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닮은 데님 이야기.
한없이 넓은 바다에 파도처럼 푸른 이번 시즌의 데님을 입고 갔다. 세상의 파란색은 모두 품은 바다를 닮은 데님 이야기.
샤넬 트위드 재킷을 입어본 적 없는 사람은 있어도, 데님을 입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세기 말 지금의 형태에 가까운 현대적 데님의 출현 이후, 데님은 다양한 프레임 속에서 사회적 의미를 확장하고, 패션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유지해왔다.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지부터, 물과 모래를 이용한 샌드 워싱과 디스트로이드 워싱 등 데님 표면을 처리하는 방법만 수십 가지일 만큼 데님의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이처럼 데님에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부여하는 다양한 방식 가운데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이 주목한 것은 표백제에 한 번 담갔다 뺀 듯한 블리치 데님(Bleach Denim), 한국에 서는 친근하게 ‘돌청’으로 알려진 데님이다.
블리치 데님 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80,90년대풍 디자인 대신, 21세기 디자이너들이 제시한 새롭고 세련된 데님의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이번 시즌, 이자벨 마랑의 옷은 이비사, 마라케시 같은 지구상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향락적인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페이즐리 프린트가 춤을 추는 데님 볼레로 재킷과 둥근 어깨가 우아한 데님 미니드레스, 여름 외출복으로 손색없는 은색 톱과 매치한 마이크로 데님 쇼츠 등 온갖 유목민적 성향이 충돌하는 런웨이는 새로운 히피의 출현을 알렸고, 블리치 데님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매력을 이끌어냈음은 물론이다.
줄곧 강하고 도발적인 여성상을 강조해온 발맹의 올리비에 루스테잉 또한 데님의 물결에 합류했다. 강력한 메탈 뷔스티에에 매치한 하이웨이스트 데님 팬츠, 스팽글이 장식된 뾰족한 파워숄더 데님 톱, 날것의 매력이 넘치는 디스트로이드 재킷과 허리를 질끈 묶은 스커트까지, 루스테잉의 일관되고 명확한 비전은 진취적인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스텔라 매카트니는 블리치 데님과 더불어 트렌드로 떠오른 타이다이 기법을 활용했는데, 뇌리에 남는 명쾌한 파란색의 데님 점프슈트와 주름진 지퍼 장식 데님 팬츠 등은 한여름 불볕더위에 대비할 아이템으로 손색없을 듯 했다.
색을 옅게 뺀 블리치 데님과 대조를 이루는 인디고 블루의 공존을 제안한 디자이너도 있다. 2017 S/S 시즌을 시작으로 1951년 작 디올 아카이브의 네이비 슈트에서 영감을 얻은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파란색에 대한 명상을 통해 모던 디올 레이디에 대한 탐구를 지속해왔다. 그리고 이번 시즌 그녀가 선보인 크고 작은 칼레이도스코프 문양을 차용한 데님 팬츠와 백 액세서리는 피카소와 샤갈의 블루를 연상시켰고, 이는 우주적 사색으로 이끌 만큼 강력했다. 그랑팔레를 잔잔한 파도가 이는 모래사장으로 변신시킨 샤넬은 행복한 사색에 동참하라 손짓했다. 밝은 립스틱을 칠한 채 흰 거품 이는 모래사장을 거니는 우아한 샤넬 걸들의 행렬. 라피아 모자를 눌러쓰고 수영복 위에 데님 팬츠를 덧입거나, 낙낙한 데님 팬츠를 입고서 한 손에 슈즈를 들고 맨발로 모래 위를 걷거나, 심플한 로고 플레이 카디건에 청바지를 매치한 소녀들의 모습은 상상하던 ‘나만의 여름’을 저절로 대입하게 했다. 칼 라거펠트의 마지막 샤넬 컬렉션이 일으킨 파도. 이렇게 파랗고 파란 패션계의 데님 물결은 여름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널리 퍼져나가는 중이다.
- 패션 에디터
- 이예지
- 포토그래퍼
- 이준경
- 모델
- 한다솜
- 헤어
- 이에녹
- 메이크업
- 이나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