 본의 아니게 무료 콘서트를 진행하고, 앨범 발매 당일 인쇄 불량으로 출고가 지연되는 등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의 악재가 겹쳤지만 그 모든 걸 이겨내고 더 보이즈를 올해 가장 크게 성장한 보이 그룹으로 만들었다. 어쩌면 ‘바보인 척’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김영대(대중음악 평론가)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BTS의 무한 성공가도. 잇따른 온라인 콘서트 대박. TXT의 순조로운 시장 안착. 쏘스뮤직 인수와 빅히트의 터치가 닿은 여자친구의 성공적 변신. 그리고 어쨌든 국민적 관심을 끈 증시 입성.
02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인 ‘핫 100’ 정상에 오른 방탄소년단, 이들에게 남은 도전은?
임희윤 그래미 트로피 들고 귀국. 춤추고 노래나 불러주던 날엔 고별을 고할 때. 지금껏 미국의 여러 매체와 시상식이 그들을 바람몰이에 동원한 느낌이라면 이제는 ‘핫 100’까지 접수한 마당이다. 이제 ‘Dynamite’가 중요한 게 아니다. 종합선물 세트(앨범)로 승부를 볼 시간이 다가온다.
김윤하 이들에게 남은 도전을 묻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물음표를 전부 없애버리는 일.
김영대 너무 당연한 답변 같지만 그래도 그래미. 그래미가 반드시 도전의 과제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궁극적인 검증 과정으로 많은 이들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상도 중요하지만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 역사를 다시 쓰는 사건이 되지 않을까? 평론가의 감으로는 올해 분명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03 생각보다 빛을 보지 못한, 저평가된 우량주와 같은 가수를 하나 꼽는다면?
임희윤 에이티즈. 해외에서 세를 불리곤 있다지만 이제는 흔해진(?) 1억 뷰 뮤비 하나 없다니. 또렷한 콘셉트, 강렬한 단조 선율, 거침없는 야성미, 흔들어대는 깃발, 한스 치머풍의 전투 관악. 케이팝다운 자극적 미학이 여기 모였다. ‘에구머니야 가던 길 가셔/내 말이 다 맞다고’(‘Thanxx’ 중)
김윤하 우즈.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아이돌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지만 확장이나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아티스트라고 생각한다. 의심스럽다면 그가 직접 프로듀싱을 담당한 첫 EP <Equal>을 들어보자.
김영대 에이티즈. 포스트 BTS라 부르면 어떨까? 해외 시장, 특히 북미 시장에서 가장 유망한 팀 중 하나로 팬들과 현지 언론 모두가 주목 중이다. 실력, 외모, 그리고 흥미로운 퍼스낼리티 등을 모두 갖춰 스트레이키즈, 더 보이즈 등과 함께 2021년 중요한 진정을 이뤄낼 팀이 될 듯.
04 올해의 프로듀서로는 누구를 꼽겠나?
임희윤 단편선. ‘회기동 단편선’, ‘단편선과 선원들’에 머물 때 음악적으로, 서사적으로 했던 실험을 이제 프로듀서로서 맘껏 펼친다. 음악 프로덕션 ‘오소리웍스’를 차려 지난해 천용성에 이어 올해는 전유동을 리뉴얼해냈다. 적당히 어수룩하고 들여다보면 미끈한 팝으로.
김윤하 황현. 그동안은 아는 사람만 알던 그의 ‘덕후력’을 바탕으로 한 개성과 진정성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본 한 해였다. 오리지널 곡도 곡이지만 비의 ‘It’s Raining’을 자신의 스타일로 편곡해 온앤오프에게 안긴 곡엔 ‘올해의 편곡상’을 줘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황버지’, ‘황토벤’이라는 별명이 괜히 유행한 게 아니다.
김영대 디즈. NCT를 비롯해 최근 몇 년간 SM의 세련된 프로덕션을 이끌고 있는 숨은 공헌자다. 유영진, 켄지 등 기존의 SM 프로듀서들과 달리 완벽히 R&B에 기반해 있고, 그것을 굳이 ‘케이팝화’하지 않은 채 아이돌 음악에 성공적으로 이식하고 있다. 보컬 디렉터이자 편곡자로서도 탁월한 실력자임에 틀림없다.
05 올해 가요계와 K-POP계의 인상적인 사건 3가지는?
