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실컷 써온 화장품 용기들이 이제 내 몸속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다 쓴 화장품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나만 해도 몰랐다. 성가심을 참고 미끈거리는 병 내부를 닦아낸 뒤 플라스틱 분리 배출함에 신경 써서 버린 크림통이라면, 어디선가 깨끗하게 다시 태어나 새 주인을 만났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여러 믿을 만한 보고에 따르면 우리가 버린 화장품은 쓰레기로 지구 어딘가를 떠돌 확률이 98%에 이른다.
2016년 <세계경제포럼>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지금까지 생산된 플라스틱 포장재 중 재활용 비율은 14%뿐이고 쓰레기로 처리되거나 결과가 불분명한 경우는 86%였다. 특히 14%의 재활용 쓰레기 중 제대로 재활용된 사례는 단 2%에 불과했고, 재활용 과정에서 버려지는 게 4%, 질이 낮은 플라스틱으로 다운 사이클링된 경우가 8%라고 한다. 재활용되지 않은 쓰레기 86% 중 40%는 매립됐고, 14%는 소각됐으며, 32% 는 지구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그 일부는 우리의 몸속으로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지난 100년간 900억 톤의 플라스틱이 사용되었고, 1분마다 쓰레기차 한 대 분량의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데, 플라스틱 생수병 하나가 분해되기까지는 약 450년이 걸린다.
플라스틱은 왜 이렇게 재활용이 어려운 걸까? 환경 운동가 고금숙의 저서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에 따르면 같은 피끼리만 수혈할 수 있듯, 플라스틱은 같은 소재끼리 묶여야만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은 약 70종인데 일단 이 중 10여 종만 재활용 선별장에서 처리된다. 재활용이 가능한 페트(PET)병만 모았다고 할지라도 성형 방법이 다른 것끼리 섞이면 소용이 없고, 여기에 다른 재질이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 지금 화장품 뒷면을 돌려보자. 일단 재질이 무엇인지 쓰여 있지 않아 구분이 불가능한 것이 대부분이다. 아마 포장 상자에 쓰여 있었겠지만 우린 사자마자 버렸다. 그나마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캡과 펌프와 용기가 모두 다른 소재임이 아주 작은 글씨로 명시되어 있다. 화장품 용기로 많이 사용되는 글리콜변 성 PETPETG도 페트에 속하지만 재활용이 아예 안 되는 재질이다. 그에 반해 유리는 많이 사용되는 소다석회 유리 중 무색, 갈색, 녹색 세 가지 유리병은 재활용이 되고, 색만 동일하게 맞추면 된다. 오호라 그럼 유리로 갈아타면 될까? 난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유리라 하더라도 라벨을 떼어 내는 형식이 아니라 몸체에 직접 글씨가 인쇄된 유리병(이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도 마찬가지)은 재활용 등급 중 ‘어려움’에 들어간다. 거울이 붙어 있는 쿠션 팩트, 솔과 고무 패킹 등으로 구성된 마스카라처럼 여러 소재의 부품으로 구성된 색조 제품에 이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이 모든 난관을 클리어하고 새롭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제품이 몇 개나 될까? 이 쯤 되면 그냥 화장품은 조용히 종량제 봉투 속에 넣는 게 낫겠다 싶다. 손톱이 아프도록 라벨을 떼었는데 그 모든 게 소용 없는 짓이었다니! 애초에 플라스틱은 재활용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고, 특히 화장품 용기는 재활용 면에서 최악의 물건 중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소비한 나의 책임일까, 아니면 이런 제품을 무분별하게 만든 기업의 책임일까, 이 모든 관리를 소홀히 한 정부 책임일까?
우울한 얘기만 잔뜩 늘어놨지만 나는 이 기사를 우울하게 끝낼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이 기사를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이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고, 그건 곧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프리를 위해 덜 소비하기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없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로 인해 2030년까지 탄소 배출을 2010년 대비 45%까지 급격하게 줄여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대기과학자 조천호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속도와 크기로 대전환 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재활용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사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덜 소비하는 것이다. 플라스틱 재활용을 늘리기보다 플라스틱을 덜 사고 덜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광고가 실리고, 해마다 새로운 유행을 소개하고, 아름다운 제품을 선별해 더 아름답게 소개하는 패션 매거진과는 좀 모순되는 얘기일지 몰라도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우리는 당신이 쓸모없는 많은 것을 사기보다 꼭 필요한 것을 실패 없이 사길 바란다. 그러나 가끔 그 점을 잊고 흥분해서 ‘너무 예뻐’를 남발하며 독자들이 결국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라고 느끼게 하지 않았나, 이달 내내 수많은 환경 서적을 읽으며 반성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에디터들이 그러할 것이다. 매거진의 영향력에 힘입어 당신이 알아야 할 정보를 전달하고, 수 많은 뷰티 제품 중 당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그렇게 당신이 선택한 화장품이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길, 지구에 최소한의 영 향을 끼치며 생산되길, 이미 산 것은 끝까지 알뜰하게 다 쓰길, 그리고 그 쓰레기조차 환경을 오염하지 않길, 그리고 당신 같은 소비자들에게 영향받아 좀 더 나은 지구가 되도록 기업들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길 바란다.
