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넘치는 소년의 눈빛, 전위적인 어른의 애티튜드, 우아한 오라를 지닌 대체 불가능한 배우 유아인. 클래식과 파격적인 시도를 지향하는 버버리(Burberry)의 이상과 그는 무척 닮았다.
첫 질문은 이거다. ‘꺼리는 질문이 있나요?’ 글쎄. ‘가장’, ‘최고’가 들어가는 질문은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최고라고 생각하는 뮤지션은?’ 이런 것. 나는 ‘가장’이라는 무엇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어서(웃음).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라던데, 정말인가 그냥 겸손하게 하는 소리인가? 딱 보면 느껴지지 않나? 겸손이라니, 그런 말을 겸손함으로 한다면 그건 좀 재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럼 유아인이 사용하는 넓은 스펙트럼의 어휘와 정연한 문장력은 어디서 비롯된 건가? 최근에는 미술 전문지에 기고도 했더라. 지적 열등감에서 오는 허위적 어휘랄까?(웃음) 나는 그저 글로 내 목소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좋아한다. 글쓰기 방식을 궁금해하는 거라면, 어떤 감정이 있을 때 그걸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적절한 단어와 내 마음의 형체를 찾는 과정이 내 글쓰기다. 왜, 혹시 내가 누군가의 문체와 비슷한 데가 있다거나 그런가?
그저 당신이 글 써서 밥 벌어먹고 사는 사람보다 더 잘 쓰는 것 같아 하는 말이다. 사람이 자기 마음이나 머릿속에 있는 걸 얼마나 잘 전달하느냐는 소통의 문제이기도 한데, 자신을 참 잘 꺼내놓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머릿속에 있는 걸 꺼내놓는 것 같지는 않다. 마음, 심상, 감성 같은 것을 풀어놓는다.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는 TV를 본다거나 하면서 지울 수 있지만, 마음에 있는 건 그렇지가 않으니까 털어내려고. 그래서 내 글이 ‘느낌’이 있는 글일 수는 있고, 잘 썼다거나 누군가에게 맞춰 잘 전달되는 글인지는 모르겠다. 남의 연기를 많이 보면 클리셰를 내 연기에 욱여넣는 경우가 생긴다. 글도 비슷 하지 않을까 해서 남의 걸 많이 안 봤는데, 요즘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제 책을 좀 접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느끼고 떠오르는 것을 글로 풀어내고 산다면, 유아인에겐 연기와 글이라는 굵직한 두 표현 방식이 있는 셈이다. 그 표현이 자신을 끄집어내는 과정이라고 볼 때 연기와 글에 비슷한 데가 있나?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 둘은 좀 다른 문제다. 연기는 거의 대부분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다. 글은 나의 가장 솔직하고도 사적인 거울 같다. 우울감에 빠졌다거나 힘들고 괴롭다는 친구들에게 글 좀 한번 써보라고 권한다. 이거 중요한 이야기 같다(웃음). 정신과에 가든 점집에 가든 결국 자기 이야길 털어놔야 한다. 그럴 때 뻔한 카테고리의 답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많을뿐더러, 누가 치유해주고 말고 할 게 아니라 결국 내가 내 마음의 숙제를 풀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우선 글이나 말로 표현해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글은 남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으니까.
최근 마무리한 영화 두 편이 올해 개봉한다. 작품 정보가 거의 알려 지지 않았는데, 우선 유재명 배우와 출연한 <소리도 없이>는 어떤 영화인가? 할 수 없이 범죄자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살아가는 인물을 맡았다. 신인 감독 홍의정이라는 작가의 탄생을 지켜봐주길 바란다. 얼마나 놀랍고, 심지어 재밌기까지 한지.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이야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가 흐르는 가운데 실험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역할을 위해 살을 10kg 불렸다, 현재는 다시 슬림해졌지만. 감독님은 더 찌우길 바라셨다. 큰 몸이 자아내는 어떤 느낌이 있어서, 조금 더 몸을 키웠어도 좋았을 것 같다. 다소 한 방향으로 소비된 유아인이라는 배우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면에서도 효과가 있겠고.
박신혜와 출연한 좀비 영화는 아직 제목이 미정이다. 좀비라니, 그런 본격 장르물은 처음 아닌가? 처음이다.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내가 지금껏 했던 캐릭터 중 가장 편안한 모습이다. 예전에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를 할 때쯤 풀어보려고 했던 캐릭터인데… 어쨌든 게이머로 등장한다. 장르물이니 스릴러 요소를 극대화하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고 인간관계를 조명하는 의미도 담겼다.