임희윤 ① 트로트 열풍.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훈훈한 청년들이 ‘오빠부대’부터 ‘손자부대’까지 지휘했다. 한보다 흥, 막걸리보다 에일의 트로트로. ② 빌보드 차트의 멜론 차트화 가속.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를 ‘로컬 시상식’이라 일갈했다면 머잖아 빌보드 메인 차트는 ‘케이팝 로컬 차트’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동시다발 컴백으로 줄 세우고, 혹여나 미래에 병역특혜까지 걸린다면…. ③ 이미지에서 오피니언으로. 들끓은 세계, 출렁인 케이팝. 미국의 BLM 운동, 중국 누리꾼들의 케이팝 때리기, 태국 민주화 운동가들의 태국계 케이팝 아이돌 연대 요청,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소녀들의 한글 ‘평화’ 호소까지. 소셜 파워의 상징이 된 케이팝은 세계의 게시판이 돼간다.
김윤하 ① 코로나19의 습격. 유례없는 전염병 대유행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대중문화계, 그 가운데에서도 이제 막 세계로 날개를 뻗어나가던 케이팝이었다. 분명한 악재로 큰 손해를 본 부분이 많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온라인 콘서트와 팬미팅, 영상통화 팬사인회 등을 기획해내는 누구보다 빠른 위기 대응 능력에 놀란 한 해이기도 했다. ② ‘Dynamite’의 빌보드 핫 100 1위. BTS의 빌보드 1위 소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싱글 차트 1위는 확실히 또 다른 기분이었다. ③ 트로트가 점령한 가요계. 지난해 <내일은 미스트롯>으로 시작된 트로트 열풍이 올해 초 후속작 <내일은 미스터트롯>까지 성공하며 더욱 가속화되었다. 어디로 채 널을 돌려도, 어떤 프로그램을 봐도 트로트투성이인 한 해였다.
김영대 ① 방탄소년단의 ‘Dynamite’가 빌보드 정상에 등극한 순간.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적어도 케이팝의 국제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건이다. ② 레트로와 뉴트로 열풍. ③ 언택트 콘서트의 시대. 갑작스러운 팬데믹 시대에 케이팝의 기술이 펼쳐갈 장밋빛 미래를 확인시킨 이벤트. 공연의 의미와 가능성을 새로 정의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명백한 한계를 노출시켰다.
06 기획사 대표나 프로듀서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면?
임희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방시혁 의장에게. 대관절 그래서 얼마나 버셨어요?
김윤하 SM 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에게. 프로듀서님, ‘ID: Peace B’를, 꼭, 2020년에, (에스파로) 구현해야만, 했나요.
김영대 SM 엔터테인먼트 이성수 공동대표에게. 충분히 자작곡의 능력이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왜 그것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것을 주저하는지 의아합니다. 특히 랩 가사. 래퍼는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때 빛이 나는 법이 아닐까요? NCT 127의 ‘내 Van’과 같은 곡이 더 듣고 싶네요.
07 올해 가요계를 휩쓴 ‘트로트 열풍’이 ‘반짝 유행’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건 뭘까?
임희윤 TV 예능국의 일대 쇄신. 굳이 롱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열풍도 계속 불면 미지근해진다. 아님 아예 훌러덩 타버린다. ‘기본 시청률 잡고 가기’라는 낡은 전략이 결국 비슷비슷한 프로그램만 계속 양산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TV 음악 예능 전반의 몰락으로 이어질지도. 신선한 TV를 보고 싶다.
김윤하 트로트 음악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꼼꼼한 아카이빙. 긴 시간 대중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장르다운 장르 대접 한번 못 받아본 것이 트로트라는 말이 무척이나 뼈아프게 다가온 한 해였다. 아티스트 정리나 정식 앨범 발매 기준 등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영대 아마도 또 다른 예능과 젊은 스타. 트로트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고 따로 돌아온 적도 없다. 작금의 트로트 열풍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또 젊은 스타들을 통해 ‘트롯은 노인들이나 듣는 가요무대용 음악이다’라는 인식에서 TV 세대를 자유롭게 해준 결과다.
08 가장 인상적으로 보고 들은 올해의 여성 솔로 뮤지션은?
임희윤 미스피츠. 소니뮤직과 전속 계약을 맺고 올해 1월 1일 데뷔한 여성 싱어송라이터. 숙명여대에서 클래식 작곡 전공 중. 작사, 작곡, 편곡, 외모, 음색, 다 된다. 컴퓨터의 시점에서 노래한 ‘내게도 색이 칠해진다면 좋겠어’를 비롯해 서정적 가사와 대담한 악곡 전환이 특기.
