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겨울 그리고 한지민

W

배우에게 캐릭터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갈아입게 되는 계절이다. 그런데 한지민은 올 한 해 내내 조제를 껴입고 있었다. 그렇게 조제와 함께 보낸 1년 동안 말간 민낯을 바라보듯 삶을 돌아봤다.

오프숄더 니트 톱은 앤아더스토리즈, 다이아몬드가 세팅된 화이트 골드 반지는 모두 골든듀 제품.

지난 2~3년 사이 영화 <미쓰백>, 드라마 <아는 와이프> <눈이 부시게> <봄밤> 등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에 연이어 출연했다.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에서 처음으로 여우주연상도 받았고. 기분 좋은 별자리 운세를 계속 확인하는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지민 내 노력만으로 얻은 결과는 아니다. 운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혼자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늘 최선의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다. 감독님을 비롯해 배우들과 호흡이 잘 맞고, 작품을 응원할 수 있는 시대적인 흐름 같은 게 잘 맞아떨어졌을 때 내 노력도 함께 시너지를 내는 것 같다. <미쓰백> 같은 경우 예상보다 개봉이 늦어졌는데, 결국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기 적절한 시기를 얻은 셈이 다. 그런 면에서도 운이 좋았다.

올해 1월에 크랭크업한 영화 <조제>를 한 해의 끝인 12월에 만나게 됐다. 올해는 어쩌다 보니 다른 작품을 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돼서 아직도 <조제>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보통은 다음 작품에 들어가면서 앞서 한 작품을 비워내고 새로운 캐릭터로 채우는 과정을 겪는데, <조제>를 끝낸 뒤에는 한 해 동안 조제의 기분을 쭉 갖고 살아온 느낌이다. 막상 개봉을 앞두니 사뭇 긴장되고, 이런저런 복잡한 상념이 떠오른다. 사실 연기하면서도 조제라는 인물 자체가 궁금했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 그러했을까? 조제가 구축해놓은 세계로 들어가는 게 어려웠다. 조제가 표현하는 방식 안에서 어디까지가 이 사람의 진짜 마음일지, 물음표가 많은 캐릭터였다. 영화는 조제와 영석(남주혁)의 멜로에 강한 방점을 찍기보다 잔잔하게 흘러간다. 내 입장에서는 그런 포인트를 인지하고 연기했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작품이라 복잡하게 다가오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김종관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한편으론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관점이 생기기도 하니까,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도 같다.

터틀넥 풀오버와 니트 쇼츠는 돌체&가바나 제품.

<조제>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한데, 혹시 원작은 좋아했나? 본 지는 오래됐지만 내 마음속에 좋은 멜로라는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시대를 살던 내 감성과 잘 맞았다. 사실 작품을 선택할 때는 단순해진다. 그냥 어떤 배우와 같이 연기해보고 싶어서 선택한 작품도 있고. <조제>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가 조제를 표현하는 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굉장히 궁금한 세계인데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조제가 달리 움직일 거 같았다. 김종관 감독님과 작품을 해보고 싶은 이유도 컸다. 우연한 계기로 뵙고 식사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조제>와 잘 어울리는 결을 갖고 계신다고 느꼈다.

작년 겨울에 촬영했고, 올해 겨울에 개봉한다. 당신에겐 <조제>가 계속 겨울에 찾아오는 셈이다. 아무래도 여름의 <조제>는 상상하기 어렵다(웃음). 우리가 영화를 찍은 그 계절에 관객들이 본다고 생각하니까 특별한 기분이 든다.

<조제>의 첫 촬영은 2019년 10월에 스코틀랜드 로케이션으로 진행했다. 그때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크랭크업할 즈음 코로나 유행 기미가 보였다. 스코틀랜드 촬영을 먼저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

여행으로 떠난 것이 아님에도 그때가 아득한 여행처럼 느껴지겠다.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일 자체가 긴 여정이었는데, 첫 촬영을 하러 가는 것이라 조금 다른 설렘이 있었다. 거기서는 자연 풍광의 힘을 빌려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생기더라. 촬영을 끝내고 잠시 스코틀랜드를 둘러보면서도 느꼈지만, 자연이 너무 예쁜 나라였다. 한국인이 거의 없어서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사람 구경도 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정말 오래된 이야기 같다. 정말 마지막 여행지라 느껴지는 거 같기도 하고.

