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퍼퓸 마스터, 프레데릭 말과 장 클로드 엘레나.
‘장미 없는 장미 향수’.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이런 향수가 꽤 있다. 그리고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에서 올가을 새롭게 선보이는 ‘로즈 & 뀌흐’는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향수가 될 것이다. 세상에 또 하나의 독보적인 향수를 내놓은 당대 최고의 퍼퓸 마스터, 프레데릭 말과 장 클로드 엘레나를 그라스에서 만났다.
이 기사를 쓰려고 지난 6월 그라스 출장에 챙겨 간 자료들을 꺼내는데, 책상 위로 싱그러우면서도 쌉싸래한 향이 확 퍼졌다. 에디션 드 퍼퓸 프레데릭 말의 새 향수 ‘로즈 & 뀌흐’의 향. 그 순간, 그라스에서의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백발에 품위가 넘치던 프레데릭 말과 조향사 장 클로드 엘레나의 나직하고 친근한 목소리, 서로 짓궂게 농담하고 끄덕이며 대화하던 모습, 그라스 지역의 아기자기한 지붕들과 언덕, 장 클로드의 소박한 아틀리에와 수많은 향료 병들 사이로 스며든 햇빛 그리고 바람, 때마침 들리던 교회 종소리, 프로방스풍 호텔의 나무 창틀 밖으로 펼쳐진 고요한 아침. 향수를 ‘기억의 시’라고 표현한 장 클로드 엘레나의 말은 옳다.
그라스에서 당대 최고의 ‘Nose’인 이 두 사람을 함께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프레데릭 말이야 그의 브랜드에 앞서 향수를 좀 안다 하는 사람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향수 전문가이고, 장 클로드 엘레나는 17세에 조향 세계에 입문, 에르메스 전속 조향사로 일하며 수십 년간 전설적인 향수들을 창조한 향수 장인이니까. 그는 향료를 복잡하게 사용하지 않고 원료를 최대한 단순하게 사용하면서도 풍부하게 표현하며, 그가 만들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스타일의 소유자다. 얼마 전 은퇴를 선언했을 때 아쉽기 그지없었는데 그의 새로운 향을 다시 맡아볼 수 있다니! “나는 에르메스에서 많은 걸 했고, 이제 쉴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향수 만드는 일이 그리워지더군요. 그래서 딸에게 그라스의 작업실을 함께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죠.”
둘은 25년 지기 친구이고,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다. 이들이 함께 향수를 만들기로 작정한 계기는 인터뷰 장소였던, ‘에드몽 루드니츠카(Edmond Roudnitska) 하우스’에서 였다. 디올, 에르메스, 로샤스 등의 전설적인 향수를 만들어낸 20세기 가장 유명한 조향사 중 한 명인 에드몽 루드니츠카의 프라이빗한 퍼퓸 랩으로, 지금은 ‘아트 &퍼퓸’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커다란 동산처럼 이뤄진 정원에 향수 원료로 사용되는 갖가지 꽃과 나무가 가득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벌이 분주히 날갯짓하는 소리, 새와 벌을 위한 작은 수반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즈 & 뀌흐’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어요.” 장 클로드는 이곳의 주인이었던 에드몽에 대한 회상에서 시작했다. “그는 나의 멘토였어요. 최악의 멘토이기도 했죠. 대화하기 굉장히 힘든 분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는 최고였어요.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듣게 되어 있잖아요? 이곳은 에드몽, 나, 프레데릭과 그의 어머니(프레데릭의 할아버지는 크리스찬 디올 향수의 설립자였고, 그의 어머니 역시 거기서 일했다), 우리의 모든 기억이 연결되어 있는 곳이에요. 어느 날, 지금 이곳을 책임지고 있는 올리비에 마흐가 우리에게 정말 오래된 장미종을 보여줬어요. 에드몽이 사용했던, 지금은 향수 원료로 사용되지 않는 장미였는데, 나도 그 향을 맡고 프레데릭도 그 향을 맡았죠. 그리고 서로 눈을 맞췄어요. 이게 바로 이번 테마다, 그때 결정됐죠.” 프레데릭이 덧붙였다. “이 향수를 만들 때도 바로 여기 앉아 있었어요. 그 장미 향을 맡았을 때 직감적으로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죠.” 어떤 원료에서 영감을 받는 것이 일반적일지 몰라도, 그들이 이 아이디어를 전개한 것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고 장 클로드는 말했다.
“우리의 아이디어는 같은 장미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고, 당연히 비슷한 향을 카피해내는 것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테마는 여전히 장미였죠. 장미의 영혼만 담고 싶었달까요? 장미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서요. 조향사들은 장미를 언제나 환영하고, 정말 많이 생각하거든요.”