재사용은 남의 나라의 일일까
이미 산 제품은 재활용보다 재사용(Reuse)할 수 있으면 훨씬 좋다. 과거 사용되던 우유병을 생각하면 된다. 용기를 기업에서 다시 회수하고 세척해 재사용하는 ‘서울우유’ 유리병을 뉴트로를 추종하는 요즘 세대라면 알고 있을까? 빈 병 보증금이 붙은 맥주병과 소주병도 좋은 예다. 병을 부수고 깨서 새 유리병을 만드는 공정 없이, 세척 및 소독해서 재사용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재사용은 재활용보다 훨씬 쉽고 에너지를 덜 소비하며, 쓰레기도 덜 만든다.
화장품 용기 재사용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먼일처럼 느껴지지만 해외 사례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Pfree.com에서 찾은 엘렌맥아더 재단(Ellen MacArthur Foundation)의 <2019 재사용 보고서> 중 이미용 분야의 재사용 사례가 눈길을 끈다. 미국의 스타트업 기업 ‘휴먼카이드’는 알약형 구강청 결제처럼 일회용 플라스틱 프리 개인 위생용품을 판매하며, 정기 이용자에게는 리필 용기에 담아 배송해준다. 필리핀의 시범 사업 ‘올띵쓰 헤어 리필러리’는 대형 마트에서 선실크, 도브 등의 샴푸나 린스를 자기 용기에 리필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네덜란드, 미국, 프랑스, 영국에서는 유니레버에서 만든 고체 알약 치약을 재사용 용기에 공급하며, 프랑스 브랜드 코지에서는 335곳 매장에서 화장품을 기존 용기에 리필해 구입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내 화장품법상 당장은 어려운 얘기겠지만, 신중하게 고려해볼만한 대안 아닌가?
시스템을 바꾸는 게 가장 빠르다
사무실 안에서는 머그잔을 활용하지만 밖에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할 때 텀블러 챙기는 건 아직도 습관이 되지 않았다. 그 날도 그렇게 종이컵을 들고 오면서 패배감에 시달렸다. ‘허구한 날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기사를 쓰면서 말이지!’ 그날 밤 마라톤을 소재로 한 예능에서 마라톤에 참여한 수백 명의 시민이 구간마다 준비된 물을 마시고 던져버리는 수많은 플라스틱 컵을 목도했다. 컵 하나 쓰고 괴로워할 게 아니라 저런 시스템을 바꿔야 진짜 바뀌는 게 아닐까? 물론 우리 개개인이 컵 하나에 연연하는 그 감수성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바로 거기서 시작되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린피스의 윌 맥컬럼은 이렇게 말한다. “기업은 사후 처리 계획 없이 한 번 쓰고 버려질 플라스틱 포장재를 과도하게 생산하고 있고, 정치인은 기업에 충분한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당신이 사는 지역의 재활용 제도가 슈퍼마켓 플라스틱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그린피스의 해양운동가 루이스 에지를 비롯해 대부분의 환경 운동가들이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한 여러 노력 중 가장 효과가 좋고 빠른 방법은 정부의 ‘규제’라고 말한다. 영국 전역에서 비닐봉투는 5펜스에 유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지 1년 만에 해변에서 발견되는 비닐봉투가 40% 감소했으며, 대형마트 체인인 웨이트 로즈가 플라스틱 면봉 판매를 중단한 것만으로 약 21톤의 플라스틱 생산이 감소한 것으로 추산한다. 좋은 소식은 우리나라도 지난해부터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환경부)’에 따라 재활용 등급제가 시행되고 있다 는 것이다. 재활용이 어려운 녹색 페트병에 담긴 스프라이트, 칠성사이다 등이 모두 무색 페트병으로 갈아탄 이유는 정말 ‘투명해지고 싶어서’라기보단 재활용 ‘어려움’ 등급을 받을 경우 환경부담금 30%를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애초에 재활용 불가능한 생산을 막아 우리의 번거로움과 고뇌를 덜게 됐다. 역시 이 등급제에서 꼴등 할 것이 뻔한 화장품 업계가 2년의 유예기간 사이에 용기를 교체하지 않는다면 다시 그 비용은 소비자 부담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벌써 코스맥스는 용기 업체 이너 보틀과 함께 플라스틱 보틀 안에 풍선 모양의 실리콘 주머니가 들어가 내용물이 용기에 닿지 않게 만든 새로운 용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클린’, ‘친환경’의 가치를 유독 사랑하는 많은 뷰티 브랜드들이 적극적으로 용기를 개선해야 할 시점이다. 규제는 저절로 생기지 않고 기업은 알아서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 당신이 즐겨 쓰는 브랜드가 있다면 재사용, 재활용이 가능한 용기를 만들도록 메일을 쓰거나 매장에 요청하자. 포장재를 줄이고 보다 친환경 패키지를 선호한다고 의사를 표현하고 실제 그런 기업의 제품을 사자. 많은 이들이 플라스틱 공해가 인류가 지난 반세기 동안 무분별하게 행동해서 일어난 문제이고,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구찌에서 더는 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있기까지 수많은 동물보호단체에서 목소리를 내왔고, 많은 보도를 통해 사람들은 모피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 결과 세상이 조금 바뀌었다. 우리는 결코 무력하지 않다.
