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랑 기행

한국을 방문한 이자벨 마랑과의 하루.

하이패션과 스트리트 웨어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전 세계에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브랜드 이자벨 마랑. 옷을 통해 자신의 쿨한 애티튜드와 프렌치 시크의 미학, 상반된 요소를 세련된 방식으로 믹스하는 그녀는 스스로가 곧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한다. 지난 5월, 더블유는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한 마랑의 서울 시티 투어에 동행했다. 뜨거운 환호에 여유와 따스한 에너지로 화답한 멋진 여자, 이자벨 마랑과의 하루.

“10분만 주세요. 커피 한 잔만 마시고 시작할게요.” 이른 아침 파크 하얏트 로비에서 대기 중인 헤어 메이크업 스태프와 에디터, 사진가에게 어느 순간 다가와 말을 건넨 이자벨 마랑. 건강한 에너지와 명랑한 활기가 넘치는 그녀에게 첫인상부터 압도되었다. 아일릿 블라우스와 러플 장식 자수 베스트, 하이웨이스트 팬츠와 슬라우치 부츠 등 자신의 쇼피스를 차려입고 등장한 그녀는 브랜드의 개성 그 자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태닝한 건강한 피부, 아무렇게나 틀어 올린 머리, 탄탄한 몸, 환하게 웃는 미소 모두 지극히 파리지앵다운 모습. 10년 만에 한국을 찾은 마랑은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지만 그동안 한 번도 서울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며, 더블유와 시티 투어에 나섰다. 호텔에서 DDP, 청계천, 익선동, 그리고 이자벨 마랑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로 이어지는 10시간 동안 나눈 이야기.

DDP를 보고 이어 방산시장과 청계천까지 서울 곳곳을 둘러봤다.

오늘 방문한 곳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장소는 어디였나? 우리가 지금 점심을 먹는 여기(익선동의 레스토랑). 한국 전통 집의 구조가 근사하고 음식도 아주 맛있다.

DDP와 익선동은 어땠나? 서울의 현대적인 면과 전통적인 면을 모두 보고 싶었다. 특히 건축과 디자인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하 하디드의 건물을 봐서 기분이 좋다. 도시의 초기 모습과 전통적인 문화가 남아 있는 익선동과의 대비도 흥미로웠다. 서울의 면모를 이해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동양 문화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나?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독일인이고, 아버지가 재혼한 후 나를 키워준 어머니는 카리브해 출신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 때문에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셨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기념품과 오브제를 사 오셨다. 그런 예쁜 오브제들을 보면서 자랐고, 학생 때는 여행을 많이 다녔다. 특정한 문화에서 영감 받은 컬렉션 피스는 모두 여행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수공예를 비롯해 인간이 손으로 빚어내는 모든 것에 경외심을 느낀다. 패션은 산업적이기도 하지만 자수, 직조, 니트처럼 손으로 하는 작업이 많다. 수공예 작업이 가능하다는 건 패션 일을 하는 나로서 가장 자랑스럽고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지금 나의 일이 너무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당신이 가본 최고의 여행지를 알려달라. 스리랑카를 추천한다. 인도, 멕시코, 아프리카, 유럽 등 세상에는 아름다운 곳이 무척 많다.

한국에 이자벨 마랑의 추종자가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 파리에서 나를 알아보는 한국 사람이 꽤 있을 정도다. 바르셀로나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한국 여행객이 나에게 말을 걸어 놀랐다.

과감한 프린트 니트와 터프한 가죽을 매치한 스타일링은 이자벨 마랑의 시그너처 룩이다.

부드러운 가죽이 돋보이는 앵클부츠. 여성스러운 드레스나 레이스 아이템과 세련된 조화를 이룬다. 히든 굽을 넣은 웨지 스니커즈와 웨스턴 무드를 살린 디커 부츠 등과 같은 아이코닉한 슈즈 라인은 이자벨 마랑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된 아이템이다.

발등까지 날렵하게 커팅된 디자인은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를 준다. 여성스럽지만 어딘가 강인한 느낌이 드는 부티.

룩에 긴장감을 주는 금속 장식 벨트.

당신의 옷을 입으면 어떤 당당한 태도가 생긴다. 늘 진실한 옷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화려해도 걸치기 쉽고, 우아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마트에 갈 때나 디너 모임에도 입을 수 있는 옷 말이다. 옷에 갇히는 게 아니라 옷을 통해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을 받도록 한다.

여성스러운 블라우스와 터프한 팬츠 같은 극적인 대비, 그리고 오버사이즈 실루엣과 에스닉한 프린트 등 당신은 쿨한 여자들이 원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하는 듯하다. 다양한 레이어링과 대비를 즐긴다. 여성스러운 것에 여성스러운 것을 더하지 않고 항상 다른 요소로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을 즐긴다. 그게 바로 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완벽주의자일 것 같다. 나는 잘 웃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편이다. 그러나 일에서만큼은 확고한 태도를 유지한다. 나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기대치 때문에 자신에 냉정한 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하지 않는다. 한 예로 나는 질이 나쁜 옷은 정말로 싫다. 좋은 소재로 잘 만든 옷과 디테일은 무척 중요하고, 그게 디자인의 원칙이다. 가격이 비싸더라잘 만든 옷에 투자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질이 안 좋은 옷을 여러 벌 사는 것보다 비싸도 오랫동안 입을 수 있는 옷이 좋다.

