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드는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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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존재가 묻어나고,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을 수 있는 델보 백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장 콜로나에게 ‘르 보(Le Beau)’와 ‘보떼(Beaute)’의 차이점을 배웠다.

델보와의 협업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이번 협업은 아주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예전부터 델보의 가방이 너무 좋아서 내 안에서 하나의 집착처럼 델보를 떠올리곤 했다. 어느 날 델보의 장 마크 회장님에게 연락해 협업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얼마 후 회장님이 브뤼셀로 가서 델보 디자인 팀을 만나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협업 제품으로 델보의 가방 중 ‘브리앙’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솔직히 처음 선택은 브리앙은 아니었다. 나는 나만이 생각한 디자인이 있었고, 지금처럼 부드러운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브뤼셀 아틀리에에서 브리앙의 버클을 보는 순간 이 버클을 디자인에 차용하기로 결정했다. 가방을 드는 애티튜드, 가죽의 종류, 가방 안쪽의 라이닝, 전체적인 모양은 브리앙과 다르지만, 사람들은 브리앙의 시그너처 버클 하나로 이 가방을 브리앙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브리앙을 상징하는 이 버클은 내 가방에서 사실 버클이 아니다. 내가 만든 가방의 이 버클은 브리앙에서처럼 잠금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L’XXL’ 백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어떤 것인가? 애티튜드를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보통 브리앙 같은 럭셔리 백은 소중하게 다루 게 되지만 내가 만든 백은 가방을 ‘리스펙트’하지 않아도 된다.(웃음) 구기기도 하고 오토바이 타면서 들고 다니기도 하고, 흙과 먼지를 묻히기도 하며, 눈과 비가 와도 들 수 있다. 남자든 여자든 아무나 들 수 있으며, 아무렇게나 물건을 집어넣고, 가방 안에서 물건은 서로 엉키기도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가방은 주인에 따라 삶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나? 이 백은 서로 다른 그 애티튜드를 보여주기 위한 가방이다.

델보는 럭셔리 브랜드지만 클래식한 동시에 굉장히 창의적인 브랜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진정한 럭셔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퀄리티이다. 럭셔리란 굉장히 이기적인, 나만을 위한, 당신만을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기 위한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당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백을 예로 들면, 가죽을 먼저 보라. 최고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브뤼셀에 위치한 델보의 장인이 가죽을 선택하고 자르고, 모양을 만들고, 정교한 스티치 작업을 거치고, 모든 제작 과정이 끝난 후 가방을 더스트 백에 넣기까지, 모든 작업을 다 한다. 요즘 가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만드는 브랜드는 거의 없다. 나는 그 모든 제작 과정이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것 자체가 바로 럭셔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럭셔리 백이란 한때 잠깐 들고 마는 백이 아니다. 럭셔리 백은 세대를 거쳐 물려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아들에게 혹은 딸에게 가방을 물려줄 때 그들은 단순히 가방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일부를 함께 가져가는 것이다.

당신은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다. 가방 디자인은 옷을 디자인할 때와 다른 점이 있었나? 같은 영혼이다. 바탕은 변하지 않는다.

이 백을 디자인할 때 델보 디자인팀과의 마찰은 없었는지? 노코멘트! 사실 노코멘트가 아니라, 디자인팀과의 마찰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기존의 백을 만들던 디자이너들과 완전히 다른 가방을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가방은 델보의 기존 가방과 동일한 DNA를 가지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디자인팀에서는 100% 내가 원하는 가방을 만들 수 있게 해주었다.

장 콜로나가 디자인한 델보의 블랙과 브라운 컬러 ‘L’XXL’백. 부드러운 가죽과 잠금 기능이 없는 버클 장식이 특징이다.

장 콜로나가 디자인한 델보의 블랙과 브라운 컬러 ‘L’XXL’백. 부드러운 가죽과 잠금 기능이 없는 버클 장식이 특징이다.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패션에 몸담으며, 창의적인 일을 해왔다.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재충전하기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이 있는지? 알다시피 나는 일의 인생과 개인의 인생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인생은 하나다. 마치 하모니처럼, 나는 일할 때도 에너지를 얻고, 늘어져 있을 때도 에너지를 얻고, 나는 모든 것에서 긍정의 에너지를 얻는다. 백을 만들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전시회에서, 영화를 볼 때, 심지어 지금 인터뷰하는 것조차 말이다. 당신의 질문도 아주 좋다. 모든 것이 나에게 영감이다.

당신이 만든 백은 어떤 여성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가? 아름다운 사람! 내가 굳이 프랑스어 ‘르보(Le Beau)’라고 말한 이유는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그냥 ‘Beauty’를 불어로 바꾼 ‘보떼(Beaute)’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겉이 예쁜 것이 아닌 내면이 충만한 것을 말한다. ‘당신은 아름답네요(Tu es Beau)’의 ‘Beau’는 영어로 바꾸기 어려운 단어다. 영어의 ‘Handsome’, ‘Pretty’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로, 나는 이 단어를 참 좋아한다.

당신은 몇 해 전 당신의 브랜드로 컴백했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오랜 시간 패션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나한테는 모든 것이 원동력이다. 심지어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 또한 원동력이 된다. 한 시즌을 하고 또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하나의 시즌인 것이다. 나는 1984년부터 디자인을 시작했다. 언젠가 끝난다면 그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아이디어, 영감, 작업은 처음 시작할 때와 여전히 같다. 내가 디자인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못 볼 것이다(죽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당신은 남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나? 나는 반항심이 많은 아이였다. 남들과 달랐다. 내 커리어가 시작될 무렵, 라크루아가 한창 활동하던 1989년만 해도 반항은 하나의 디자인 트렌드였다. 반항하기 위해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변하기 위해 내가 변하기 위해 반항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반항이 내 안에 내재되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표현했을 뿐이다. 남과 다르기 위해 반항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 비행과는 다르며, 나는 그저 나란 존재가 원하는 것을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직 내 안에 살아 있다.

‘L’XXL’ 가방 역시 그런 것 중 하나인 건가? 나는 협업을 돈이나 이미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협업은 내가 무언가에 기여할 수 있거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 말할 수 있을 때 한다. 익히 알겠지만, 나는 코오롱에서 7년을 일할 때도 항상 그것이 내 브랜드라는 마음으로 일했다.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브랜드 자체를 존중하며 일했다. 단지 브랜드만 존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들에게도 같은 마음으로 다가갔다.

론칭 행사를 위해 4월에 한국에 온다고 들었다.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길거리 음식을 먹고 싶다. 나는 지난 2년 반 동안 한국에 가지 못해 한국이 무척 그립다. 코오롱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무려 105번을 다녀왔다. 이제는 서울이 내 두 번째 고향처럼 느껴진다. 조계사를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사계절, 여름과 가을이 다르고 나무의 색이 달라지고. 특히 음식이 너무 좋다. 서울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는 ‘산리’라는 유명 타투이스트에게 서울과 관련된 타투도 받았다. 서울은 그렇게 나의 마음에 남아 있다. 드디어 서울에 다시 가게 되었다니, 무척 설렌다.

패션 에디터
김신
포토그래퍼
김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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