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로운 세상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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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에 있어 가장 격정적인 시기로 기억될 2020년 ‘온택트’ 시대. 오늘날 패션은 과거의 한계를 뛰어넘은 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J.W. 앤더슨의 새로운 맨즈 쇼를 소개하는 디자이너 조나선 앤더슨의 모습이 담긴 영상.

J.W. 앤더슨 쇼의 단서가 되는 오브제들.

하루 24시간 동안 새로운 맨즈 컬렉션을 위해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선보인 로에베. 그 오프닝으로 쇼에 참석하는 이들의 라이브한 모습을 담았다. ‘Show in a Box’를 콘셉트로 한 로에베의 아카이브 박스와 입체적인 박스 형태의 룩북, 팝업 초대장.

매일 아침 알람을 새로 맞춘다. 일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쇼를 보기 위해서. 디지털 패션위크 기간의 스케줄 표를 챙기며 새로운 일과가 시작된다.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디지털 포맷의 쇼를 생각한 패션계의 수많은 디자이너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띈 이는 조너선 앤더슨. 이미 그는 자신의 브랜드 J.W.앤더슨의 쇼 이야기를 털어놓은 영상을 선보였다. 이것의 확장판을 다채롭게 편집한 이번 로에베 쇼의 타이틀은 클래식한 아카이브 상자에서 영감을 받은 ‘Show in a Box’. 7월 12일 일요일에 온라인을 통해 24시간 동안 펼칠 2021 S/S 남성 및 여성 프리 컬렉션을 위해 로에베는 이틀 전 프레스를 포함해 전 세계 로에베 프렌즈에게 친절한 안내서를 보냈다. 바로 M/M Paris와 협업한 특별한 상자로 그 안에는 조너선의 편지와 함께 입체적인 팝업 카드 형태의 쇼 초대장과 작은 상자 형태로 접을 수 있는 페이퍼 룩북, 영감을 담은 컬러 보드와 패브릭, 사운드트랙을 들을 수 있는 미니 레코드판 등이 마치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 있었다. 이어 인스타그램에는 전 세계에서 이 박스를 받고 기뻐하는 이들의 로에베 ‘언박싱’ 영상이 포스팅되기 시작했다.

12일 오전 10시에 Loewe.com에 접속하니 이번 프로젝트의 오프닝을 알리는 ‘The Front Row Portraits in Motion’이라는 타이틀의 영상이 플레이되었다. 익숙한 얼굴인 한국 뮤지션 지코를 비롯해 쇼에 초대된 인물들이 각자의 상황에서 로에베 맨즈 쇼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일상적인 모습이 담긴 셀프 캠 형식이 눈길을 끌었다. 이어서 로에베가 1시간 단위로 선보인 디지털 콘텐츠는 무척 풍성했다. 파인애플 백을 만든 핸드 크래프트 장인의 아틀리에에서 진행한 인터뷰, 아카이브 박스를 디자인한 M/M Paris 디자이너 듀오와의 비하인드 스토리 등은 흥미로웠다. 사실 쇼 콘셉트나 컬렉션의 메시지에 대해 듣는 건 이전 같으면 디자이너의 측근이나 인터뷰를 약속한 에디터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제 특정 정보와 경험은 빠르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디지털을 통해 누구에게나, 일상적으로.

오늘날 패션 브랜드의 새로운 콘텐츠 항목엔 가벼운 재미라는 요소가 추가된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이 배우 조시 오코너와 화상을 통해 아침 식사를 하며 대화하는 모습을 공개한 건 이러한 맥락일 듯. 또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주말을 무료하게 보낼 이들을 위한 장치도 마련했는데, 이를테면 룩 23번의 패턴을 웹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해 집에서 만드는 방법을 영상으로 공개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재능 있는 뮤지션을 모은 라인업 중 눈에 띄는 한국의 뮤지션 박지하. 피리와 생황, 양금 등 다양한 전통 악기를 다루는 그녀의 아름다운 연주는 집에서 ‘내 손안의 폰’을 통해 즐기기에 그만이었다. 유튜브 계정에서 360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들을 감상하니 눈앞에 ‘리얼한’ 세상이 펼쳐졌다.