옷장 안에 당신의 브랜드 외에 어떤 아이템이 있나? 사실 다른 브랜드 옷은 거의 없다. 꼼데가르송과 마틴 마르지엘라를 무척 좋아했고 예전에는 마르지엘라를 많이 샀다. 그런데 지금 이자벨 마랑으로서 다른 브랜드를 입기가 쉽지 않다. 다른 브랜드를 입고 싶을 때는 주로 빈티지를 사는데, 입기보다 영감을 받기 위해서 산다.

이자벨 마랑의 옷은 시간이 흘러도 늘 쿨하고 활기찬 에너지가 느껴진다. 젊은 감성을 유지하는 방법이 있나? 50대 치고는 내가 젊은 편이어서가 아닐까?(웃음) 농담이고 컬렉션의 가장 큰 영감이 음악이기 때문일 거다. 나는 음악과 파티를 너무 좋아한다. 열여섯 살 아들이 있는데 우린 같은 노래를 듣는다. 힙합, 트랩, 펑크, 솔 등 다양한 장르를 듣는데, 컬렉션을 위한 많은 에너지와 영감을 받는다. 젊은 세대의 정신을 이해하고 제대로 느끼려고 애쓴다.

아일릿 블라우스와 자수 베스트, 하이웨이스트 팬츠 등 자신의 컬렉션을 입고 등장한 이자벨 마랑의 모습.

모델 박태민과 이자벨 마랑이 셀피를 찍으며 즐거운 추억을 남겼다.

익선동 레스토랑에서 즐긴 점심 식사에 모델 박태민이 이자벨 마랑 옴므의 블라우스를 입고 깜짝 등장해 자리를 함께했다.

한국 술 막걸리를 맛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익선동의 오락실에서 두더지 게임에 열중하는 이자벨 마랑의 모습.

이번 캠페인과 F/W 런웨이에 한국 모델 박태민을 기용했다. 그의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나? 기본적으로 나는 너무 남성적인 남자나 너무 여성스러운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두 개의 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아시안 남자에게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그게 태민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F/W 컬렉션에는 남성 룩의 비중이 늘어났다. 남성을 위한 컬렉션을 계속해서 선보이고 싶다. 그렇다고 남성 컬렉션을 대대적으로 확장할 생각은 없다. 남자는 여자보다 더 확고한 스타일과 옷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여자는 좀 더 다양한 옷을 입어보고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때문에 남성 컬렉션은 양을 늘리기보다 정확한 스타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복을 디자인할 때 여성복과 차이점이 있는가? 여성 컬렉션에는 모든 것을 시도해본다. 하지만 남성복에는 제한이 있다. 남성복이 정말 어려운데, 내가 그 옷을 직접 입어볼 수 없기도 하고, 스타일리시하면서 과하지 않은 남성 룩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다. 옴므를 시작한 지 오래 안 돼서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지금까지 선보인 룩은 아주 만족스럽다.

이자벨 마랑 옴므를 입는 남자는 어떤 스타일일까? 이자벨 마랑을 입는 여자의 남자친구! 여자를 위한 남성적인 룩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항상 남성적인 요소를 여성 컬렉션에 더해온 방식처럼, 반대로 여성복을 다시 남성복으로 풀어가는 건 당연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아일릿 블라우스와 자수 베스트, 하이웨이스트 팬츠 등 자신의 컬렉션을 입고 등장한 이자벨 마랑의 모습.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의 포토월에 선 이자벨 마랑과 배우 정려원.

5월 17일 저녁 청담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열린 칵테일 파티에 등장한 배우 정려원과의 반가운 만남.

인테리어 얘기도 해보고 싶다. 매장 디스플레이를 책임지는 디자이너 아놀드 고롱과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아놀드는 알고 지낸 지 거의 20년이 되어가는 오랜 친구다. 그는 다양한 시도에 대범한 사람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의 유머러스한 면을 특히 좋아한다. 예전에는 각 나라의 매장마다 많은 에너지를 쏟으면서 그 건물과 공간에 어울리는 인테리어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브랜드가 확장하면서 매장마다 다르게 디자인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아놀드 고롱과 작업은 매장 자체로 예술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

당신이 처음 브랜드를 론칭할 때는 SNS라는 게 없었다. 지금 디지털로 돌아가는 패션 세계가 피곤하게 느껴지지는 않는지. 컬렉션 준비에는 달라진 게 없지만,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잡지보다는 인터넷을 주로 보기 때문에 SNS를 위해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디지털은 빠르고 정보가 바로 공유되는 소통 방식이다. 예전에는 이미지를 에디터들만이 만들 수 있었고, 6개월 후에야공유되었지만 이제는 쇼 당시 사람들이 바로 사진을 찍어서 올리기 때문에 전 세계에 몇 초 내에 공유된다. 피곤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그저 다르다고 생각할 뿐.

오피셜 외에 인스타그램 개인 계정은 없는 거로 알고 있다.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다들 당신의 프라이빗한 일상을 궁금해할 텐데. 일과 일상을 완전히 분리한다. 이자벨 마랑 옷이 나를 많이 닮았지만, 옷은 창조물이다. 사적인 것을 딱히 공유하고 싶지도 않고, 그럴 시간도 별로 없다. 항상 행복해 보이는 가짜 이미지나 진짜가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SNS에는 울고 있는 모습이나 힘든 모습은 절대 보이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내 집이나 내 아들과 사진을 찍어서 올린 적이 없다. 나는 킴 카다시안이 아니다(웃음). 어느 정도의 신비함을 유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패션계에서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나는 명확하고 흔들리지 않는 성격에다 분명한 철학을 가졌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특별히 더 낫다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옷 만드는 게 즐거운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내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겠나. 그러나 내가 만든 것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