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장식성과 몽상가의 낭만주의, 업사이클링에 기반한 현실성이 공존하는 2020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 10.
Dior 여성의 주체성과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정신을 고찰해온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이번 시즌엔 출생 및 창조 이미지에 관한 대규모 공동 미술 설치 작품으로 유명한 미국 페미니스트 예술가, 주디 시카고의 주제 의식을 발전시켰다. 쇼가 열리는 로댕 박물관에 설치한 출산을 주제로 한 작품, ‘여신상(Female Divine)’ 은 생명 탄생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돌아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런웨이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비전을 담아 낸 깃발로 장식한 점도 인상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여성 의 의복을 연상시키는 튜닉 페플로스와 드레이핑 기법은 현대적인 이브닝드레스로 거듭났고, 보디라인을 따 라 우아하게 흐르는 플리츠 실크 드레스, 룩에 리듬감을 주는 찰랑이는 프린즈 드레스 등은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을 찬미하는 의상 같았다. 한편 남성복에 주로 사용하 는 하운즈투스와 헤링본은 턱시도 형태로 변형된 스커트와 팬츠에 적용되어 구조적인 실루엣을 완성했다. 아테네의 시대성을 반영한 듯한 골드와 브론즈 컬러 팔레트와 황금빛 밀이삭 장식은 런웨이를 은은한 반짝임으로 물들였다.
Givenchy 디자이너 클레어 웨이트 켈러가 보내는 사랑의 편지는 어떻게 쓰여질까. ‘러브 레터’를 주제로 한 이번 시즌엔 18명의 오케스트라 연주도 쿠튀르 스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잔잔하게 이어지다가 피날레에 폭발하듯 강렬했던 합주는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하는 듯했으니까. 그녀는 계절의 흐름과 환경, 삶의 메타포인 정원은 늘 영감의 대상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20 S/S 쿠튀르 쇼에서는 지방시의 터치를 담은 호화로운 정원이 만개했다. 드레스에는 자수와 브로케이드, 진주로 만든 아이리스와 팬지, 안개꽃 등이 활짝 피었고, 물결치는 바이올렛 티어드 드레스와 케이프는 팬지의 강렬함을 드러냈으며, 입체적으로 장식한 메탈 프린지와 실버 스팽글로 밤의 정원에 반짝이는 불빛을 표현하기도 했다. 밀푀유처럼 얇은 층을 겹겹이 올린 드레스의 모자와 낙하산을 연상케 하는 엠파이어 드레스, 오간자 자수와 기퓌르 레이스 등등 쿠튀리에의 손맛이 담긴 섬세한 장식의 향연이 이어졌다. 카이아 거버가 입은 순백색의 화이트 가든으로 표현된 피날레 드레스는 동화 속 판타지 웨딩을 꿈꾸기에 충분했다.
Valentino 매 시즌 가장 화려한 라인업으로 쇼의 웅장함과 독보적인 미학을 보여주는 발렌티노의 피에르 파올로 피촐리. 스텔라 테넌트의 오프닝으로 시작해 마리아카를라 보스코스, 카렌 엘슨, 이리나 샤크, 비토리아 세레티, 한국 모델 트리오 최소라, 신현지, 배윤영, 그리고 아두트 아케치의 피날레까지 이어졌다. 이번 시즌 깊이 감춰진 감정의 자유로운 흐름을 탐험했다는 그는 머메이드 실루엣과 커다랗게 굽이치는 러플, 낭만적인 보 장식, 산호처럼 보이는 거대한 헤드피스, 장식성을 더하는 깃털 주얼리로 주제를 표현했다. 뮤지션 안토니 앤 더 존슨의 ‘Everything is New’와 현악기 연주로 새로움을 더한 ‘Crazy in Love’는 쇼에 감동과 드라마를 더한다. “꿈은 미스터리자 잠재의식의 결과죠. 쿠튀르는 꿈 자체입니다.” 피촐리는 깨고 싶지 않는 꿈에서 자신만의 오트 쿠튀르 세계를 그려가고 있었다.
Jean Paul Gaultier 이번 쿠튀르 컬렉션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니콜라 제스키에르와 빅터 앤 롤프, 이자벨 마랑, 크리스찬 루부탱, 파코 라반, 드리스 반 노튼 등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의 마지막 쇼를 보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패션쇼와 퍼포먼스를 합친 캣워크 쇼에 일가견이 있는 그는 티에리 뮈글러 이래 가장 위대한 쇼맨임을 입증하듯 황홀한 쇼를 선물했다. 50년 동안 쌓아 올린 아카이브 컬렉션을 재활용한 2백30여 벌의 숫자만으로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엔 돈이 없어서 물건을 재활용했죠.” 빈티지 넥타이와 패브릭을 패치워크 하거나 옷의 일부를 아플리케한 장식, 코르셋과 원형 뿔 가슴, 블루 & 화이트 스트라이프, 마린 룩과 골격만 있는 구조적인 형태의 스커트 등등이 화려한 만찬처럼 펼쳐졌다. 성별과 연령, 민족을 넘나들며 성 정체성과 금기에 저항해온 그의 철학과 상상력과 유머, 휴머니즘은 패션사에 오래도록 기억되지 않을까.