김윤하 청하. 원래도 잘했지만 정규 앨범을 준비하며 한층 레벨업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앨범 선공개 곡인 ‘Play’를 댄서들과 함께 찍은 안무 영상은 인간의 어떤 한계를 넘어선 듯한 느낌이 들어 보는 내내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앨범만 나오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김영대 이효리. BTS와 트로트 열풍 외에 이렇다 할 이슈가 없었던 대중음악계에서 홀로 승승장구한 여성 뮤지션. 예능에서의 여전한 존재감, 레트로와 뉴트로 붐을 타고 그가 여전히 상업적으로 그리고 음악적으로 현재 대중음악계에서 호환성이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09 블랙핑크 멤버 중 독자적 연예인으로서 가장 롱런할 것 같은 이와 그 이유는?
임희윤 로제. 그의 목소리가 없다면 그룹의 몇몇 곡은 드라마로서 아예 성립할 수 없다. 블랙핑크가 몇 년을 가든, 당장 내일 깨지든 로제는 어딘가 대형 음악 페스티벌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앨런 워커나 포터 로빈슨의 세트 옆에서, 또는 혼자만의 무대에서.
김윤하 리사. 리사는 블랙핑크 이름으로 선 무대 위에서도 멋지지만 무대 아래에서도 이미 전 세계 아시아 소녀들의 워너비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 잡았다. 완성도 높은 가수나 퍼포머 외에도 인종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선 멘토로 활약할 준비를 마친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한다.
김영대 지수. 블랙핑크 이후의 커리어에서도 순조로운 변신이 가능할 멤버. 압도적인 비주얼도 장점이지만 그가 가진 일상적인 매력과 장난기 어린 밝음이 예능 어디에도 무리 없이 잘 어울린다.
10 올해의 가장 시시한, 실망스러운 컴백은?
임희윤 방탄소년단의 ‘Dynamite’. 멤버들은 ‘마침 이 시기에 만나게 된 곡’이라고 했지만 상장 시점에 쫓겨 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과 반년 전 멤버들이 직접 참여한 곡(‘On’)으로 9부 능선(‘핫 100’ 4위)까지 갔는데. 영국 작곡가들이 만든 곡으로 역사적 쾌거가 영구 기록되기를 과연 전원 예외 없이 바랐을까.
김윤하 양준일. 그는 지난해 연말에서 연초까지, 3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대한민국을 가장 뜨겁게 달군 인물이었다. ‘탈지구급’ 스타일과 방부제 외모로 ‘탑골GD’라는 별명까지 만들며 ‘양준일 열풍’을 이끌었지만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신곡 ‘Rocking Roll Again’은 30년 전과 지금이 애매하게 섞인 이도 저도 아닌 결과물이었다.
김영대 정확히 컴백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레드벨벳-아이린&슬기의 미니 1집 <Monster>. 화려한 이미지와 고급스러운 포장에 비해 음악적인 차별화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레드벨벳의 유닛으로 더 나은 조합도 분명 가능했을 것.
#아무노래챌린지
래퍼 지코가 쏘아올린 ‘아무노래 챌린지’ 관련 영상의 조회수는 11월 현재 8억 건을 돌파했다. 1월 13일 ‘아무노래’가 3위(멜론 기준)로 실시간 차트에 첫 진입했을 당시 지코는 ‘아무노래’가 2020년의 메가 히트곡이 되리라고 예상했을까? 40초 남짓한 후렴을 배경음악 삼아 포인트 안무를 따라 추는 것이 ‘아무노래’ 챌린지의 전부지만 사실 그것만으로 대단하다. ‘숏폼 전쟁’이라 요약되는 올해의 디지털 문화에 발 빠르게 편승한 영리한 전략이자 짧고 인상적인 ‘밈’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Z세대의 특성을 완벽히 파악한 콘텐츠였다. 올해 사재기 논란이 한창일 때 등장한 ‘아무노래’는 챌린지의 강력한 순풍을 타고 가온 스트리밍 차트에서 8주간 1위를 기록하며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 정도면 ‘아무노래’가 올해 가요계를 완전히 평정한 셈 아닌가?
