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라는 신조어를 일상복처럼 장착했던 모델, 뭇 남성들이 찢어진 데님과 야상 차림으로 낡은 컨버스를 욱여 신게 만든 빈티지계의 문익점, 10년이라는 공백기 동안 입을 닫았던 남자. 명백히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중인 배정남이 비로소 연기로 자신을 보여줄 날이 왔다.
영화 <미스터 주(Mr. Zoo)>가 곧 개봉한다. 또 다른 영화 <오케이 마담> 촬영은 얼마 전에 끝났고, 지금은 <영웅> 촬영 중이다. 2019년 초까지 <미스터 주>를 찍었다. 끝나자마 자 5월부터 <오케이 마담>에, 9월부터는 <영웅> 촬영에 들어갔다. 틈틈이 예능, 광고, 화보 촬영을 했고, 패션위크 기간에는 런웨이까지 걸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쉬지를 못했네. 영화 때문에 여행도 못 가고.
<미스터 주>에서 맡은 역할, 어떤 캐릭터인가? 부모님의 힘으로 국정원에 들어간 낙하산 요원이다. 열정은 넘치는데 허당기가 있어 하는 일마다 민폐를 끼치는 역할. 근데 항상 진지하다.
배정남이 배정남을 연기한 것 같은데? 살짝 비슷하다. 화보 촬영을 하거나 연기할 때는 뭔가에 꽂힌 듯 푹 몰입하는 타입이다. 빨리 끝내는 거 좋아하고, 단순무식한 느낌도 있고(웃음).
촬영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여름에 촬영했는데, 보조 출연자와 스태프들이 열사병으로 쓰러졌다. 그 정도로 폭염이었다. 그렇게 땀을 흘렸던 이유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웃음).
그동안 영화 <시체가 돌아왔다>, <베를린>, <보안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등에서 얼굴을 비췄지만 대사가 많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비중이 제법 큰 역할이다. 그렇다. 비중이 크고, 대사도 많다. 사실 그동안 연기로 뭘 보여준 게 없었는데 이 영화를 계기로 ‘아, 이놈이 인제 연기도 좀 하네’라는 말을 듣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번에는 시사회에 사람들을 많이 초대해도 덜 민망하겠지. 400명 정도 초대할 생각이다.
배정남의 연기를 보며 늘 궁금했다. 원래 대사가 없는 건지, 편집으로 줄어든 건지. 애초에 분량이 없는 편이었다. 모델 출신이라는 선입견도 있고 배우로서 인지도도 없었으니까. 아무 말 없이 서 있거나 말을 하더라도 “네”, “알겠습니다” 식의 단답형이 많았고.
그런 짧은 대사도 연습을 하고 현장에 가나? 조금은 하고 간다. 하지만 원래 연습을 많이 하는 타입이 아니다. 말하자면 현장 체질인데,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면 목소리 톤도 확 바뀌고 완전 몰입해서 빠져든다. 현장 분위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오늘 화보 촬영하는 모습을 보니 눈빛이 달라지더라. 그렇게 집중한 뒤에 집에 가서 뻗는다. 게다가 오늘 상체 탈의를 해야 한대서 아침에 운동도 2시간이나 하고 왔다. 아, 피곤하다. 아니, 다들 왜 이렇게 나를 벗기려고 하는 거야?(웃음)
<미스터 주>는 배우 이성민이 동물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영화 설정처럼 동물의 언어를 들을 수 있다면 어떤 대화를 해보고 싶은가? 반려견 벨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 동물은 말을 하지 못하니, 아파도 티가 안 나거든.
벨은 정남에게 뭐라고 말할까? “먹을 거 좀 주소” 하겠지. 먹을 걸 워낙 좋아하니까(웃음).
소문난 애견인이다. 벨은 정남에게 어떤 존재인가? 가족. 집에 들어가면 유일하게 반겨주는 식구. 든든하고 안정감을 주는 버팀목. 개를 키우려면 엄청 부지런해야 한다. 지금도 하루에 두 번씩 산책한다. 전날 과음해도 아침에 꼭 나가서 산책을 시킨다. 비가 내려도 개 전용 우비를 입히고 같이 남산에 오른다. 내가 못하면 ‘춘뽕’이라는 시바견을 키우는 친구에게 부탁하고.