유아인 출연작 중에서 내가 가장 으뜸으로 꼽는 건 드라마 <밀회>다. 얼마 전 휴가 때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봤는데, 정성주 작가의 내공과 모두의 연기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여서 무릎 꿇고 시청해야 할 것 같았다. <밀회>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 취향에 딱 꽂힌 작품이라고 할까? 감탄과 근사함을 느낀다. 사실 혜원(김희애)이라는 여자를 일깨우는, 그 역할을 보좌하는 인물인데 내가 좀 더 나아간 부분이 있다. ‘심각한 자기화’는 내 연기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연기하면서 어떨 때는 무아지경이 되어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러나? 에이, 그건 시간이 쌓이고 경력이 늘면 무조건 알게 될 수밖에 없지. 그냥 어떤 괴물적인 순간이 있다. 인물들이 나를 만들고, 내가 그 인물들을 만들고, 내 욕망을 완전히 반영하면서 한풀이처럼 되는…. 캐릭터에게 요구되는 것 이상으로 표현하면서 그걸 합리화하는 나의 연기 방식이 있다(웃음). 나를 캐스팅하는 분들이 아주 전형적인 역할을 구현하기 위해 나를 찾지는 않으니까. 예를 들어 이준익 감독님 같은 경우는 <사도>를 찍으면서 아예 내가 어디까지 에너지를 팽창시키는지, 어떤 충돌을 만드는지 보자는 심정이었을 거다.
연기할 때면 자연인 엄홍식의 자아나 당신의 그 모든 사유는 지워지는 기분을 느끼나? 얼마 전 <더블유>와 인터뷰한 릴리 로즈 뎁 말로는, 셀렙 부모님이 평생 시달리는 걸 보면서도 비슷한 길을 택한 이유가 바로 촬영 현장에서 자아가 사라지는 점 때문이라고 하더라. 몰입과 동시에 현실의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라고. 자아가 지워지는 걸 느낄 때도 있지만, 나이 들수록 나를 잘 다루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진짜 목숨을 바쳐서 연기했다. 이제는 목숨 걸더라도 걸 만한 가치가 있을 때 걸자는 거지(웃음). 그런 가치 판단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과거보다 좀 더 일하는 요령을 찾은 셈인가? 그냥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됐다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다. 대부분의 시간은 내가 뭘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연기를 한 듯하다. 연기란 뭘까, 잘하는 연기와 좋은 연기란 뭘까… 그런 것에 대한 답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그저 매번 그 순간 내가 내릴 수 있는 결과들에 도달했을 뿐이다. 혹은 답을 안다고 착각한 적도 있고.
당신 정도면 투잡족 아닌가? 스튜디오 콘크리트가 생긴 지 5년인데 그간 개인전과 협력전 등을 합해 전시만 36회 치렀고, 다양한 기업과 협업도 했다. ‘신진 작가 발굴, 예술의 대중화, 창작자 간의 네트 워크 확대’ 등등이라는 애초 목표를 충실히 이행해왔다. 이거 정말 투잡이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연기만큼 아주 몸에 착 붙는 것도 없다. 배우로서 풀어야 할 숙제는 계속 가져가는 거지만, 나에게 이만큼 편의를 주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사회에서는 보통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더 큰 수입을 내는 쪽을 메인잡이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나는 배우 일로 돈 벌면서 시간은 스튜디오 콘크리트 활동 쪽에 거의 다 할애하는 듯하다(웃음).
지난 연말에 기자들은 이런 인사로 시작하는 긴 메일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배우 유아인으로 활동 중인 스튜디오 콘크리트의 창립자 엄홍식입니다.’ 초가치 예술 실험 작업인 ‘1111’ 발표를 알리는 소식이었다. 스튜디오 콘크리트를 통해 내 개인적인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뤘다. 그래도 스튜디오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지속 가능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계속 이어가는 중인데, 사업이라는 건 뭔가를 만들어 팔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월급 받는 직원이 있고, 그러니 우리는 수익을 내야 하고, 뭐가 팔릴지는 알겠는데 그걸 왜 만들어 팔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애플 정신처럼 고객의 성향과 니즈를 분석해 그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내자! 이런 마인드를 오히려 지우려는 과정에서 ‘1111’이 구체화됐다. 이건 뭘 만들어서 파는 일이 아니라 교환을 제안하는 프로젝트다.
작품을 금전 판매가 아닌 가치 있는 무엇과 교환해보자는 취지의 프로젝트다. concrete1111 닷컴에 접속해보니 이 프로젝트 실행의 시작이 되는 스튜디오 콘크리트 소속 권철화 작가의 작품, 그 밖에 ‘1111’ 작업자들의 기증품 등이 소개돼 있고, 작품 각각에 ‘교환희망서’ 작성란이 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을 골라,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뭔가로 어필하면 되나? 그렇다. 창작품, 소장품, 특허, 아이디어나 기획, 노동력 등 유무형의 모든 것이 이 교환의 장에 내놓는 ‘작품’이 될 수 있다. 올해 어느 시점까지 공모를 받고, 교환이 이루어지면 각자의 것을 가져가면 된다. 여기서 스튜디오 콘크리트 측이 선택한 것은 우리끼리 사유화하지 않고 다시 한번 대중을 향해서 교환 물품으로 제시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많은 이들의 참여와 교환을 통해 그것들이 끊임없이 순환하기를, 순환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생기면서 스스로 팽창해가는 생명체가 되기를 바란다.