버버리의 TB 서머 모노그램 컬렉션과 어우러진 서핑 게임.

버버리의 TB 서머 모노그램 컬렉션과 어우러진 서핑 게임.

게임 역시 디지털 세계에서 종종 활용하는 매개체가 된다. 심즈 게임에서 모스키노를 비롯한 패션 하우스의 시즌 룩을 그대로 차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온 요즘, 버버리는 새로운 TB 서머 모노그램 컬렉션을 위해 웹사이트에서 즐길 수 있는 서핑 게임을 고안했다. 이를 기념해 일부 도시에서는 서핑 게임 우승자를 추첨해 선물을 주기도.

유쾌한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로저 비비에의 인스타그램 필터 게임.

유쾌한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로저 비비에의 인스타그램 필터 게임.

유쾌한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로저 비비에의 인스타그램 필터 게임.

유쾌한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로저 비비에의 인스타그램 필터 게임.

유쾌한 일러스트가 돋보이는 로저 비비에의 인스타그램 필터 게임.

로저 비비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게라르도 펠로니는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 김용오와 협업해 파리의 거리를 가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필터 게임을 구상했다. 로저 비비에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선보인 페이스 필터 게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게임이 끝나면 캐릭터 필터로 셀피를 찍어 자신의 SNS에 포스 팅할 수 있다. 이처럼 게임을 매개로 브랜드와의 적극적인 소통은 ‘소유’를 넘어 ‘접근’을 가치로 삼는 오늘날의 비전과도 맞닿아 있다.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디지털 플랫폼으로 ‘젠더 뉴트럴’이라는 주제의 컬렉션을 선보인 런던 패션위크. 이 기간에 영국패션협회 사이트 는 디자이너들의 비하인드 신을 소개하고 데일리 하이라이트 영상을 공 유했다. 이때 내세운 해시태그는 다름 아닌 #LFWReset. “여러 의미에서 비범한 해로 기록될 2020년. 이번 런던 패션위크를 통해 우리는 듣 고, 반영하고, 소통하는 ‘리셋(Reset)’의 과정을 시작합니다. 이번 글로벌 플랫폼은 시즌과 무관하며 지금, 혹은 가까운 미래에 매장에서 만날 수 있는 젠더 뉴트럴 감성의 남성과 여성 컬렉션을 동시에 소개합니다. 이러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모두의 니즈를 충족시킬 오늘의 패션에 대한 360도 시각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영국패션협회 대표인 캐롤라인 러시의 말이다.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가 새로운 맨즈 컬레션의 티저 영상을 통해 공개한 캐릭터 모델들.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가 새로운 맨즈 컬레션의 티저 영상을 통해 공개한 캐릭터 모델들.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가 새로운 맨즈 컬레션의 티저 영상을 통해 공개한 캐릭터 모델들.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가 새로운 맨즈 컬레션의 티저 영상을 통해 공개한 캐릭터 모델들.

리셋을 통해 모두가 ‘New Era, New System’을 외치는 시대. 이제 브랜드들은 톱모델을 섭외하는 데 공을 들이지도 않는 다. WWD 7월 9일자 1면에는 루이 비통 2021 S/S 맨즈 쇼가 새로운 모델을 기용했다는 뉴스가 실렸다. 루이 비통의 버질 아블로가 애니메이션 형태의 영상을 선보이며, 액션 피규어 스타일리스트인 레지 노 우와 협업한 캐릭터를 내세운 것. 즉 만화 캐릭터인 루이 비통 갱들이 모델의 자리를 꿰차고 하우스의 심장인 아니에르 공방부 터 파리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 가상의 여행을 담은 티저 영상을 선보였다.

버추얼 모델을 통해 새로운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 랄프 루소. 그리고 디자이너의 집에 마련된 무드보드.

버추얼 모델을 통해 새로운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 랄프 루소. 그리고 디자이너의 집에 마련된 무드보드.