다만 #팬데믹에서 구하소서
2020년 1월 1일, 정초를 깨우는 뉴스가 흘렀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원인 불명의 폐렴 환자가 집단으로 발생해 화난 수산시장에 대대적인 폐쇄령이 떨어졌다는 전언. 재난의 서곡이었다. 1968년 홍콩독감, 2009년 신종플루 이후 인류 역사상 세 번째로 팬데믹을 소환한 전염병 ‘코로나19’는 11월 10일 현재 125만6182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올해만큼 인류의 역사는 곧 전염병의 역사와 다름없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새긴 한 해가 있을까? 감염과 방역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셧다운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됐고, 이전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음을 끌어안고 사람들은 ‘뉴노멀’을 외쳤다. 마스크가 화폐화된 시대에 “KF94 마스크 3장을 가져오면 해장국 한 그릇을 드린다”는 말은 한낱 유머가 아닌 차별화된 판매 전략으로 통했고, 해외여행 규제 속에서 여객기를 타고 국내 상공을 일주‘만’ 하는 황당한 비행 상품은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대대적인 봉쇄령에도 일상을 지속하기 위해 등장한 원격 수업, 화상 면접, 재택 근무, 무관중 경기 및 공연 등을 통해선 비대면이 더 이상 대체 수단이 아닌 현실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누가 백신을 개발해 팬데믹 종식의 벨을 울릴 것인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최상의 시나리오는 무엇인가를 예측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논하는 담론이 매일같이 잔치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아직 ‘잃어버린 2020년’이 주는 상실감이 채 가시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19 확산이 절정으로 치닫던 지난 3월,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격리 생활을 했던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아이패드로 그린 수선화 그림을 공개하며 메시지를 전했다. “그럼에도 봄은 온다는 걸 잊지 마세요.” 올해의 막을 완전히 닫기 전 되새기고 싶은 문장이다.
전염병의 세상에서 진짜 #식구(食口) 찾기
“밥 한번 먹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한국인이 가장 흔히 쓰는 관용구 둘이 재편된 2020년이었다. 안 그래도 빈말이었지만 밥 한번 같이 먹자는 말은 허언에 가까워졌다. 식당과 술집 영업이 제한됐고, 가족 외 만남을 꺼리는 것이 방역 예의범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관계에 속해 있는 활동이었다. 코로나 19 확산을 우리 사회로부터 억제하는 동안 우리가 새삼스레 깨닫게 된 사실이다. 다 먹고살기 위해 저녁식사 시간을 함께 보낼 사람을 찾았고, 그리운 누군가를 밥 한번 먹는 구실로 만나 시간과 음식을 나눴다. 나는 당신을, 먹기 위해 만난 것이 아니라 만나기 위해 먹었다. 거리 두기로 인한 일시적 관계 공백 상태는 진공 같은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졌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나온 데에는 일정 부분 관계 단절에 원인이 있고, 그 중심에 ‘밥’이 있었다고 믿는다. 어쩔 수 없이 관계 유지를 위해 가진 무심한 술자리, 직원 식당에서 동료와 뜨는 무표정한 밥 한 술, 친척 잔소리를 견디던 오랜만의 가족 모임 등 어떤 의미로도 1순위에 속하지 않았던 밥의 관계들까지 전소된 이후 고독은 잠시 동안 사회를 잡아먹었다.
내팽개쳐진 외식업계의 참상에 대해서는 짧게 나열해야겠다. 대량 해고, 단축 영업, 영업 손실, 월세 지불 및 임금 지급 지연, 폐업, 빚더미… 비참한 폐허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폐허 와중의 외식업계 분투기에 대해서도 짧게 나열해야 한다.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는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편식 시장이 빠르게 확장 중이고, 특히 배달 대행과 새벽 배송 업계의 파이는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관계가 사라진 와중에 밥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누군가와 함께 먹으러 가던 그 식당이 간편식으로, 배달 대행으로 우리 집 현관문을 노크했다. 함께 먹을 사람이라곤 가족밖에 남지 않은 우리는 어떤 의식이나 되듯이 외식의 추억을 간편식으로 곱씹곤 했다. 전쟁 후에는 출산율이 높아지고 진정한 사랑도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 희소한 인연의 기회조차 소중해지기 때문일 터다. 직장, 학교 셧다운으로 육아 전쟁에 참전한 ‘맘’과 ‘대디’들의 비명이 잦아들 즈음, 우리는 조심스레 다시 관계의 일상을 시작하려는 참이다. 마스크를 벗고 밥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안심되는, 또는 그 용기를 감수할 정도로 소중한 관계가 자연스레 추려진다. 식생활 외주화와 가족 구성 형태의 변화가 가속화하며 더 이상 가족의 의미가 식구와 동일하지 않게 된 시대에 찾아온 코로나19는 가족과 식구의 의미를 잠시 다시 합쳐놨지만, 우리는 2020년의 끄트머리에서 조심스레 밥을 나누는 관계를 잇기 시작했다. 식구(食口)의 첫 번째 뜻은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지금 시대엔 한 집에 살지 않아도 끼니를 함께 한다면 그는 당신의 식구다. 지금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 밥 한번 먹자”라고 진심으로 기꺼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 연인, 그리고 평생 시간을 함께 보내며 함께 늙어갈 관계일 것이다. 코로나19를 통과하는 동안에 우리는 관계의 폐허에서 진짜 식구를 찾아 나섰다. 글 | 이해림(푸드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