Aganovich 듀오 디자이너 나나 아가노비치와 브룩 테일러가 이끄는 아가노비치는 일본 에로티시즘 문학의 대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에세이에 담긴 미학을 참조해 컬렉션을 구상했다. 그들의 상징이 된 얼굴을 감싼 신비한 룩은 이번 시즌 오간자와 가면, 새틴, 주얼 장식 등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흑백 구성의 컬러 팔레트 사이로 배치한 레드 포인트와 매듭 장식 로프 디테일, 진주와 샹들리에 크리스털, 장미와 그래픽적인 손 장식은 기이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배경음악 없이 런웨이를 가득 채운 적막은 신비한 그들의 캐릭터를 더욱 부각시킨 효과적인 장치였다.
Giambattista Valli “럭셔리 패션계는 일반에 문턱이 너무 높은 측면 이 있죠. 대중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짧은 런웨이로는 보여줄 수 없는 오트 쿠튀르의 섬세한 기술을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시즌에 이어 전시 형태로 쿠튀르 컬렉션을 공개한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주드 폼 국립 미술관으로 관객을 초대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사교계를 풍미한 재클린 케네디와 리 라지윌, 마렐라 아넬리가 입은 복식에서 출발했다. 레몬 정원, 장미, 핑크 등으로 표현한 튜닉, 봉긋한 튤 뷔스티에, 깃털을 장식한 두건과 마스크, 부풀리고 과장된 형태의 아플리케 드레스 등은 우아하고 세련된 여인의 옷장을 펼쳐놓은 듯했다. 광각 앵글로 촬영한 이미지는 어빙 펜과 리처드 애버 던에 대한 경의를 담은 것이라고. “후디와 조깅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입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이제 일상에서도 미학적으로 갖춰 입기를 원한다.” 최고의 것으로 공간을 채우고자 했다는 그의 의도처럼 다음 시즌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전시로 선보지 않을까.
Maison Margiela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형광빛 핑크방으로 초대한 갈리아노는 쿠튀르 라인인 마르지엘라의 아티즈널 컬렉션을 구상하며 산업혁명 시대의 부르주아적인 태도와 영향에 대해 탐구했다. 어깨를 드러내서 입는 코트, 팔을 덮은 스톨, 작은 트위드 재킷, 벨티드 트렌치코트, 느슨하게 장식한 리본, 프린트 스카프 등에서 의복의 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트위드, 부클레, 울, 니트 등 조직이 단단한 직물과 새틴, 시폰, 튤 같은 투명하고 섬세한 소재의 대비도 눈에 띈다. 특히 과일과 채소를 조합한 헤드피스, 브로치, 커프링크스 등 은 모두 빈티지 장신구와 부품을 활용해 쇼의 테마인 업사이클링의 가치를 반영했다. 브랜드의 타비 시리즈와 리복의 퓨리 스니커즈를 결합한 슈즈는 기술력과 창의성을 결합한 하우스의 첫 컬래버레이션 작품이었다.
Iris van Herpen 서커스 공연장이라는 장소만으로 쇼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이리스 판 헤르펀. 식물과 깃털, 화석, 지느러미, 거품, 사운드 등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녀는 심해 속 ‘감각의 바다(Sensory Sea)’로 빠져들었다. F/W에 이어 쇼엔 선 유일한 한국 모델 이정문은 어둠 속에서 나온 레이저 컷 블랙 가죽 코르셋을 장착한 가운으로 이번 시즌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특히 얇게 재단한 패브릭을 여러 겹 겹쳐 룩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진화된 3D 커팅 기법은 손을 휘젓거나 움직일 때 입체적인 율동감을 더 했다. 해양 생물을 닮은 유선형 실루엣과 비늘을 프린트한 장식은 수중에서 진동하는 음파를 연상시켰다. 일본 슈즈 브랜드 트리펜과의 작업으로 탄생한 게다 형태의 플랫폼 슈즈도 눈길을 끌었다.
Viktor & Rolf 5년 만에 다시 남성 컬렉션으로 돌아온 빅터&롤프. 맨즈 이후 바로 이어진 쿠튀르에서 그들은 남은 패브릭 조각을 컬렉션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답을 ‘패치워크’에서 찾았다. 재활용과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메시지는 자투리 천을 붙이고 장식들로 완성한 페전트 드레스와 브로케이드 장식 플로럴 드레스, 흑백 레이스와 퀼트, 크로셰를 조합한 맥시 드레스, 망토와 같은 목가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끈적 끈적한 은박지 모자와 멜리사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젤리 슈즈와 가방 역시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이라 고. “성공이 우리의 최종은 아닙니다.” 모델의 팔과 목, 얼굴에 문신으로 새겨진 ‘Dream, Love, Peace, Flower..’ 레터는 우리의 삶은 꿈이자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몽상가적 기질을 드러낸다.
Schiaparelli 하우스에 합류한 후 두 번째 쇼를 선보인 디자이너 대니얼 로즈베리는 이번 시즌 ‘Double Fantasy’라는 테마로 쿠튀르 패션위크의 문을 열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의 스케치와 아카이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그는 낮과 밤이라는 야누스적 세계의 판타지를 의상에 녹였다. 그래서일까. 오프닝에 등장한 검은색 실크 슈트를 시작으로 네이비 팬츠 슈트와 트렌치코트, 실크 셔츠 룩 등 데이타임에 꿈꾸는 오트 쿠튀르 룩이 쏟아져나왔다. 특히 중요한 장식으로 활용된 화려한 금속 주얼 스톤과 크리스털은 액세서리는 물론 옷을 장식하고 피부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후반부로 가면서 등장한 페티코트를 넣어 부풀린 드레스와 과장된 소매 등은 룩에 드라마를 더했다. 피날레에 쏟아진 꽃잎은 쿠튀르 컬렉션을 여는 아침을 녹이는 낭만적인 장치임이 분명했다.
- 패션 에디터
- 이예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