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의 스툴, 10개의 태도

W

등받이와 팔걸이가 생략된 스툴은 가장 오래된 형태의 서양식 의자 디자인이다. 나아가 가구 디자이너에게 ‘빈칸’이 많은 형태의 스툴은 자신의 개성과 디자인 철학을 가장 콤팩트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로도 통한다. 지금 국내 디자인 신에서 주목해야 하는 디자이너 10팀이 그들의 대표적 스툴 디자인을 보내왔다. 10개의 스툴에서 읽은 10개의 태도를 소개한다. 

 1 Mono Stool│정그림 

 디자이너 정그림이 발견한 것은 전선이나 배관을 보호하는 용도로 쓰이던 건축 자재인 실리콘 튜브다. 건물 시공 과정에서 철저히 드러나지 않던 부자재를 가구의 주요 소재로 사용해 전면에 내세우는 시도는 그를 대표하는 ‘Mono’ 연작의 시작이었다. 자유자재로 구부러지는 물성의 실리콘 튜브는 그 자체로 디자이너에게 ‘드로잉’처럼 다가갔다. 공간을 스케치북이라 상상하고 그곳에 마치 드로잉하듯 그려 넣은 가구라는 것이 ‘Mono Stool’에 대한 설명이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생경한 디자인은 정그림의 전매특허다. ‘Mono Stool’을 디자인할 당시 정그림은 ‘어떻게 하면 단번에 기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할까?’라는 위트 있는 물음표를 품었다. 그 결과 등받이와 좌판을 과감히 생략하고, 좌판을 지지하는 네 개의 다리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꼬리’와 같은 스툴을 완성했다. 하중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철제로 프레임을 제작하고, 그 위를 동물의 털을 연상시키는 벨벳으로 뒤덮었다. 스툴이 단단히 바닥에 뿌리박고 서 있음에도 어딘가 움직이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2 Crotch Stool│티엘 디자인 스튜디오

 부부이자 동료인 디자이너 이중한, 샤를로트 테르가 2016년 설립한 ‘티엘 디자인 스튜디오’는 현재 국내 디자인 신에서 제품, 가구, 그래픽, 전시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방위로 활약 중이다. 이들은 자신의 디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재료의 물성을 이해한 바탕에서 이를 가공할 수 있는 최적의 기법을 찾는 과정, 나아가 결과물에 내재된 서사를 통해 사용자와 교감을 모색하는 것.’ 이들의 대표작이자 황동을 ‘I’자형으로 압출 성형해 제작한 ‘Joist’ 촛대는 최소한의 구조 안에서 물건이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탐구해본 일종의 디자인 실험으로 통한다. 인체의 골반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철제 스툴 ‘Crotch Stool’은 이들의 2018년 작이자 올해 7월까지 복합 문화 공간 ‘꽃술’에서 진행한 디자인 기획전 <물의 정원>에 전시한 작품이다. 종이접기를 하듯 철판을 접어 용접한 후 세 개의 파트(좌판, 두 다리)에 회전판을 적용해 각각을 연결했다.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각도로 변형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 다리를 ‘ㅅ’자로 회전하면 마치 막 걸음을 떼려는 듯한 사람의 하반신 같은 장면을 연출할 수 있어 ‘의인화된 조형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3 무제│원투차차차 

 쓰임 있는 단단한 구조를 가졌으며, 장식적 요소를 과감히 덜어내는 대신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비례. 디자이너 권의현이 이끄는 1인 스튜디오 ‘원투차차차’의 가구가 공유하는 공통된 결이다. 2017년 원투차차차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던 퀸마마마켓의 신진 디자이너 발굴 프로젝트 ‘정글징글’을 기억한다. 퀸마마마켓 1층을 무대로 압도적 규모로 들어선 식물 비치용 모듈 선반을 목격한 이들은 대번에 ‘식물이 사는 빌라’를 떠올렸다. 이후 철재와 목재를 주된 소재로 마감된 원투차차차의 가구는 올해 아트선재에서 열린 전시 <돈선필 : 포트레이트 피스트>, 북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한 유휴 공간 프로젝트 ‘북스 북스’ 등에서 발견되곤 했다. 올해 라왕 원목으로 제작한 신작 ‘무제’는 단순한 구조에 독특한 조형미를 더해줄 ‘비례’를 다각도로 적용해본 시도였다. 좌판의 폭, 등받이의 높이,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드러나는 하부 구조, 판의 두께 등은 스툴 디자인의 전형에서 교묘하게 비켜나도록 설계되어 가구가 놓인 공간에 독특한 리듬을 만든다. 

