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뜨거운 욕망을 품은 채 뇌로는 냉정을 작동시켜야 하는 포커의 세계에 올인한 배우들이 있다. 자신을 차갑게 의심하는 박정민, 의연한 최유화, 지금 현재를 유지하는 일의 중요함을 아는 이광수, 연기라는 절실함으로 뜨거운 임지연. <타짜: 원 아이드 잭>은 그들 각자가 배우로서 가진 패를 증명하는 영화다.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까짓 악셀 한번 밟아봐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인생도 예술로 한번 살아보고.” 가난을 벗어나게 해줄 한 방을 노리는 열혈 청년이 목숨 건 화투판에 휘말리는 스토리, 최동훈 감독의 <타짜>는 13년 전 개봉했다. 어떤 영화는 3주 전에 개봉했어도 까마득한데, 13년이 흐르는 동안 작품은 물론 캐릭터의 생생함까지 뇌리에 박혀 있는 <타짜>는 그만큼 대단한 영화다. 5년 전에는 강형철 감독이 만든 그 속편인 <타짜: 신의 손>을 만날 수 있었다. 게임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도 끌어당기는 힘은 여전했고, 인물들의 ‘가오’는 서늘함에서 다소 경쾌함으로 변모했으며, 그 외에는… 생략한다. 아는 사람은 잘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평생을 모르고 사는 그곳. 가면을 쓴 꾼들이 서로 속고 속이는 도박판. 다양한 인물 군상이 뒤엉키는 가운데 케이퍼 무비, 누아르와 스릴러, 액션, 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껴안는 재미까지 부릴 수 있는 이 소재는 훌륭한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조건이다. <타짜: 원 아이드 잭>의 제작보고회 날, 오전부터 극장 안이 프레스로 가득 찬 건 <타짜>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흥미진진함 덕일 것이다.
박정민, 이광수, 임지연, 최유화가 함께 공식 활동을 시작한 그날, 각 배우의 매니지먼트 관계자와 홍보 담당자들 한 군단이 화보 촬영장에 모여들었다. 영화 홍보사 대표까지 일찍 현장에 나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새삼 영화를 둘러싼 기대와 비장함마저 느끼게 했다. 추석의 극장가란 도박판의 승자와 패자처럼 각축의 결과가 단 며칠 만에 드러나는 현장이니까. 사실 새 영화를 이야기하며 앞선 시리즈부터 언급하는 일은 이들이 썩 반기지 않을 것 같다. “개봉일이 다가오면서 좀 두렵기도 해요. 이미 비교 잣대가 두 개나 있잖아요. 우리가 그것을 뛰어넘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타짜>를 만들려고 했어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영화의 마지막에 정확히 나옵니다. 저는 그 정서가 마음에 들었어요.” 첫 번째 타짜, 박정민이 말했다. 2006년의 <타짜>를 보며 꿈을 키웠을 예비 영화인들이 모여 완성한 새 시대의 새 작품. 새 버전을 끌어가는 주인공은 전설의 타짜인 짝귀의 아들, ‘일출’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이지만 학원보다 도박판에서 더 존재감을 발휘하는 청년. 피를 못 속이는 일출 앞에 뛰어난 안목과 전략으로 이기는 판만 설계하는 애꾸(류승범)가 나타나고, 구성원 각자의 실력과 장기가 분명한 원 아이드 잭 팀이 결성된다.
뜨거운 가슴을 차갑게 의심하는 박정민
박정민은 이전의 <타짜>를 이끈 조승우와 T.O.P에 비하면 이 중 가장 식물성에 가까운 남자다. 이정재가 쫓던 신흥 종교 집단의 미스터리한 존재도(<사바하>), 어둡고 억눌린 얼굴의 10대도(<파수꾼>), 심지어 윤동주 시인과 대비되는 동물적 기질의 독립운동가 송몽규도(<동주>), 기름기 빠진 이 청춘 배우의 절제된 표현을 거치면 과잉과 거리가 멀어서 더욱 리얼해졌다. 서번트증후군을 앓는 <그것만이 내 세상>의 피아노 천재, 진태가 사랑스러울 수 있었던 바탕에는 박정민이 지닌 소년다움이 있었다. 물론 요즘 박정민의 몸과 얼굴은 전과 다르다. <타짜> 촬영을 마친 올해 초, 그는 1년 전보다 20kg이 빠진 상태였다. ‘소년으로 시작해 남자의 모습으로 끝나길’ 원했던 감독의 바람에 따라 촬영을 진행하는 도중 급히(안 먹고 버티면서) 살을 뺀 결과다.