운동을 오래 했으니 액션을 잘할 것 같다. 코믹, 멜로, 액션, 스릴러 중 당신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장르는 뭘까? 코믹한 액션. 진지한 역할도 해보고 싶지만 난 코믹이 잘 어울린다. <럭키>의 유해진 선배 같은 역할이면 좋겠다. 거기에 액션이 많으면 더할 나위 없고.
모델로서 런웨이에 서는 것, 화보 촬영을 하는 것, 배우로서 연기를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나? 연기할 때는 망가져도 좋다. ‘멋’보다는 인간 배정남이고 싶다. 그래서 울고 짜고 난리 법석을 떨며 코믹한 분장도 한다. 근데 런웨이나 화보 촬영은 마음가짐이 다르다. 멋져야 한다. “봐라. 내 걷는다. 한번 보이소!” 이런 게 있지.
카메라 울렁증은 없나? 처음 런웨이에 섰을 때는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눈앞이 캄캄했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를 볼 줄 몰랐으니 시선 처리도 어색하고 어떻게 하면 사진이 잘 나오는지도 몰랐다. 지금은 뭐 그런 게 전혀 없지, 광고도 많이 찍었는데(웃음). 벌써 18년 차다.
영화판의 센 사람들 사이에서 기에 눌리거나 주눅이 든 적은 없나? 모델 활동을 안 했다면 눌렸겠지만, 더 센 사람들이랑 예능도 해봤는데 뭐. 내 주변에 워낙 센 사람이 많다. 류승범 형보다 센 사람이 있으려나(웃음)? 영화를 연달아 찍었는데 매번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촬영하는 내내 행복했다. 스트레스를 받은 적도 없고.
지금까지 이성민, 류승범, 이병헌, 조진웅, 김성균, 김서형 등 다양한 연기파 배우들과 같이 작업했다. 가장 영향을 끼친 배우가 있다면? 이성민 선배. 연기를 떠나 인생 선배로 배울 점이 많고 든든한 기둥 같은 느낌이다. 무려 열다섯 살 차이가 나는데 이제는 가족 같다. 형님도 정말 고생 많이 하셨지. 뒤늦게 잘된 케이스인데,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변하는 사람이 많잖나. 형님은 올라갈 수록 베푸는 사람이다. 가끔 시원하게 회식시켜주면서 사기를 북돋는 모습이 멋지다. 나도 잘되면 그럴 거다.
‘이성민 라인’을 탄 건가? 라인보다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다. 어릴 때부터 류승범 형, 강동원 형도 알고 지냈는데 다 라인이게?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서로 소개시켜주고 싶은데 세 사람의 성향이 완전 달라서 어려울 것 같다. 나니까 그 모두와 잘 맞는 거다(웃음).
넷이 영화 한 편 찍어도 제법 괜찮은 작품 하나가 나올 듯하다. 오, 좋은데? 뭔가 홍콩 누아르 느낌이면 정말 좋겠다. 성민 형님이랑 동원 형이 착한 역할을 맡고 나랑 승범 형이 건달을 하면 되겠다. 강동원, 류승범, 이성민 붙으면 투자자도 바로 모일 테고. 괜찮을 것 같은데?
유난히 ‘형님!’이란 단어를 많이 쓴다. 과연 배정남은 동생들에게 어떤 형님일지 궁금하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촬영하면서 변요한과 친해졌다. 술도 자주 먹는데 그 친구가 착해서 그런지 다 받아준다. 동생들에게는 털털한 편이다. 그렇다고 살가운 스타일은 아닌, 딱 경상도 남자. 폼 잡거나 허세를 부리는 편은 아니다. 물론 만나면 술은 내가 다 산다(웃음).
맞다, ‘배정남’ 하면 상남자, 의리, 진국 등의 이미지가 있다. 모름지기 사람은 의리가 있어야 한다. 잘되면 잘될 수록 베풀어야 하고. 그래서 요즘 돈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동안 얻어먹은 게 많으니까(웃음).