4 무위│이시산 

 ‘무위’는 자연에서 채집한 돌에서 출발한 조형 실험이다. 디자이너 이시산은 강과 산 등지에서 무작위로 채집한 자연 상태 그대로의 돌을 작업대에 나열하고, 그 가운데 선별한 돌의 형태와 크기를 기준 삼아 이를 지지하는 철판을 구성한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인 돌은 시간의 퇴적에 따라 주변 환경을 반영하며 크기와 형태, 질감이 변형되기 마련이다. 돌의 고유한 개별성을 담은 작업이기에 이시산은 ‘인위’의 반대말인 ‘무위’를 제목으로 차용한다. 원시적 돌과 가공된 스테인리스강은 하나로 완성된 스툴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병치되고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무위’는 단순한 가구를 넘어서 사유의 대상물로 나아간다. “가구라는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에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업을 하고 싶다. 소재 자체가 가진 물성이 잘 드러나도록 정제된 언어의 조형을 만들려고 노력 중이다.” 이시산이 말한다.

5 Noneloquent│임정주 

2018년부터 디자이너 임정주가 펼치고 있는 ‘Noneloquent’ 연작의 시작은 다분히 우연적이었다. 어느 날 동묘를 찾은 임정주는 주물로 만들어진 듯 ‘보이는’ 낡은 촛대를 구매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 주물이라 알고 있던 재료가 실은 화문석을 짤 때 실타래로 사용하는 고드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애초 제작자가 의도한 물건의 목적과 사용자가 이를 활용하는 방식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기능적이지 않은’이란 뜻을 가진 ‘Noneloquent’ 연작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Noneloquent’는 디자이너가 목적을 담지 않은 형태만을 제시하고, 그것이 가진 기능을 사용자가 스스로 정의하 게 만드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올해 참죽나무 에디션으로 선보인 ‘Noneloquent’는 목선반이라 불리는 목공 기계를 이용 해 제작됐다. 이는 나무를 기계에 물려 회전을 일으키고, 조각도로 회전하는 나무를 깎으며 형태를 가다듬는 방식이다. 연작 의 의도대로 스툴을 스툴의 테두리 안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1인용 커피 테이블로 사용하는 등의 상상을 해본다.

6 Fragment Series│픽트 스튜디오 

사용가치가 떨어져 폐기되기 일쑤인 소재, 현대에 들어 저평가되는 소재를 가공해 채 드러나지 못한 소재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것이 디자이너 장혜경이 이끄는 픽트 스튜디오의 전매특허다. ‘촌스럽다’는 이미지에 갇혀있던 자개를 주재료로 트레이, 코스터, 브로치 등을 디자인한 ‘Nacreplus’ 연작이 이들의 대표작. 여기서 나아가 픽트 스튜디오는 대리석 파편의 사용가치를 재조명하는 ‘Fragment’ 연작을 작년부터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 대리석 가공 과정 중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대리석 파편의 양은 하루에만 2톤가량으로, 대부분 산업 폐기물로 전락한다. 픽트 스튜디오는 천연석인 대리석이 가진 고유의 색과 패턴에 주목하며 폐기 직전의 대리석 파편을 수집하고, 이를 몰드에 넣어 레진과 함께 경화하는 작업을 거쳐 각종 가구와 오브제를 만든다. 정방형 대리석 상판 아래 십자 형태의 다리를 결합한 스툴도 ‘Fragment’ 연작의 하나다. 소재 자체의 미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형태를 간소화해 디자인했다.

