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항해하는 구찌 크루즈호가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에 정박했다. 2020 구찌 크루즈 컬렉션은 자기 결정권과 성 평등에 대한 존중과 격려와 지지로 넘치는 자유의 찬가다.
F/W 컬렉션이 끝나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을 준비하는 디자이너들의 새로운 여정은 크루즈 컬렉션. 하우스들은 크루즈 컬렉션을 통해 4대 패션위크라는 지리적 한계를 벗어나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적 공간에서 꿈과 상상을 현실로 펼친다. 어쩌면 장소 선정 자체가 시작이자 전부라 할 수도 있겠다. 지난 5월 28일, 구찌는 2020 크루즈 컬렉션을 위해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역사 마니아인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취향을 고스란히 담은 것일까. 이곳을 런웨이 장소로 선택한 건 무엇보다 미켈레의 취향이 투영됐을 터.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그가 젊은 시절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가던 장소였고, 2020 구찌 크루즈 컬렉션의 영감을 얻기 위해 추억을 환기하며 다시 찾은 곳이었다. 현존하는 박물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은 로마 시대 미술품과 그리스, 이집트 유물을 다수 소장, 전시하고 있다. 특히 로마의 기원과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적을 많이 소장한 특별한 장소다. 미켈레는 웅장하고도 서늘한 이곳에서 구찌 크루즈 컬렉션을 펼쳤다.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옛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를 누구보다 아름답게, 환상적으로 풀어내는 디자이너다. 늘 지나간 시절에 경외와 애정을 드러내는 미켈레의 구찌는 이번 크루즈 컬렉션에도 고대 그리스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로 가득 채웠다. 웅장한 헤드피스를 쓰고 등장한 오프닝 모델은 단번에 시선을 압도했고, 흰색 다단 레이스 드레스, 넓고 튼튼한 어깨의 슈트, 선명한 색상의 코듀로이 팬츠, 빨간 망토와 분홍빛 가운이 모두의 감탄 속에 연달아 등장했다. 쇼장은 어두웠다. 관객에겐 좌석마다 플래시를 제공했는데, 각자의 본능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플래시를 비추었고 (각자가 보고 싶은 부분을 플래시로 밝혔다), 그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박물관의 풍경과 어우러진 의상은 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컬렉션 내내 반복된 주제는 여성 해방이었다. 여성의 자궁을 수놓은 긴 크림색 가운이 있었는데, 이는 “여성은 남성만큼 존중받고 고려되어야 하며,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낙태 권리에 대한 논쟁에 비추어 시기적절한 메시지인 ‘나의 몸 나의 선택’이라고 쓰인 블레이저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번 컬렉션에서 소개된 1970년대 여성 운동의 슬로건이었던 ‘마이 보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라는 문구와 아티스트 MP5가 디자인한 ‘차임 포 체인지(Chime For Change)’ 로고가 더해진 옐로 컬러 티셔츠의 수익은 차임 포 체인지가 후원하는 자선 단체에 전액 기부될 예정이다. 성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시점은 올해지만 미켈레와 구찌는 지난 5년 동안 꾸준히 이 문제를 지지해왔다. 비영리 사회 운동인 ‘변화를 위한 종소리(Chime for Change)’를 통해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방글라데시, 말리, 필리핀, 남수단, 시리아, 탄자니아, 태국, 우간다,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의 모성 건강을 위한 프로젝트에 82만5천 유로가 넘는 자금을 지원해왔다. 이처럼 2020 구찌 크루즈 컬렉션은 여성 해방 운동의 중요한 시기인 70년대를 향해 눈짓한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은 어떤 종류의 제한이나 판단도 없이 모든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나의 목표는 구찌 공동체 전체가 양성평등을 위해 함께 모여 있다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고 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는 과거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도 늘 현재를 산다.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자유와 자기 결정권에 대한 메시지를 담으며 사회 문제에도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한데 뒤섞어 못 말리게 아름답고도 동시대적인 결과물을 도출한다. ‘고고학자’라는 수식어가 놀랍도록 잘 어울리는 알레산드로 미켈레의 마법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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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에디터
-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