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메로 벤투노(N°21)의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델라쿠아 인터뷰.
미학적 시선으로 여성과 패션을 탐해온 누메로 벤투노(N°21)의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델라쿠아 (Alessandro Dell’Acqua)와 서울에서 만났다. 수더분한 성격의 그가 이탈리아어로 자주 꺼낸 단어 ‘센수알리티’, 즉 관능을 주제로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눴다는 건 그의 내면에 특별한 시선이 있다는 뜻이다.
서울 첫 방문이라 들었다. 좀 전까지 청담동 일대(인터뷰 장소인 누메로 벤투노 플래그십이 위치한)를 돌아다녔다고. 요즘 한국 패션 신에 대한 세계의 시선이 뜨겁다. 서울 청담동이 그 중심이다 보니, 주변 분위기가 궁금했다. (어땠나?) 유럽보다 훨씬 모던하고 트렌디하다.
서울에선 누메로 벤투노 로고 티셔츠와 스웨트셔츠가 인기다. 서울 방문은 어떻게 결정하게 됐나? 서울 플래그십 스토어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다. 우리 브랜드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기도 하고.
최근 2020 S/S 컬렉션 얘기부터 짚어보자. 컬렉션 전반부를 지배한 꽃무늬 프린트는 당신 컬렉션에 간혹 등장하던 호피, 체크 다음으로 많이 등장한 시즌 같다. 슈트의 슬릿도 인상적이었고. 어떤 것을 말하고자 했나? 꽃무늬는 1970년대경의 입생로랑 프린트에서 영감을 얻었다. 슬릿이나 지퍼는 살갗을 노출시키면서 관능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센슈얼함과 로맨틱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다.
2019 F/W 컬렉션은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드레스드 투 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보긴 했지만, 오래된 영화라 트레일러만 다시 봤더니 컬렉션의 누드, 빨강, 검정 위주의 컬러 팔레트와 무드가 헬무트 뉴튼(관음적 시선으로 유명한 슈퍼 포토그래퍼) 사진 속 여자들을 연상시키더라. 잘 알고 있겠지만, 헬무트 뉴튼과 나는 향수 캠페인 작업을 함께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영원한 아이콘과도 같은 존재다. 아, 슬릿에 대해 덧붙이자면 영화 중 칼을 쓰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커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당시 백스테이지에서 ‘섹시한 상황(The Sexiness Situation)’에 대해 탐구했다고 밝혔더라. 남녀의 시선이 오가는 와중에도 옷을 입는 여성의 의도에 따라 남성의 시선을 유도하거나, 거부하거나를 보여주는 걸까. 여성의 의지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패션적 장치가 흥미롭다. 보기에는 아주 간결한 디자인이지만 지퍼를 여는 것으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것을 생각했다. 코트 뒷면의 지퍼를 열어서 어깨를 내리는 등 코트를 드레시하게 연출할 수 있듯 상반되는 실루엣과 애티튜드를 표현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일석이조다.
그렇다면 계속 언급되는 단어 ‘관능’은 언제부터 탐미한 것인가? 아주 소년이었을 때부터. 돌이켜보면 더운 이탈리아 남부 지방 여성들이 내 디자인적 욕망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검고 우아한 레이스 드레스, 햇볕에 그을린 슬립 차림의 여인들. 이는 지금도 즐겨 보는 1950년대 이탈리아 신사실주의 영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영화적 서사와 캐릭터를 컬렉션에 녹여내는 것은 당신 작업에서 무척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컬렉션을 영화 미장센처럼 컬렉션을 연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가장 이상향에 가까운 현대 여성은 누구인가? 1960년대를 풍미한 이탈리아의 고전 여배우 모니카 비티, 그리고 케이트 모스, 샤를로트 갱스부르 같은 시대의 아이콘이 된 모델들. 그들의 동시대적 애티튜드를 섞는 것이 이상적이다.
현시대 가장 각광받는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인 수잔 퀠러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녀와 일하는 것은 어떤가? 지금 서너 시즌째 손발을 맞추고 있다. 사실은 예전부터 그녀와 일하고 싶었는데, 연락이 닿은 것은 인스타그램 DM이다(웃음). 그녀가 내 브랜드의 유전자와 정신에 대해 가진 이해도가 높아서 함께 일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남성복을 전개한 지 5년 정도 되었다. 여성복과 어떻게 다른가? 사실 여성복보다 남성복을 디자인하는 데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린다. 비즈니스를 안착시키는 데도 신경을 많이 썼다. 현재는 유럽보다 아시아에서 반응이 더 좋은 듯하다.
스트리트 웨어의 위상도 사뭇 달라지지 않았나. 남성복을 디자인할 때 어디에 중점을 두나? 물론 나 역시도 그 변화를 인지하고 있다. 전통적인 테일러링의 가치도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에 타협점을 잘 찾으려 한다.
당신은 누메로 벤투노와 로샤스를 병행하고 있고, 타 브랜드와 협업도 진행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디지털 세상의 속도일까? 비결이 있나? 특별한 비결은 없다. 다만, 아침 일찍 일어나고, 빨리 잠자리에 드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모든 일을 나의 잘 조직된 디자인 팀과 함께하는데, 굳이 비결을 꼽자면 프로젝트에 맞게 태도와 마음가짐을 빨리 전환하는 것? 또, 토즈(이탤리언 클래식 하우스)와의 협업은 아주 다른 성격의 브랜드이기 때문에 재밌었다.
패션계 전반적으로 디자이너 교체가 많이 이루어졌다. 혹시 당신의 마음을 흔든 뉴 네임이 있나? 원래 사카이의 아베 치토세, 생로랑의 안토니 바카렐로의 팬이었지만 최근에는 마린 세르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도 디자이너 인터뷰 때마다 물어보는 질문이다. 전 세계적인 화두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마린 세르는 업사이클링 패션의 선두주자다)? 당연히 관심을 갖고 있다. 누메로 벤투노도 많은 부분 리얼 퍼를 에코 퍼로 대체했다. 다만 완벽하게 재활용 가능한 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혁신적인 소재의 등장을 좀 더 장기적으로 기대하고 있다.
디자인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나? 시간이 정말 없는 편이다. 다만, 자기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운동은 게을리하지 않으려 애쓴다. 시간이 날 때는 다른 패션 하우스 사람들과 교류하는 자리를 가지는 정도다.
밀라노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아서, 이방인의 시선으로 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한다. 당신만의 비밀 장소가 있다면? 작고 호화로운 리베르티 궁전.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는데,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그림이 훌륭한 곳이다. 오, 정말 멋진 거울방도 있다.
내일 서울을 떠난다. 서울에서 시간이 더 있었다면 무엇을 했을까? 한국 젊은 세대가 아주 유행에 예민하고, 문화를 선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밤 문화, 클러빙 같은 것이 궁금하다.
마지막으로 누메로 벤투노의 가까운 미래의 계획은 무엇인가? 거창하기보다는 얼마 전 론칭한 백 액세서리를 성공시키고 싶다. 항상 유연하게 미래에 대처할 것이다.
누메로 벤투노의 밤
밀라노에서 날아온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델라쿠아가 마주한 서울의 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청담 플래그십에 한예슬, 이다희, 헤이즈 등이 참석했고, 서울을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들과 동시대적 여성상을 아우르는 브랜드 정신의 조우는 하염없이 빛을 발했다. <더블유 코리아> 카메라가 포착한 그날의 기록.
- 패션 에디터
- 이예지
- 포토그래퍼
- 박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