<더블유>의 커버를 장식한 적 있는 스타를 비롯해 영화인 중에는 ‘박정민을 눈여겨본다’고 언급한 이들이 꽤 있다. 권오광 감독 역시 오래전부터 박정민이 한예종 시절 찍은 단편이며 출연작을 챙겨 봤다. 감독은 알아챘다. ‘박정민이 배우로 살아온 과정과 일출의 삶이 닮은 데가 있다.’ 자기 재능을 확신하며 과감하게 판에 뛰어들기보다 느릿느릿 걷다가 타인에게 먼저 재능을 ‘확인당하는’ 부류. <동주>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디렉터스 컷 시상식 등 2016년에 있었던 거의 모든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고도, 이준익 감독처럼 옆에서 그를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어도, 박정민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부정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뜨거운 이상을 품은 이들은 일희일비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자기 방어를 하는 법이다. “영화라는 것을 생각하면 정리가 안 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아요. 분명한 건 영화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있다는 거예요. 좋은 작품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저 나가떨어지기 전까지 영화를 오래 하고 싶어요. ‘나대지 말고 웬만하면 묻혀 가자’ 주의로 살면서요(웃음).”
그는 <사바하>에 이어 <타짜: 원 아이드 잭>을 거치며 배우로서의 자존감을 좀 더 다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 친밀한 팀 분위기를 경험하면서 현장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다. 타짜라면 베팅할 때 인생을 걸어야 한다던데, 멀쩡히 입학한 대학교를 자퇴하고 이듬 해 연기 배우는 학교로 향했을 때만 해도 ‘하고 싶어서’ 연기를 했던 그는 이제는 인생을 걸고 연기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인으로서 여전히 존재론적 고민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이미 이 길 위를 한창 걷고 있으니. “최동훈 감독이 네가 <타짜> 하는 거 보고 싶대.” 시나리오를 받고 결정하지 못한 채 선배 배우에게 상의했을 때, 그 선배가 전한 말이다. 성공한 시리즈의 처음을 연 감독의 그 한마디는 배우에게 얼마나 황홀한 원동력이 되었을까?
오늘의 네 배우 중 박정민과 전혀 다른 재능을 가진 인물은 최유화다. “얼굴 안에 많은 걸 담고 있어요. 한마디로 물리적 조건이 좋은 배우랄까. 그것만으로 이미 훌륭해요. 신기한 점도 있어요. 저는 누가 뭘 시키면 그 동기와 이유부터 찾아야 잘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유화 누나는 감독님이 어떤 디렉션을 주면, 고스란히 바로 해내요. 그건 놀라운 재능이에요.” 박정민이 타인의 심기를 잘 살피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일지 모른다. 그가 <타짜: 원 아이드 잭> 현장에서 살피고 발견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감탄 같은 것이었다. “우리 현장은 참 사랑스러웠어요. 서로 챙겨주고 싶어 했고, 동료의 연기를 부러워하기도 했죠. 작년 한 해는 이 작품에만 올인했는데 행복한 1년을 보냈어요. 제 개인적인 성취감을 떠나 작품이 잘됐으면 하고 바라는 이유는 이 영화가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우리들의 꿈이었기 때문이에요.”