7 Grapnuage│김누리 

디자이너 김누리가 전개하는 ‘Grapnuage’ 연작은 뭉쳤다가 이내 흩어지는, 자유로이 유영하는 구름의 형상을 오브제로 옮긴 것이라 번역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에 머물던 시절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움직임에서 힌트를 얻은 김누리는 ‘잡다’를 지칭하는 ‘Grap’과 구름을 뜻하는 프랑스어 ‘Nuage’를 합성해 ‘구름을 잡다’는 의미의 ‘Grapnuage’를 연작의 제목으로 삼았다. 뭉게구름을 연상시키는 올록볼록한 양감과 날카로운 직선적 표현 대신 유려한 곡선형을 추구하는 것이 김누리 작업의 특징이다. ‘Grapnuage’ 연작의 하나로 디자인한 스툴은 흙을 소재로 핸드 빌딩 기법을 적용해 완성했다. 유리와도 같은 매끈한 텍스처와 유기적인 조형성이 시선을 붙든다.

8 Paw Stool│스튜디오 학 

스튜디오 학을 이끄는 디자이너 이학민을 움직이는 것은 기묘한 세계관이 중심이 된 만화적 상상력이다. 2019년 리소 인쇄로 출간한 이학민의 일러스트레이션 북 <House of Curiosities>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던 집이 어느 날 갑자기 무중력과 기하학으로 이뤄진 초현실적 공간으로 둔갑한다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그의 책에서는 평범한 거실에 난데없이 산수 경치가 들어서고, 거대하게 몸집을 키운 성냥이 마치 플로어 램프처럼 거실 곳곳에 우뚝 서 있다. 올해부터 전개하기 시작한 이학민의 가구 연작 ‘Paw’는 ‘동물의 발을 가구로 형상화한다면?’이라는 기묘한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알루미늄을 주된 소재로 전체적 형태를 잡은 후 모래 주물 기법을 활용해 표면에 자글자글한 질감을 나타냈다. ‘Paw’ 연작은 두 발이 맞닿은 형태의 스툴과 벤치, 발 모양 알루미늄 프레임이 유리 상판을 받치고 있는 형태의 사이드 테이블로 이어진다.

9 Color Sool No.2 │전산

디자이너 전산을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던 작품은 2017년 그가 졸업 작품으로 제작해 전시한 32개의 유닛 가구 ‘설거지 차’라 할 수 있다. 야외 환경에서 음식을 위생적으로 조리하고 식기류를 세척할 수 있도록 고안한 ‘설거지 차’는 장소를 옮겨 다니며 게릴라성으로 열리는 장터의 특성에 맞추어 쉽게 조립, 해체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이후 ‘설거지 차’는 도심형 농부 시장 마르쉐@와 2017년 문화역서울 284에서 진행한 기획전 <평창의 봄>에 소개되며 국내 디자인 신에 널리 알려졌다. 단순한 형태를 띠지만 기능적이며,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독특한 비례와 톡톡 튀는 과감한 원색의 사용이 전산 디자인의 특징이다. 그를 대표하는 ‘Color Stool’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자재인 라왕 합판에 알록달록한 포마이카를 접착한 후 이들을 조립하듯 서로 맞춰 끼워 완성한 스툴 연작이다. 다양한 크기로 재단된 파트가 한데 모였기에 스툴이 놓인 자리에 생기는 독특한 그림자가 특히 매력적이다.

10 Nikes Stool│이규한 

대학 재학 시절 골판지가 부족해 방에 쌓여 있던 나이키 신발 박스를 재활용해 미니어처 스툴을 제작한 것에서 디자이너 이규한의 ‘Nikes Stool’이 시작됐다. 이규한은 버려진 나이키 신발 박스를 수집해 레고를 만들 듯 박스를 다각도로 조립하며 스툴 디자인을 그려 나간다. 이후 사람의 하중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내구성을 갖추기 위해 전체 프레임을 합판으로 제작하고, 프레임에 접착제를 도포해 알맞게 재단한 나이키 박스를 붙여 스툴을 완성한다. 채도 높은 박스 색감과 ‘스우시’ 로고 디자인이 그대로 스툴 디자인에 이식되며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피처 에디터
전여울
포토그래퍼
김필순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