여행을 좋아하나? 작품이 끝나면 기분 전환을 위해 늘 여행을 갔다. 주로 언니가 있는 호주로 가는 편이었고, 가족 여행도 자주 갔다. 엄마랑 둘이서도 가고. 국내 여행도 좋아한다. 주로 자연을 보는 게 좋다.

카키색 코듀로이 소재 코트는 JW 앤더슨 제품.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집 안에 갇혀 살아가는 조제는 책을 읽고 상상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열고 진짜 세계, 진짜 감정을 알게 된다. 당신도 연기의 세계를 만난 이후 한지민 개인으로서 받은 영향도 있지 않을까? 나 역시 일하면서 많이 변한 거 같다. 어떤 부분은 고민을 덜 하는 게 낫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지나고 보면 좀 더 단순하게 선택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종종 들더라. 그런 경험치가 쌓이면서 점점 단순해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다만 사랑할 때만큼은 아닌 거 같다. 조제만큼이나 사람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진짜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한다. 아무래도 일과 사람은 좀 다른 문제니까. 물론 사랑하게 되면 후회하지 않을 만큼은 노력하는데, 시작할 때는 생각이 너무 많다, 조제처럼. 일로 만난 사람과도 마찬가지고.

조제는 신체적인 장애가 있다. 그걸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을 거 같다. 신체적 장애를 연기할 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게 생활해보지 못한 이상 어느 지점이 불편했고, 힘들었다는 얘기를 하기란 쉽지 않다. 일단 감독님이 많은 자료를 전해줬다. 하반신 장애가 있는 경우에도 움직임이 다 다르더라. 그래서 영상을 최대한 참고하면서 연습했다. 최대한 능숙해지기 위해 조제의 휠체어를 받아 집에서 계속 움직여보기도 하고. 맨 처음 바닥에서 몸을 이용해 이동할 때는 너무 아프더라. 바닥에 자꾸 뼈가 닿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과격한 액션 연기보다 더 힘들었겠다. 힘을 빼는 게 어려웠다. 나도 모르게 앉은 채로 다리를 올리려고 하다 보면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저절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고. 너무 어렵다고 느껴질 때는 감독님이 카메라를 조정해서 도와주시기도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세팅해주셨다.

검정 터틀넥 풀오버, 울과 메시 소재의 더블 페이스 미디스커트는 아크리스 제품. 펌프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혹시 올해 가장 깊게 몰입한 생각이랄 게 있을까? 잡생각이 많아서 힘든 편이다(웃음). 혼자 오래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올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릴 때부터 나를 키워주셨고, 늘 옆에 있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앞으로 살면서 이런 이별이 계속 찾아올 텐데 그걸 이겨내는 법을 너무 모른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인지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돌보고 챙기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한편으로 조제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영화에 조제가 방문을 쓱 열고 눈길이 닿는 곳에 있는 할머니를 보는 장면이 있다. 조제에게는 그 할머니라는 존재 자체가 위안이 아니었을까. 조제는 온전히 혼자 남겨져도 그 슬픔을 다 표현하지 않는 아이니까, 그걸 생각하면 울컥하게 된다.

슬픔을 잘 견디고 억누르는 사람을 보면 왠지 더 슬퍼진다. 비우지 못하고 계속 담아두는 느낌이라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슬픔을 잘 견디는 게 내 마음을 잘 돌보는 일일까. 누른다고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게 아닌데, 어느 순간에는 폭발하듯 올라올 때도 있는 법인데 내가 그때마다 알아봐주지 못하고 누르기만 하는 게 과연 좋을까. 올해 작품을 하지 않아서 내게 조제가 오래 남아 있었던 탓일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조제가 많이 떠올랐다. 내가 조제라면 잘 견딜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사실 한지민 씨는 밝고 쾌활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 아셨다. 외로운 사람이다(웃음).