도망가지 못한 대신 의연해진 최유화
“이거 왜 이래 새삼스럽게? 나 이대 나온 여자야.” 13년 전, 정마담 혹은 김혜수는 ‘한국영화사에서 길이 회자될 대사 모음집’ 같은 게 있다면 한 줄을 차지할 이 대사를 남겼다. 배우의 글래머러스함을 고스란히 입은 정마담이 냉정을 유지해야 하는 도박 세계에서도 그 뜨거운 성질을 숨길 수 없었다면, 최유화의 마돈나는 은밀하게 감춰지는 여자다. 마돈나, 이름에서부터 짐작되는 팜파탈적인 여자. 그녀는 박정민, 이광수, 임지연의 원 아이드 잭 팀에 혼란을 주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평온한 삶을 산 여자는 아니에요. 어둡죠. 겉으로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아도 안은 깊어야 했어요. 희한하게도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여자에 대해 내가 아는 것 같았어요.” OCN에서 방영 중인 <미스터 기간제〉의 얼음장 같은 검사나 지난해 가장 탁월한 드라마 중 하나였던 JTBC <라이프>의 정의감 넘치는 기자 역할은 배우가 나름의 조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직업군이다. 마돈나의 경우, 최유화는 사연과 비밀 많은 그 인물을 본능적인 감으로 만들어내야 했다.
영화 속 캐릭터가 겪었을 다사다난함에 비할 바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편안한 삶을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 데뷔 이후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 최유화가 어느새 받아들인 태도다. “저는 저 자신과 배우라는 직업을 일치시키지 못하며 산 편이에요. 이 일이 운명적이라고 여겨서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자꾸 벗어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도망가려 할 때쯤 좋은 작품이 들어오고, 잘되려나 싶으면 작품이 엎어지거나 공백이 생겼죠. 그런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어요. 이렇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앞으로 나에게 잘될 일만 남았다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아요. 꽃길을 걷는 게 제 목표가 아니거든요.” 이런 말을 하는 최유화에게서 보이는 건 의연함이다. 독립군으로 출연한 <봉오동 전투>까지 개봉해 영화 홍보와 드라마 촬영 일정으로 하반기가 꽉 찬 지금, 그녀에게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식의 조급함과 들뜬 기색은 없다.
다만 최유화는 영화 촬영장 분위기와 동료들에 대해 말할 때면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눈으로도 이야기했다. 영화 속에서 주로 상대한 박정민에 대해 말하면서는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오듯이 ‘최고’ 라는 단어를 몇 번 썼다. “일단 처음 만나 식사할 때 제 접시에 고기 를 덜어줬죠(웃음). 그 후로 우리는 대개 최유화와 박정민이 아니라 마돈나와 일출의 관계처럼 지냈어요. 정민이가 참 재밌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정민이와 대화하는 게 재밌으면서도 같이 연기하는 순간은 그것보다 더 신나는 거예요. 어서 촬영 들어갔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요.” 일할 때면 상대 남자 배우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지우고 동료 대 동료의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는 최유화는 자신이 털털하게 굴 때 그것을 은근히 막아준 박정민의 행동을 두고 시간이 지나 감탄했다. ‘마돈나와 일출의 긴장감을 위한, ‘설계자’ 박정민의 빅 픽처였구나!’
포커를 아는 사람은 영화 제목에서부터 눈치챘겠지만, 새로운 <타짜>의 종목은 화투가 아니라 포커다. 우선 박정민은 이번 작품을 하기 전부터 포커를 칠 줄 알았다.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으며, 스트레스를 넘쳐 오를 때까지 쌓아두면 그것이 어느새 사라진다고 ‘스트레스 자연소멸론’을 말하는 그는 그런 성격과 몹시 어울리게도 평생 눈치를 보며 살았다고 한다. 그 눈치 때문인지, 포커 아마추어 중에서는 상위권 실력임을 자부할 정도다. “포커는 눈치싸움이에요. 내 패를 가지고 하는 게임이 아니거든요. 다른 이가 나보다 높은 패를 가졌는지가 중요해요. 나에게 좋은 패가 없는데 돈을 크게 걸며 블러핑(상대를 기권하게 할 목적으로 크게 베팅하는 것)할 수도 있는 심리전이죠.” 패가 내 손에 들어올 때마다 박정민이 말하는 최유화의 특징처럼 얼굴 안에 많은 걸 담았다가는 패가망신하는 게임. 포커의 세계에서는 가슴에 욕망을 품은 채로 뇌로는 냉정을 작동시켜야 한다. “저는 소심해서 칩을 잃을까 봐 베팅을 못 해요. 좋은 패를 가지고도 막 손이 떨리더라고요(웃음). 정민 오빠와 포커를 치면 다 들키고, 다 잃고 그랬죠.” 그 얼굴의 느낌처럼 투명하게 속 을 들키고 마는 임지연이 ‘보통 인간’의 경우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카드나 화투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다가 손기술의 대가로 거듭난 이광수를 소개한다.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려는 이광수