프레데릭은 장 클로드의 장미가 어떨지 궁금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에디션 드 프레데릭 말에서 ‘로 디베’, ‘꼴론 비가라드’, ‘비가라드 꽁쌍트레’ 그리고 ‘안젤리끄 수 라 쁠뤼’ 등의 향수를 함께 만들었지만 장미를 테마로 삼은 적은 없었다. “나는 장 클로드의 로즈를 몰랐어요. 예를 들어, 피카소에게 장미를 그려보라고 하면, 그 장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장미가 아닐 거예요. 피카소의 장미겠죠. 마티스는 마티스의 장미를 그릴 테고요. 그 두 가지는 다르겠지만 여전히 장미의 영혼을 품고 있겠죠. 이것이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지점이에요. 나에게 장미는 장미 그 자체일 뿐이 지만, 장 클로드의 머릿속에서 장미는 하나의 아이디어고, 이 향은 그의 해석이 담긴 것이죠.” 그리고 그는 바람이 스친 장미를 떠올렸다. 스위스 북부에서 프랑스 남부로 향하는 미스트랄은 겨울의 차갑고 거센 바람이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따뜻해진다. “처음에는 프레시하지만 피부에 닿았을 때 따뜻해지는 그런 향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를 위해 그가 장미 대신 사용한 것은 제라늄 버번이었다. “제라늄은 거칠고 와일드한 장미 향을 내요. 정말 장미와 비슷하죠. 제라늄에 다른 요소를 더하면 장미 향이 나는 듯한 환각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데 아주 흥미로워요.” 그가 더한 요소는 바로 상쾌함을 선사할 티무트 페퍼였다고 프레데릭이 설명했다. “후추 하면 향신료의 매콤한 향을 떠올릴 거예요. 하지만 이 향을 맡아보세요. 포도와 자몽 냄새가 나지 않나요? 우리는 이 향수의 대부분의 원료를 그라스에 있는 가장 선진화된 천연 추출물 연구소인 ‘플로럴 콘셉트(Floral Concept)’의 오너이자, 희귀하고 예민한 재료를 합성하는 데 최고의 대가인 프레데릭 르미(Frederique Remy)에게서 받아 왔어요. 이게 바로 그라스에서 향수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죠. 장 클로드 같은 마스터 조향사는 유명 스포츠 선수처럼 해야 해요. 최고의 선수는 최고의 도구, 그만을 위한 맞춤 도구가 필요한 법이죠. 99.9%의 조향사들은 카탈로그에서 향을 골라 향수를 만들지만, 그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랩에 가서 마켓에 존재하지 않는 원료를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죠.” 실제로 그가 사용한 제라늄은 그만을 위해 프랑스 근처의 작은 섬에서 재배된 것으로 오직 이 향수만을 위해 쓰인다. 그는 이 풍부하고 빛나는 장미 향에 ‘뀌흐(Cuir)’, 즉 가죽의 향을 더했는데 실제의 가죽이 아니라 이소부틸 퀴놀린이라는 합성 향료를 사용해 머스크 없이도 깊이 있는 우아함, 어둡고 신비한 느낌이 묻어난다.
이렇게 하나의 테마를 정하고 아이디어를 차곡차곡 더해가는 방식이 이들이 향수를 만드는 기본 틀이라고 프레데릭이 설명한다. “이곳의 연구실을 둘러봤나요? 우리는 재미를 위해 여기서 향을 맡고 그 안에서 정말 작은 것을 찾아내요. 나는 나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는 장 클로드에게 ‘이걸 누가 알고 있나?’라고 물어보죠. 그런 다음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묶는 거죠. 그러고 있으면 3초 뒤에 누군가가 와서 ‘이렇게 묶어보는 것은 어때?’라고 제안해요.” 장 클로드가 덧붙인다. “프레데릭이 몇 개의 키워드를 주면 누군가가 와서 계속 아이디어를 더하는 식이죠. 더할 수 없이 창의적인 과정이에요. 당신이 정말 좋은 작가라면, 누군가가 건넨 몇 개의 단어로 책을 만들 수 있죠. 한 단어만으로도 책을 만들 수 있어요. 내게 중요한 건 어떤 향을 만들었을 때, 나뿐만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도 이 향을 이해하게 하는 거에요. 마치 책을 읽는 것과 같이 작가가 글을 쓰면 독자들은 그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는 거죠. 향은 마치 언어와 같아요. 누군가는 장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건 문제가 아니죠. 다만 이 향을 맡은 사람들이 내가 무슨 의도로 만들었는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향수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 듣다 보니 상대를 지극히 존중하는 두 남자의 따뜻한 우정이 느껴졌다. 최고의 조향사들과 함께 일하며 향수 에디터를 자처하는 프레데릭에게 장 클로드가 어떤 조향사냐고 물으니, 최악이라고 웃으며 답한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죠. 나의 역할은 조향사를 푸시해서 그들만의 무언가를 찾아내게 하는 거예요. 누군가는 내가 5분에 한 번씩 불러주는 걸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혼자 놔두는 걸 좋아해요. 그는 명백히 후자에 속하죠. 오늘 아침엔 다른 조향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왔는데, 2개의 가방 안에 향수 샘플이 24개나 있더군요. 어떤 사람들은 내가 모든 걸 결정해주길 원하지만 장 클로드는 하나의 향수를 만들 때 많아야 3번 찾을까 말까라니까요.” 그러면서 프레데릭은 장 클로드가 끊임없이 자신을 자극하는 조향사라고 말한다. “모던한 그의 향기는 내가 추구하는 것과 일맥상통해요. 그의 향은 맡으면 바로 장 클로드의 향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경우는 대단히 희귀한 거죠. 대가의 손길 아래 몇 가지 컬러가 모여 하나의 추상적인 마스터피스가 완성되듯 그의 스타일은 단순하면서도 감각적이에요. 수십 년이 지나야 겨우 이룰 수 있는 경지라고 할 수 있죠.” 진정한 장인, 장 클로드는 일평생 이 일을 해왔음에도 여전히 향수 만드는 일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내가 만든 향수를 누군가가 사용하면 그 향은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죠. 정말 매력적이지 않나요?”
- 뷰티 에디터
- 이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