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디자이너, 사진가, 스타일리스트. 한 사람 앞에 붙는 수식어다.
어른들은 종종 하나에만 지독하게 몰두하여 깊게 파고 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다그치곤 한다. 하지만 시절은 흐르고, 시대가 변하며, 모든 것은 달라지고 있다. 급격한 속도로 변화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오직 하나만 파고 들면 살아 남을 확률은 더욱 희박해지게 됐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깊게 파고 들어야만 진정한 인정을 받게 되는 시절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런 추세는 격렬한 변동에서 엄청난 쾌감을 얻는 패션계에서 더욱 극명하게 두드러지고 있다. 디자이너이면서 동시에 모델도 하고, 사진도 촬영하면서 옷도 입히는, 그야말로 ‘멀티 플레이어(Multiplayer)’가 패션의 새로운 흐름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스테파노 필라티가 있다. 제냐 하우스를 떠난 뒤 좀처럼 패션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몇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무대 위였다. 패션계를 떠난 뒤 한동안 베를린의 하위 문화에 심취해 매일 클럽에서 마시고 취했던 그는 GmbH의 첫 컬렉션을 위해 모델로서 직접 무대 위에 올랐다. 이후 ‘랜덤 아이덴티티’라 이름 붙은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은 그는 여전히 무대 위에 스스로를 등장시킨다. 그것도 자신이 만든 옷 중 가장 곱고 아름다운 것을 스스로에게 걸친 채로 말이다.
직접 모델로 나서는 사진가도 있다. 여성을 외설적인 대상으로 표현하는 일에 대해 혐오하며 오히려 전혀 다른 시선으로 여성에게 접근하는 사진가인 할리 위어는 그녀 스스로를 자주 곳곳에 노출시킨다. <젠틀 우먼>이나 <도큐먼트> 등 여러 매거진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일을 서슴지 않더니 최근엔 쿠레주의 캠페인에 자신의 얼굴을 대놓고 드러냈는데, 얼굴 전체에 가부키스러운 메이크업을 한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반대로 에디터에서 시작해 카메라를 손에 든 이도 있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진가, 스티비 댄스는 원래 <러쉬> 매거진의 에디터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게 됐다. 본인이 기획한 화보에, 직접 옷을 입히고 사진까지 촬영하니 결과는 당연히 경이로울 수 밖에 없었을 터. 그녀는 이제 <팝> 매거진의 커버를 전담하는 저명한 사진가가 됐다. 물론 옷도 잘 입히는 스타일리스트이자 비주얼 에디터라는 직함도 더불어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엔 유르겐 텔러가 있다. 온갖 매거진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상업성 짙은 광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습을 아주 자랑스럽게 등장시킨다. 좀처럼 모델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한 그 태도에서 괴짜스러운 영화 감독 우디 앨런이 연상된다. 최근엔 키코 코스타디노브의 캠페인의 주인공이 됐다. 그에 대한 더 이상의 어떤 설명도 필요한가? 가장 동시대적인 브랜드의 이런 행보에서 ‘멀티 플레이어’가 새로운 계절을 위한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됨을 알 수 있다.
- 프리랜스 에디터
- 김선영
- 사진
- Instagram @gmbh_official @pittiumo_official @courreges @stevie_dance @kikikostadin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