오늘날 실재와 가상이 섞인 혼합현실과 공존현실이라는 개념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시공간뿐 아니라 ‘진짜’와 ‘가짜’의 경계마저 허물었다. 더는 실재하느냐 아니냐, 대면이냐 비대면이냐는 논쟁은 중요하지 않 은 것. 성격과 취향, 커리어까지 갖춘 채 뮤직비디오를 찍고 디지털 토크 쇼에 나가는 대표적인 버추얼 모델인 릴 미켈라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한편 랄프&루소는 ‘COUTure’라는 타이틀의 쿠튀르 컬렉션을 위해 3D 버추얼 모델과 함께 시공간을 초월한 룩북과 영상을 제작했다. 단순한 모델을 넘어 아바타(Avatar)이자 뮤즈(Muse)라고 불리는 버추얼 모델. 책상 위 컴퓨터 하나로 그녀를 탄생시키고 오트 쿠튀르 드레스를 입혀 이국적인 배경에 배치하는 과정 역시 고스란히 영상으로 담았다. 또 브 랜드의 유튜브 계정에 있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타마라 랄프의 ‘Working from Home’ 영상에는 스튜디오가 아닌 집에서 자신의 영감과 스케치를 소개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세라믹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룩을 소개하는 벨루티의 크리스 반 아셰. 그리고 그 룩을 입은 모델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공개했다.

세라믹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룩을 소개하는 벨루티의 크리스 반 아셰. 그리고 그 룩을 입은 모델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공개했다.

디지털 공간에서 우리의 관심은 전통적인 방식의 룩이나 액세서리에 대한 소개를 넘어 변화한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소통에 있다. 이를 테면 벨루티는 파리 맨즈 디지털 패션위크 기간인 7월 9일, 공식 인스타 그램과 유튜브 디지털 채널을 통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크리스 반 아셰와 세라믹 아티스트 브라이언 로슈포트의 컬래버레이션을 알리는 프리뷰 영상을 공개했다. 크리스 반 아셰는 뉴 시즌을 위해 준비 중인 작업의 배경과 의미를 디지털 채널을 통해 밝혔으며, 더블유 코리아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캐릭터 필터를 통해 환경 및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슬로건 후디를 소개한 안드레아 크루.

캐릭터 필터를 통해 환경 및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슬로건 후디를 소개한 안드레아 크루.캐릭터 필터를 통해 환경 및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슬로건 후디를 소개한 안드레아 크루.

한편 브랜드 안드레아 크루는 디지털 패션위크를 통 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인스타그램 필터를 개발했다. 더불어 그들은 2020년에 거대한 컬렉션을 보여주는 것은 무의미하며, 지속 가능한 패션을 위해 룩은 재활용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슬로건 티셔츠를 출시하면서 아바타와 같은 캐릭터의 필터 이미지를 함께 선보였다. 주문 역시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진행할 예정임을 알리면서.

춤추는 모델들을 생동감 넘치는 영상에 담아 새로운 맨즈 컬렉션을 소개한 옴므 플리세 이세이 미야케.

춤추는 모델들을 생동감 넘치는 영상에 담아 새로운 맨즈 컬렉션을 소개한 옴므 플리세 이세이 미야케.

그런가 하면 옴므 플리세 이세이 미야케Meet Your New Self를 주제로, 댄스를 믹스한 신선한 스토리의 영상을 선보였다. 이처럼 예술과 환경적 메시 지, 춤 등을 경계 없이 풀어내며 대중에게 다가가는 시대. 이제 모두가 ‘New’라는 단어와 함께 쇼장에 국한되지 않는 더욱 다양하고 흥미로운 표현에 주목하고 있다.

프라다의 유튜브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VR 프로젝트 영상. 7월 14일에 선보인 프라다 2021 S/S 맨즈 컬렉션과 여성 리조트 컬렉션의 초대장. ‘Multiple Views’를 콘셉트로 기존과는 다른 형태로 선보일 것을 예고했다.

프라다의 유튜브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VR 프로젝트 영상. 7월 14일에 선보인 프라다 2021 S/S 맨즈 컬렉션과 여성 리조트 컬렉션의 초대장. ‘Multiple Views’를 콘셉트로 기존과는 다른 형태로 선보일 것을 예고했다.

프라다의 유튜브를 통해 감상할 수 있는 VR 프로젝트 영상. 7월 14일에 선보인 프라다 2021 S/S 맨즈 컬렉션과 여성 리조트 컬렉션의 초대장. ‘Multiple Views’를 콘셉트로 기존과는 다른 형태로 선보일 것을 예고했다.