스튜디오 콘크리트가 선택한 다양한 작품을 예술 박람회 형식으로 공개하는 때가 11월 11일이다. 그 자리에 가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크고 작은 뭔가가 있을 거고,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있을 수도 있겠다. 실행에 있어서 손도 많이 갈 이런 프로젝트를 꾀한 이유는 뭔가? 나는 고고하고 우아한 예술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다. ‘예술이 뭔지 모르겠어요’ 같은 소리를 우리 모두가 하고 사니까, 궁극적으로는 ‘당신도 뭔가를 표현할 수 있다’, ‘당신도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재밌고 멋진 것 하나 만들어보겠다는 문제가 아니라, 나와 스튜디오 콘크리트가 추구하는 형태를 통해 점점 많은 이들이 함께 놀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면 좋겠다.
권철화의 그림과 더불어 곧 concrete1111 닷컴에 올라올 최초의 거래 물권 중 유아인이 가진 법인사업자 소유의 건축물도 있다. 부동산을 거래 물품으로 내놓다니, 감이 안 잡히는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거기 살 이들과 어떤 일을 도모할 수도 있고, 일정 시기가 지나면 의결권을 행사해서 매각한 다음 그 판매 수익금을 공유할 수도 있고. 다양한 방법이 있다. 사실 나도 아직 여러 갈등과 혼란이 있다. 이를테면 부동산을 교환가치로 내놓으며 보다 많은 이들이 매력을 느낄 이점을 고민하다가도, 내가 지금 보고 싶은 건 어떤 가치에 도전하는 누군가의 깜냥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판이 어떻게 돌아갈지, 나를 이 혼란 속에 몰아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스스로 실험실의 쥐가 돼보자는 의도는 애초부터 있었다.
당신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휘젓고 싶다거나 혼란을 주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것 역시 실험을 즐기는 자의 태도였나? 내가 그럴 수 있다고 증명받고 싶은, 나름의 귀여운 욕망의 표현이다(웃음).
귀여운 몸부림? 인정 욕구가 큰가? 귀여운 몸부림. 귀엽다는 말이 반드시 붙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뭘 그렇게까지 검증받아야 해?(웃음) 그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진동하는 삶을 살고 싶다. 내가 예전과 좀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내가 순간순간 만들어내는 에너지보다 그것을 컨트롤하고, 지휘하고, 수많은 ‘나’를 관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를 관장하는 나를 느낄 때면, 좀 더 중추적인 내가 있다고 자각할 때면, 찔끔찔끔 성장하고 있구나 싶기도 하다.
‘나를 느끼는 나’라니, 그런 ‘느낌적 느낌’을 통해 성숙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나? 성숙해지고 싶다 생각한 적은 없다. 신나서, 힘이 막 뻗쳐서 하는 일은 그냥 하면 된다. 문제는 그것들이 만드는 결과를 책임지고 감당할 때는 엄청난 끈기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 안다는 점이다. 스튜디오 콘크리트 리더로 지내다 보니, 요즘 성장통 같은 걸 겪나 싶다. 최근 이런 일이 있었다. 나를 통해 삶의 희망을 가지고 뭔가를 찾던 새로운 친구가 있었는데, 필요한 타이밍에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힘들어하더라. ‘왜 나한테 희망을 줬어!’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은 일, 떳떳한 일, 사랑하는 일만으로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경험으로 조금씩 알다 보니 그 과정에서 성장통을 느끼나 보다. 내가 원래는 위로라는 걸 좀 우습게 여겼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게 조금 비난받을지언정, 값싼 위로나 날리는 것보다는 필요한 일을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누구에게 뭐가 필요한지 내가 정확히 모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 누군가에게 당장 필요한 게 위로라면, 나는 표현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위로도 좀 다르게 하고 싶다. 환상적인 체험을 하게 만드는 것도 위로가 될 수 있고. 환상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던 나였는데 말이다.
일을 시작한 이래, 엄홍식이 스타 유아인이 되고 나서 결핍이나 열등감이 좀 채워졌거나 옅어진 부분도 있나? 열등감은 채워지지 않는다. 옅어지지도 않아, 오히려 더 커지면 커졌지.
하지만 성취감을 느낀 시간은 좀 있겠지? 대부분의 성취감은 열등감과 함께 온다. 열등감을 만드는 성취에 대한 욕망은 또 다른 열등감을 빚게 돼 있다. 열등감은 지워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걸 얼마나 동력으로 사용하느냐의 문제다. 귀엽게 누리면 좋겠지.
그럼 마무리는 귀엽고 예쁘게 한번 해보자. 유아인이 지금의 유아인을 칭찬한다면? ‘오늘은 분명 인터뷰 간단히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이렇게 또 한참 말하고 있구나. 아까부터 배도 고프고 고양이 데리러 가고 싶었는데 그래도 인터뷰를 끝까지 해냈다. 오늘도 나는 큰 무례를 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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