칼라 장식 니트 보디슈트는 미우미우 제품.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눈이 부시게>와 <봄밤>에서 연기한 혜자나 정인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 당신에게도 그런 친구가 많나? 나이가 들수록 관계가 좁아진다. 정말 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는 거 같다. 물론 내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늘 있다. 본보기가 돼주시는 선배님, 선생님 같은 분들. 그런데 나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란 결국 서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같다. 긴말을 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는 관계. 그만큼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 사람이 내겐 고마운 사람이다.

최근 몇 년 좋은 경력을 이어가고 있는 만큼, 배우로서 높은 허들 하나를 넘었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나? 음, 배우로서는 아직 못 넘은 거 같은데?(웃음) 넘어도 넘어도 끝이 없는 거 같다. 20대 시절에는 겁도 많고 소심했는데, 다 지나고 보니 그저 인생의 한 점 같은 순간이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 기분이다. 아무리 아등바등하고 안간힘을 써도 돌아갈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 이상, 지나간 일에는 후회하지 않게 됐다. 물론 작품을 보며 아쉬움이 남을 때는 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비슷한 기회가 다시 왔을 때 어떻게 할지 대비하는 게 더 중요하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조제가 가상의 삶을 상상하는 것처럼 배우가 아닌 다른 삶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다. 배우로 사는 덕분에 이런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 여전히 생경할 때가 있다. 대학생 시절까지는 막연하게 아이도 좋아하고, 사회복지에 관심도 많으니까 유치원 선생님을 희망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까 너무 힘든 일이더라. 아이가 세 명 이상만 모여도 너무 힘든 것 같은데 과연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사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연기할 줄 몰랐다.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라는 게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모를 일이지. 지금의 나는 계속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5년 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케이프 형태의 캐멀색 롱 코트는 막스마라 제품.

<눈이 부시게>를 함께한 김혜자 씨처럼 ‘언젠가 그렇게 대단한 배우로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나? 일단 김혜자 선생님 같은 분은 될 수 없다(웃음). 함께 작품을 하는 영광을 누리고서 그 인연으로 작품이 끝난 후에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선생님을 직접 겪은 입장에서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분이 존재할 수 있나 싶다. 그냥 바른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놀랍도록 맑은 분이다. 나는 이미 때가 타서 그렇게 될 수 없다(웃음).

어쩌면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에 더 귀감을 느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과 문자 하는 것 자체가 힐링이다. 내가 너무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인데, 올해를 돌아보면 어떤가? 특별히 계획을 세우는 편은 아닌데, 고맙게도 작품과 인연이 많았던 편이다. 올해 작품을 쉰 덕분에 나를 돌아보고 챙길 수 있어서 나름 값진 한 해가 아니었나 한다. 어쨌든 작품은 꾸준히 보고 있다. 다만 조급한 마음으로 선택하고 싶진 않다. 물론 오랜만에 <조제>를 보면 다시 빨리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당신에게 2020년은 <조제>를 끝내며 시작했고, <조제>를 만나며 끝나는 한 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으로 다가가길 바라나?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조제나 영석이가 이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어딘가에 있는 느낌. 2004년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인생 멜로로 꼽는 분들이 있는 것처럼, <조제>가 2020년을 기억할 만한 겨울 멜로로 느껴지길 바라며 촬영했다. 지금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안해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없어지면 어쩌나 걱정되고 그런 감정들을 관객이 느낄 수 있길 바란다. 그냥 보이는 그대로, 영화를 느끼면 좋을 거 같다.

패션 에디터
박연경
포토그래퍼
김영준
민용준
스타일리스트
한혜연
헤어
이혜영
메이크업
전성희(제니하우스 프리모)
주니어 에디터
허예은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