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F/W 러시아 패션위크 바이브 Vol.2
“더블유를 초대합니다.” 러시아에서 자국의 패션위크 (FASHION WEEK RUSSIA)에 초대한다는 메일이 왔다. 베트멍과 고샤 루브친스키를 배출해낸 땅이자 유스(Youth) 컬처를 몰고 온 본거지, 러시아. 아직 4대 도시 패션위크를 경험해보지 못한 에디터에겐 첫 패션위크를 러시아에서 맞게 된 셈이니, 더욱 새로웠다. 모든 것이 생경했던 2019 F/W 러시아 패션위크 바이브!
인간 조각상
쇼를 보기 직전 자리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스태프들이 까만 상자를 들고 나오더니 남자 모델들이 나와 그 위에 우뚝 섰다. ‘이게 쇼인가?’싶은 와중에 진짜 쇼가 시작되었다. 상자 위에 서 있던 모델들은 그야말로 인간 조각상이었던 셈! 어두운 사제의 모습을 하고, 동작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서 있던 모델들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뒤돌아 섰을 땐 컬렉션 룩이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였다.
디스 이즈 러시안
주최 측으로부터 러시아 전역을 여행하고 전통적인 요소에서 영감을 받아 옷을 만든 패션 디자인 스쿨 학생들의 쇼가 있을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그들의 전통적인 요소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종교적 색채로 가득한 스타킹과 치마, 우리나라로 치자면 자개장 무늬와 같은 러시아만의 오랜 패턴을 담은 옷들은 과거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지만 다분히 현대적이었다. 디자인 자체는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자국의 큰 패션 행사가 열렸을 때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려는 의지는 감명 깊었다.
지하철 여행
러시아인에게 관광지를 추천해달라고 하면 지하철역을 이야기할 만큼 모스크바에 가면 지하철역을 꼭 들러봐야 한다. 러시아 문학 및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아티스트들이나 역사적인 인물을 장식해놓은 공간은 지하철역이 아닌 뮤지엄처럼 느껴지기도. 흥미로운 점은 지하철을 타려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한다는 것. 어떤 지하철역은 들어가는 데만 3분이 걸린다고 하니, 이런 곳을 쇼장으로 꾸미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의 한 수
늦은 밤 모스크바 패션 뮤지엄에서 열린 러시아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아루튜노프 (Alexander Arutyunov)’의 쇼는 가죽 팬츠부터 블라우스, 깃털로 잔뜩 뒤덮인 빅 백과 자잘한 러플이 달린 피날레 드레스까지 우아함과 스트리트 무드가 공존하는 룩들로 가득했다. 여기에 모델들이 착용한 안경은 신의 한 수. 고상한 룩에 안경 하나 얹었을 뿐인데, 러시아만의 멋진 올드스쿨 룩이 되었다. 안경 쓰는 게 싫어서 지난해 라식을 했는데, 패션 아이템으로 새로 사야 하나 싶었다.
아나스타샤의 실험실
이제 막 브랜드를 꾸리는 신인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보여주는 프로젝트 ‘Futurum Moscow’ 행사에 참석한 날, 유독 눈에 띈 컬렉션이 있었다. 브랜드 이름은 ‘하이프노그래픽(Hypnographic)’. 한눈에 봐도 엄청난 작업 시간이 필요했을 드레이핑과 쿠튀르적 요소가 가미된 옷들이 가득했고, 가녀리고 섬세한 쇼 분위기는 점점 갈수록 실험적이고 기괴해졌다. 백스테이지에서 디자이너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한국으로 돌아와 몇 가지 질문을 보냈다. 답변을 통해 다시 만난 디자이너 아나스타샤는 수줍은 소녀이자 심오한 예술가였다.
본인과 브랜드 소개를 해달라. 이름은 아나스 타샤 모토리나(Anastasia Motorina), 2016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하이프노그래픽’이라는 실험적인 브랜드를 만들었다. 리듬과 그래픽이라는 큰 틀에서 영감을 받아 입체적이고 복잡한 형태의 옷을 만든다. 사실 내 옷은 입기에 불편하고, 아직은 완벽하게 ‘옷’이라고 불릴 수도 없다. 브랜드의 발전 단계에 서 있는 지금은 더 연구하고 다양한 실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컬렉션 안에 부드럽고 섬세해 보이는 룩이 있는가 하면 강인하고 기괴해 보이는 룩도 있었다. 이렇게 하나의 컬렉션 안에 정반대 분위기의 룩을 풀어낸 이유는 무언가? 그리고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그저 미래적인 디자인에 사람들이 보았을 때 최소한 예쁘다고 느낄 만한 옷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가 우주, 해부학, 생물학, 식충식물 등으로 관심이 확장되면서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상반적인 요소에 꽂혔고, 그것을 의상에 담아 냈다. 부드럽고 거친 것, 가볍고 무거운 것, 그래픽, 컬러 등 상반되는 것들을 고의적으로 충돌시켜서 드러나는 느낌을 즐겼다. 기괴한 디자인으로 바뀌어가는 것쯤은 두렵지 않았다.
본인의 성향을 컬렉션의 순수한 면과 거친 면 으로 나눈다면 어떤 쪽에 속할 것 같나?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순수하고 거친 면이 동시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나 또한 그렇다. 나는 평균적으로 착하고 친절하지만 사회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예술을 소통의 창구로 여긴다. 말로 할 수 없는 좋은 감정을 의상으로 풀어 내거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창작의 에너지로 쓴다. 디자인은 남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넓은 감정의 폭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멋진 작업이다.
넘실대는 파도를 보는 듯한 드레이핑 기법이 인상적이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았던 점과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사실 가장 힘든 점은 나만의 상직적인 아이디어를 찾고 개발하는 일이다. 제작 과정의 고단함이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배우고 기량을 키우는 모든 과정을 기꺼이 즐기니까. 그건 명상과도 같다. 물론, 필요한 소재나 기술 부족이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길고, 복잡하고, 고통을 인내하는 과정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옷을 만들 때 방을 실험실처럼 만들고 스스로 미스터리한 실험을 하는 화학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낄 때 가장 행복하다.
어떤 브랜드로 키우고 싶은지, 그리고 특별히 하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무엇인지? 기술적인 능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고, 이번에 했던 컬렉션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고 싶다. 아티스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복잡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필수니까. 의족이나 의수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도 생각 중이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시선이 바뀌는 만큼 보철 디자인도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 이 분야에 대해 깊게 연구해보고 싶다.
- 패션 에디터
- 장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