혹시 돈 빌려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지 않나? 많다. 아닌 걸 알면서도 거절을 못하겠더라. 아예 안 받을 생각으로 빌려줄 때도 있는데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그렇게까지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면 단칼에 자를 텐데, 좋은 사람이거나 도움을 받은 경우는 그게 어렵다. 일단 돈을 빌려주면 그냥 믿고 기다리는 편이다. 안 갚고 모른 척하면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지.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연예계 대표 인맥 부자다. 비결이 뭔가? 안부 연락을 자주 하나? 술자리가 많은가? 안부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은 아니다. 어차피 안 볼 건데 안부를 묻는 것도 웃기고(웃음). 그렇다고 내내 연락 없다가 명절에만 연락하는 사람이 되긴 싫고. 그래서 만날 사람만 만나고, 만났을 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2002년에 데뷔하여 벌써 20년 가까이 서울 생활을 했는데, 아직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다. 사투리 고치는 거, 안 되더라. 몇 번 시도는 해봤는데 영 어색하다. 나 같은 놈도 있어야지 뭐. 다 고칠 수 있나? 그리고 이제 표준어를 쓴다 한들 보는 사람이 더 불편할걸(웃음)?
어렸을 때는 미술에 소질이 있었다는 인터뷰를 봤다. 요즘도 그림을 그리나? 좋아했지. 지금은 안 그린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유화를 배워서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한때 빈티지 유화에 꽂혀서 18세기 작품, 200년 된 그림을 경매에서 사기도 했다. 그만큼 오리지널 빈티지를 좋아한다. 가짜는 안 좋아해(웃음).
질풍노도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안 느껴진다. 성격이 변한 건가? 옛날에는 급하고 초조했다. 쉽게 욱하는 다혈질이었다. 모델을 하다가 바닥을 친 적도 있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느꼈다. 인생을 배운 셈이다.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 풍파를 겪고 나이도 먹었고, 무엇보다 뭘 해도 잘되고 있으니까(웃음).
‘바닥을 쳤던 휴식기’. 그때는 뭘 하며 살았나? ‘레이건’, ‘분트’라는 온라인 쇼핑몰을 했다. 그때 잘됐지. 고향 친 구들 몇몇에게 “같이 하자 마. 내가 밥은 먹여줄게!” 외치며 서울로 불러들이기도 했으니까. 그때 쇼핑몰을 하면서 찍은 사진을 봤는데 무려 1000벌이 넘는 옷을 입었더라.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던 시기였는데 지금은 다 접었다. 신경 쓸 게 많아서 다른 걸 할 수가 없다. 이젠 연기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
긴 휴식기를 거쳐, 다시 배정남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계기는 뭘까? 시초는 2017년 4월, 영화 <보안관> 개봉을 앞두고 출연한 MBC <라디오 스타>다. 그다음 <무한도전>에서 연락이 왔고, <보안관>도 잘됐다. 이후 <미운 우리 새끼>, <스페인 하숙> 등에 출연하면서 점차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영석, 김태호, 유호진 등 대한민국에서 최고라고 불리는 PD를 모두 만났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왜 PD와 작가들이 배정남을 좋아할까? 나 같은 포지션이 없어서? 독보적인 캐릭터라서? 모델이 연기, 예능까지 하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 심지어 찍으면 잘 나오기도 하고(웃음).
2019년은 당신에게 어떤 해였다고 정리할 수 있나? 행복했다. 좋은 사람, 좋은 작품을 만났다. 분수에 넘치는 한 해를 보냈다. 2020년에는 그동안 촬영한 영화들이 개봉한다. 한 단계 성장하는 시기니 자만하지 않으려고. 주변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지.
37세 배정남이 생각하는 ‘멋’의 의미는? 여자도 남자도 의리겠지. 외유내강. 속이 꽉 찬 사람이 멋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옆집 사는 형님 같은 이미지, 친근감 있고 구수한 느낌. 나는 망가져도 대미지가 없으니까.
- 패션 에디터
-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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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한빛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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