“촬영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카드를 자연스럽게 다루지 못하면 지금껏 노력한 것이 물거품이 될 것 같았어요. 부담이 되는 동시에 욕심이 났죠. 물론 시나리오를 보면서는 당연히 카드를 섞는 장면, 카드만 잡는 장면 등등을 따로 나눠 촬영할 줄 알았어요.”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랑꾼이자 빠르고 정확한 손이 큰 장기인 까치(그의 이름이 왜 까치인지는 신성한 지면에 차마 밝힐 수가 없다). 이광수는 52장의 카드를 섞다가 위에서부터 한 장씩 뒤집을 때 원하는 순서대로 나오게 만드는 수준을 갖춰야 했다. ‘이제 이 카드를 뒤집으면 스페이드 A가 나올 거야. 그다음 카드를 뒤집으면 잭 다이아일 거고.’ 트럼프 카드로 장난치던 마술사들이 이렇게 말하던가? “제가 포커판의 의자에 앉은 다음 카드를 섞고 약속된 순서대로 나열하는 장면을 감독님이 끊김 없이 한 테이크로 담고 싶어 하셨거든요.” 화려한 손기술의 보유자가 되기 위해 그는 3개월간 ‘노오력’을 다했다. 영화 촬영장에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전문가가 나와 있었다지만, 기어이 해낸 이광수다. 그 현란한 기술을 영상으로 좀 담고 싶다고 말했다가 예의 바른 이광수가 거절의 변을 찾느라 표정으로 허둥지둥대는 사이, 귀한 인터뷰 시간 중 25초가량이 흘러갔다.
12년 전쯤 이광수와 한 스튜디오에서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미래가 기대되는 신인 배우를 인터뷰하는 자리였다. 이광수를 인터뷰한 선배는 점심으로 짜장면을 시켰는데 그가 상냥하게도 비닐 덮개를 직접 벗겨줬다고 했다. 바가지 스타일 헤어를 하고, CF 모델로 막 등장한 커다란 남자. 그때 미래를 기약했던 다른 남자 배우들은 사라졌거나 그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몇 년 후 예능을 통해 매주 TV 화면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 이광수는 그 사이사이, 매해 드라마와 영화를 소화했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와 <디어 마이 프렌즈>에 이어 <라이브>까지, 이광수를 세 차례 택한 노희경 작가는 공개된 자리에서 그의 투지와 탐구하는 자세를 칭찬한 적이 있다. 그와 <타짜>에서 콤비를 이루며 여러 장면을 소화한 임지연은 윗동네에서 물어온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처럼 신이 나서 자신의 발견을 공유했다. “전 광수 오빠가 그냥 재밌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결을 잘 소화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왜 센스가 중요한 연기 있잖아요. 그런데 아니에요,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이광수는 센스로만 밀어붙이는 배우가 아니라 철저한 배우예요. 열정과 노력까지 있다니까요?”
배우의 정체성으로, 예능을 통해 이름과 얼굴을 널리 알린 이광수에게 연기란 목마름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그의 주변에 스타 친구는 왜 그렇게 많은 걸까? 조합하면 친근하고 익숙한 사람, 또 성격 좋아 인연을 잘 이어가는 사람(친구들은 이광수의 특징으로 ‘배려심’을 꼽는다고 한다), 연기 욕심이 있다면 언젠가 자신의 패로 예능이 만든 이미지를 한 판에 뒤집어엎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 사람.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질문과 조금은 다른 지점을 말하고 있었다. “운 좋게 쉬지 않고 작품을 해요. <런닝맨>이 아니었다면 지금 제게 주어지는 그 모든 상황 자체가 있었을까요. ‘키가 좀 더 작았으면 연기하기 좋았을 텐데’ 같은 말도 들어봤죠. 그런데 지금 나의 상황이 곧 나예요. 저는 모험을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지금을 유지하는 일에 신경 써요.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는 건 제 나름 현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겠죠.” 가정이나 부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지금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섬세한 균형 감각이 필요할까? 목소리의 고저조차 일정한 이광수의 말 뒤로, 같이 작업해 본 이들이 증언한 ‘투지’며 ‘노력’ 같은 단어가 스쳐 간다.