백스테이지의 풍경을 콘셉트로 한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선보인 에르메스 2021 S/S 컬렉션.

던힐의 1980년대 저민 스트리트 매장으로 시작되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아카이브를 주제로 한 2021 S/S 컬렉션 영상.

패션은 새 시대에 적응하고 변화하며, 늘 새로운 방식의 무언가를 갈구한다. 그 과정에서 지금 우리는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세상에서 즉각적이고 드넓게 소통하는 온택트의 시대를 맞이했다. 패션쇼의 기원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고객을 위한 살롱 형태의 프라이빗 쇼가 일반적이었다. 초대된 VIP들이 번호판을 들고 나온 모델들을 보며 자신 이 구매할 의상을 점찍는, 고객과의 온전한 소통의 장이었다. 시간이 흘 러 대량 생산이 가능한 프레타포르테 시대가 열리며 프레스와 바이어를 포함하는 대규모 쇼가 시작되었다. 수십 년에 걸쳐 형식과 내용에서 발 전을 거듭해온 패션쇼는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맞아 거대한 변화에 맞닥 뜨렸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패션쇼의 형식을 송두리째 뒤 흔들었다.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 록다운 시대에 패션쇼는 새로운 궁리를 해야만 했 다. 이 시점에서 디지털 플랫폼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었고 이젠 누구나 자신의 방 안에서, 심지어 잠옷을 입은 상태로 프런 트로에 초대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새로운 쿠튀르 컬렉션을 담은 영상.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새로운 쿠튀르 컬렉션을 담은 영상.

2020 F/W 시즌 오트 쿠튀르 패션위크가 한창일 파리의 7월. 쿠튀르 하우스들 역시 디지털 플랫폼을 바탕으로 한 소통에 시선 을 돌려 다양한 영상 콘텐츠를 제작했다. 극적인 미학을 담은 쿠튀르 컬렉션은 소수 의 특권과도 같은 영역. 하지만 이번 시즌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12분짜리 디지털 쇼 케이스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했다. 그 결 과 패션 필름 속 로맨틱한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쿠튀르 드레스를 입은 모델 조안 스몰스의 모습은 몸의 움직임을 따라 나부 끼는 쿠튀르 드레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누구라도 느낄 수 있게 했다.

발맹 하우스의 아카이브 쿠튀르 룩을 입은 모델들.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크루즈 퍼포먼스를 진행한 후, 영상을 통해 공개했다.

발맹 하우스의 아카이브 쿠튀르 룩을 입은 모델들.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크루즈 퍼포먼스를 진행한 후, 영상을 통해 공개했다.

발맹 하우스의 아카이브 쿠튀르 룩을 입은 모델들.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크루즈 퍼포먼스를 진행한 후, 영상을 통해 공개했다.

쿠튀르 패션위크를 앞두고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은 파리의 록다운 종료를 축하하며 파리 센강 보트 위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벌였다. 지 난 75년간 하우스의 역사를 아로새기는 특별한 아카이브 쿠튀르 피스를 입은 모델들과 함께 낭만적인 순간을 남긴 것. 아티스트 이설트의 노래 와 함께 댄서 50명을 동원한 채, 아름다움과 희망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특별한 퍼포먼스로 진행했고 그 영상을 전 세계와 공유했다. 이전 같으 면 소수의 프라이빗한 프렌즈로 일컬어지는 셀레브리티와 인플루언서 및 주요 프레스와 고객을 초대해 선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컬렉 션을 알리고 판매하는 것을 넘어 전 인류에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지금 껏 하이패션계에 존재해온 높은 벽을 허물었다.