조금 나은 소비
개별 용기로 된 제품을 사는 것보다는 리필 제품을 사는 게 낫다. 액체로 된 샴푸보다는 플라스틱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고체 샴푸를 쓴다면 더 좋을 거다. 비닐보다는 종이 소재가 낫고 재활용된 종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하나하나 조금 더 나은 소비를 생각해보자.
1.L’occitane 시어버터 바디 샤워 오일 리필 500ml, 4만7천원. 대용량 리필 제품은 가볍기 때문에 운송 과정에서 탄소 배출을 줄인다. 많은 브랜드에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용량 리필을 더는 선보이고 있지 않지만, 이 제품은 여전히 나오고 있다. 포장을 최소화한 대용량 리필 제품으로 패키지는 100% 재활용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2.Clean 리저브 컬렉션 블렌드 웜 코튼 EDP 50ml, 7만9천원. 공정무역으로 수확된 지속 가능한 원료로 만들어진 향수 컬렉션. FSC 인증받은 재활용 가능 지류로 만들어진 상자, 재활용 가능한 유리병, 환경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벌목된 오크나무 캡, 독성 없는 소이 잉크 라벨로 만들어졌다.
3.Sioris 메이크 잇 브라이트, 시트 마스크 25g, 1만5천원. 제철 원료 수확 원칙에 따라 전라남도 광양에서 자란 유기농 매실을 73% 담았다. 시트는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유래한 텐셀 시트로, 패키지는 비닐이 아닌 2중 종이를 사용했다.
4.Chantecaille 허밍버드 콰르텟(웜) 2g, 10만6천원. 샹테카이 메이크업 제품에 사용되는 다채로운 펄감의 피그먼트는 미세 플라스틱 글리터가 아닌 ‘마이카’에서 유래됐다. 마이카는 운모로 불리는 광석에서 추출한 피그먼트로, 인도에선 불법 광산에서 어린이를 포함한 노동자를 착취해 비윤리적 방법으로 생산된 것으로 문제가 되었다. 샹테카이는 책임감 있고 지속 가능한 마이카 소싱과 인도 아동 노동의 근절을 위한 ‘리스폰서블 마이카 이니셔티브’에 회원으로 가입해 안전성과 윤리성을 검증한 마이카만을 활용한다.
5.Hersteller 허스텔러 리틀 드롭스 글로우 시럽 15ml, 2만6천원. 허스텔러는 모든 제품에 동물성 원료를 넣지 않으며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다. 제품 포장 박스는 옥수수를 가공하고 남은 잔여물로 만든 종이를 활용했으며, FSC(산림관리협의회, 산림 자원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실천하는 산림 경영자와 거기서 생산된 목재 제품에만 인증한다) 인증을 받았다.
6.Aesop 패브릭 주머니 일회용 쇼핑백을 대신하는 패브릭 주머니는 이솝의 상징이다. 제품 운송에 사용되는 갈색 종이 박스는 100% 재활용 파이버 보드로 만들며 인쇄물은 콩기름 잉크로 제작된다. 시약병에서 모티프를 얻은 갈색 유리병 용기 역시 50% 재활용 원료로 만들어진다. 물론 당신이 에코백을 가지고 다니며 이 주머니도 거절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7.Hourglass 컨페션 울트라 슬림 립스틱 0.9g, 4만5천원. ‘럭셔리’와 ‘비건’을 모토로 창립된 브랜드 아워글래스는 2020년까지 전 제품 100% 비건화를 목표로 한다. 이 립스틱은 전 성분 100% 비건 성분일 뿐 아니라 리필도 가능하다.
- 뷰티 에디터
- 이현정
- 포토그래퍼
- 박종하
-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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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