오직 하나만 알아서 뜨겁게 행복해진 임지연
상업 영화 데뷔를, 주인공으로 한 배우. 김대우 감독의 <인간 중독>은 호불호가 갈리는 영화였지만,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지지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임지연의 존재였다. 처음 봐서 신선한 데다 창백하리만치 하얘서 신비한 여자, 그리고 멜로물에 적합한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과감하고 내밀한 시도를 한 송승헌의 조합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미술과 공기도 스타일리시했다. <간신>에서 여배우와 파격적인 베드신에 임한 임지연은 그 영화 개봉 직후 방영을 시작한 하명희 작가의 드라마 <상류사회>에서는 천진난만하고 눈치가 없어서 귀여운 아가씨였다.
‘여배우의 노출’ 같은 문장은 이제 더 이상 임지연에게 아무런 의미도, 임팩트도, 관심도 없는 이야깃거리다. 방점은 ‘노출’이 아니라 ‘연기’에 찍힌다. 작품에 필요한 연기인가, 그렇지 않은가. 배우는 밥 먹는 연기가 필요하면 밥을 먹고, 밥을 허겁지겁 먹는 연기가 필요하면 허겁지겁 먹는 존재다. 이 원론적인 이야기가 일체의 이물감 없이 심플하게 임지연을 관통하는 건 그녀가 어릴 적부터 오직 ‘연기하는 인생’이라는 한 가지 세상만을 염두에 두고 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와 작품을 같이 한 적 있는 감독님이 어느 날 제 영화를 보고서 ‘지연아, 너 정말 절실했구나’라고 문자를 보냈어요. 그걸 보고 펑펑 울었어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는지 누군가의 눈에 보였다는 게 그렇게 고마웠거든요. 저는 제가 기억하는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도, 배우의 길만 생각하며 자랐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데뷔한 지 5년, 이런 인터뷰 기회가 아니라면 임지연은 그녀의 정체를 드러낼 일도 거의 없었다. 이광수가 그 정체를 대신 밝혔다. “에너지가 좋고, 건강한 사람이에요. 리액션도 좋아서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지연이에게 말 한마디라도 더 걸고 싶어 했어요. 그리고, 정말 털털합니다.”
원 아이드 잭 팀의 멀티플레이어로, 배우를 꿈꾼 이답게 변신에 능하며 연기력과 언변으로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빠르게 쟁취하는 영미. “감독님이 그랬죠, 임지연 그대로 임하면 좋겠다고. 그래서 정말 내 모습대로 했어요. 연기할 때 저의 실제 표정과 말투, 행동거지 등에서 가져올 수 있는 소스가 아주 많았다는 뜻이에요. 카메라 앞에서 임지연인 채로 대사를 읊어도 됐죠.” 캐릭터들이 각축을 벌이는 <타짜> 시리즈의 특성상 현장의 기가 다소 셀 거라 짐작했지만, 임지연은 이광수의 재발견에 대해 신나게 말할 때만큼이나 적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절대. 전혀요. 기싸움 같은 거, 촬영장에서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기는 무슨…” <타짜: 원 아이드 잭>에서 유쾌한 신 대부분은 임지연과 이광수의 몫이다. 영화 촬영에 이은 프로모션, 8월부터 정지훈과 함께 출연 중인 MBC <웰컴2라이프>의 촬영을 병행하느라 체력이 다소 무너진 것만 제외하면, 임지연은 곧잘 느낀다. 자신은 정말 복이 많은 행운아라고. 어떻게 매번 좋은 사람들과 신나는 일을 하고 있나 싶다고. 하나의 세상만을 진득하게 바라본 자의 절실함이 복을 부른 걸까?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포토그래퍼
- 김재훈
- 스타일리스트
- 최진우
- 헤어
- 장혜연(최유화, 임지연), 이소연(박정민, 이광수)
- 메이크업
- 안성희(최유화, 임지연), 이소연(박정민, 이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