사진가 닉 나이트와의 디지털 협업을 예고한 발렌티노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 티저 영상.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피에르파올로 피촐리가 선택한 디지털 의 한 수는? 바로 디지털 작업의 선두에 서 있는 세계적인 사진가 닉 나이트와의 협업. 그는 이미 오트 쿠튀르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 메종의 숙련 된 아이디어를 디지털적인 측면에서 풀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프로 젝트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에 기획한 아이디어로, 인류와 디지털 세계 를 통합해 우리가 살고 있는 한계를 초월한 ‘유대’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7 월 21일 로마에서 진행될 독점 라이브 퍼포먼스를 앞두고 협업의 첫 결과물로 공개한 ‘Of Grace and Light’라는 주제의 몽환적인 티저 영상은 앞으로 펼쳐질 특별한 라이브 퍼포먼스를 기대하게 했다. 그리고 피에르 파올로는 이번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해 되짚으며, ‘휴마니타스 (Humanitas)’의 가치를 역설했다. “라이브로 진행되는 이번 컬렉션은 사 람과 디지털 터치가 함께 어우러져 조화로운 대화를 끌어내고, 그들 중 누구도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보여줄 겁니다. 어떠한 디 지털 효과도 인간의 존엄성을 대체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 결과는 창의 성, 상상력 및 감정과 같은 쿠튀르 내면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으로 드러 날 테고요.”

오트 쿠튀르의 세계를 동화적인 터치의 매혹적인 필름으로 구상한 디올.

오트 쿠튀르의 세계를 동화적인 터치의 매혹적인 필름으로 구상한 디올.

오트 쿠튀르의 세계를 동화적인 터치의 매혹적인 필름으로 구상한 디올.

7월 6일,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오트 쿠튀르 드레스 뿐 아니 라 파리 몽테뉴 30번지에 위치한 디올 메종을 축소해 트렁크에 담아냈 다. 즉 미니어처 마네킹과 디올 쿠튀르 드레스가 든 마법 같은 트렁크의 여정이라는 흥미로운 스토리를 패션 필름으로 풀어낸 것. 신비한 숲에서 만난 매혹적인 님프에게 트렁크 안의 쿠튀르 드레스를 하나하나 매치하 며, 디올의 새로운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시적으로 흘러간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쇼장이 아니어도 쿠튀르가 안겨주는 판타지와 특별한 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 채널을 통해 새로운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키 룩 영상을 선보인 샤넬.

한편 샤넬의 버지니 비아르 역시 영상을 통한 오트 쿠튀 르 디지털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였는데, 메인 영상 하나와 대표적인 키룩 을 담은 5개 영상이 SNS를 통해 공개되며 새로운 컬렉션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스키아파렐리의 새로운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소개하기 위해 공원에서 스케치하는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은 대니얼 로즈베리.

스키아파렐리의 새로운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소개하기 위해 공원에서 스케치하는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은 대니얼 로즈베리.

한편 스키아파렐리의 대니얼 로즈베리는 마스크를 한 채, 파리의 한 공 원을 찾아 새로운 쿠튀르 컬렉션을 스케치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소개했 다. 순간 1년 전, 그의 스키아파렐리 데뷔 쇼가 떠올랐다. 쇼장 한가운데 에 놓인 책상에 헤드폰을 쓴 채 앉아 스케치에 열중하던 그. 전통적인 방식의 스케치에 유난히 애정을 쏟는 대니얼이지만 그 모습을 소통하는 방식은 아틀리에나 쇼장을 넘어 공원의 벤치 혹은 온라인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일이라는 걸 보여주었다. 나아가 유서 깊은 쿠튀르 하우스인 스키아파렐리는 얼마 전 하우스 역사상 최초로 일부 선별된 오브제를 판매하는 온라인 숍을 오픈하기도 했 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가치 있는 소비자들 에게 ‘더욱 즉각적인’ 방식으로 엘사 스키아 파렐리의 콘셉추얼한 상상력과 과감한 비전을 나누고 싶었다”고 밝혔다.

서울 거리를 배경으로 한 영상으로 새로운 2021 S/S 컬렉션을 발표한 준지.

과거에는 오감을 자극하는, 보는 것 이상 의 전율을 안겨주는 쇼가 있었다. 쇼장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쇼 이상의 쇼. 그곳에 온 이들의 옷차림을 살피며, 공기를 느끼며, 이번 쇼가 잘될 것이라고 점치는 예 언자 같은 패션 에디터들의 감식안이 작용하 던 시대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콘텐 츠는 요즘의 바이브를 통해 좀 더 캐주얼해지 고 이해하기 쉬워졌다. 특정인이 아닌 모든 이들과 실시간 소통하는 콘텐츠로 쇼를 구성하는 시대, SNS는 국경을 넘어 공공의 미학을 전파한다. 심지어 쿠튀르조차도 공공의 패션으로 나아가는 시대에 디지털 플랫폼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패러다임까지 완전히 새롭게 조형한다. 그렇 다면 패션을 통해 폭넓게 소통하는 시대를 자명하게 인지하고, 그 힘을 선한 영향력을 위해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몇 달 사이 우리는 디지 털 플랫폼을 활용한 패션의 새로운 움직임이 전 세계적인 팬데믹 블루의 우울함을 달래는 데에 따스한 포옹처럼 작용할 수 있음을 여기저기서 확 인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모두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누군가 ‘럭셔리’란 걱정이 없는 편안한 상태에서의 즐거움이라고 했다. 그것은 단순히 돈의 값어치에 국한되지 않는, 정신적인 가치를 위해서도 공유되 어야만 한다. 코로나 팬데믹 직후, 발렌티노의 피에르파올로 피촐리는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ChezMaisonValentino라는 해시태그 타이틀로 라이브 공연 시리즈를 선보이며 커뮤니티의 유대감을 고취하고, 브랜드 가 추구하는 포용성의 가치를 드높였다.

자선 기금 모금을 위해 뮤지션들과 함께 #Stellafest를 기획한 스텔라 매카트니. 브랜드 인스타그램에서 함께 한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자선 기금 모금을 위해 뮤지션들과 함께 #Stellafest를 기획한 스텔라 매카트니. 브랜드 인스타그램에서 함께 한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한편 최근 이슈가 된 #Stellafest 는 스텔라 매카트니가 주최하는 채러티를 위한 디지털 뮤직 페스티벌. 세계적인 가수들의 공연과 아티스트가 직접 참여하는 자선 경매를 온라 인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페스티벌로, 그 수익금은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돕는 자선 단체에 기부된다. 이는 온택트에 선한 영향력을 더했을 때, 얼마나 파워풀한 힘이 결집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에필로그라고 명명한 새로운 크루즈 컬렉션을 색다른 방식으로 선보이는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보낸 초대장.

에필로그라고 명명한 새로운 크루즈 컬렉션을 색다른 방식으로 선보이는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보낸 초대장.

오래된 관행으로부터 벗어나겠다고 선언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미켈레. 그는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되는 밀란 디지털 패션위크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며 ‘캐주얼 게더링(Casual Gathering)’을 기획했다. 국가별로 프라이빗한 시청각 시간을 제안한 것으로 프레스 등 일부를 모아 쇼 관련 영상을 함께 즐기는 시간을 마련했다. 기존의 컬렉 션 캘린더를 버리고 1년에 두 번, 나만의 ‘호흡’과 ‘언어’로 컬렉션을 선보 이겠다고 선포한 그. 지난 2월 밀란에서 선보인 F/W 컬렉션에 이은 새로운 크루즈 컬렉션을 지난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 ‘에필로그’로 명명하기 도 했다. 일상 속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놀라운 순간을 콘셉트로 전 세계 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에 접속해 감상하게 될 구찌 에필로그는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지, 나아가 앞으로 완전히 새롭게 자신만의 컬렉션 을 선보일 그의 비전이 기대된다. 이처럼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통해 #StayCreative를 외치는 패션의 노력이야말로 오늘날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 AI가 인간을 따라 올 수 없는 것은 새로운 환경에서 도출해내는 상상력이라고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움과 상상력에 있다. 이러한 유의미한 시도를 위해 패 션은 오늘도 꿈을 꾸며 진화한다.

패션 에디터
박연경
사진
HYUNWOO JANG, COURTESY OF GUCCI, PRADA, LOEWE, CHANEL, DIOR, VALENTINO, HERMES, ROGER VIVIER, DUNHILL, J.W. ANDERSON, BURBERRY, LOUIS VUITTON, RALPH & RUSSO, BERLUTI, ANDREA CREWS, ISSEY MIYAKE, GIAMBATTISTA BALLI, BALMAIN, SCHIAPARELLI, JUUN.J, STELLA MCCART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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