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가 시끄럽다. 재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하여 네 명의 필자가 글을 보내왔다. 보존이냐 파괴냐, 갈림길에 서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쓴 을지로 연가.
We Built This City
We, 서울시민, 을지로, 세운상가, 청계천 사용자 그리고 객석에 있는 관람자들.
Built, Made, Created, Developed, Set, Grew 그리고 Constructed.
This City, 4차산업혁명, 메이커 시티, 도시 재생, 핫 플레이스, 플랫폼 그리고 맛집.
세운상가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
새해 초부터 을지면옥이 철거된다는 뉴스에 을지로 재개발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사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에는 이곳 말고도 전통 맛집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런 노포보다 훨씬 더 많은 공구 상가와 소규모 공장이 있다. 무엇보다 도심의 거대한 기차 같은 세운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세운상가 일대는 서울의 중심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산업 시설 중 하나다. 세운상가는 하나의 건물 이름이 아니라 종로에서 퇴계로 1km에 이르는 8개 건물군을 말한다(종로에 있던 현대상가는 2009년 헐려 현재 7개 건물이 남았다). 세운-대림-삼풍-신성이라 이름 지은 4개의 덩어리는 멀리서 보면 마치 ‘거대한 기차’ 같다. 이곳은 서울 한가운데인 종로, 을지로, 청계천을 관통하는 중심부임에도,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 탓에 어둡고 활기를 잃은 지역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제거해야 하는 ‘흉측한 유산’이 되었다. 본래 ‘세상의 기운을 끌어온다’는 의미를 지닌 최첨단 건물이었다. 3층 공중에 시민이 다니는 데크를 만들고 옥상에 정원과 광장을 만드는 개념은 당시 최신의 건축 사조였다. 보행자와 차량의 동선 분리를 통해 거주자가 더 편리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으며, 상가와 주거, 공원, 놀이터, 우체국, 은행까지 갖추어 건물 자체를 하나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담겨 있었다. 하지만 8개나 되는 건설사와 각자 다른 조합 방식으로 개발을 추진한 탓에 부실 공사가 됐고, 시공 과정에서 당초 계획이 크게 훼손됐다. 1층에는 차도와 보행로가 혼재되어 있고, 부실 공사를 한 데크는 점차 낡아 사람들이 찾지 않게 됐다. 결국 강남 개발이 마무리되고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면서 많은 사람이 떠났다.
2000년대 들어 서울시는 상가를 허물고 공원화한다는 대규모 철거 계획을 발표했지만 진척이 없었고,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는 공중 보행교마저 철거되었다. 재개발 계획이 다섯 번이나 좌초되는 등 수많은 논란 끝에 2014년부터 ‘다시-세운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1단계 공사는 종로에서 청계·대림상가 구간의 단절된 공중 데크를 연결하고, 데크를 입체 교각으로 만들어 그 자리에 메이커 스큐브를 넣어 전시실, 휴게실, 메이커 입주 공간, 그린셀 등으로 디자인했다. 2단계는 도심의 전통적인 인쇄산업을 살린다는 계획인데, 공사가 완료되면 세운상가의 본모습을 최대한 살려 다시 사람들이 살고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네덜란드의 도시 행정 및 계획가 제프 헤멜(Zef Hemel)은 세운상가에 대해 “모더니즘의 이상(理想)을 담은 독특하고 거대한, 기념비적 건축물”이라고 평가한다. 주거와 상업 시설을 섞는 주상복합의 개념을 넘어 건물 자체가 하나의 ‘도시’처럼 기능할 수 있도록 건축이 도시로 확대되는 개념이다. 더불어 이곳은 단순히 상가가 즐비한 데가 아니라 오랜 시간 머물며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서로 두터운 신뢰와 문화 의식을 공유하는 곳이다. 도심에서 이와 같은 생산적 기능을 가진 장소는 도시의 자급자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생산적 기능과 문화적 공간 제공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수용하는 세운상가가 도심 속 산업 지역의 미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세운상가는 을지로와 별개의 건물이 아니다. 이곳이 오랫동안 도심 산업지로 작동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가치를 인정받고 또 재생될 수 있는 것이다. 공구 상가나 소규모 산업 시설 없는 을지면옥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을지로 재개발로 너무 많은 기억을 지워버린 세운상가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글 | 심영규(건축기획사 ‘Project Day’ 대표)
◎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2013년 이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청계천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세운상가를 서울의 새로운 얼굴로서 무대 위로 올린다. 그리고 2013년 이후,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을 새로운 얼굴로 다시 무대 위로 올린다. 2013년은 갑과 을의 전쟁이 가장 뜨거울 때다. 그리고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은 가장 차가운 지역이었다. 이명박, 오세훈 전 서울시장들이 선택한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은 청계천 상인들의 가든 파이브로의 이주 그리고 세운상가 전면을 지우고 마련한 1,000억원 규모의 세운 초록 띠 공원으로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이 가지고 있던 도심의 산업 생태계는 일시에 붕괴되었다. 이러한 결과로서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차가운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 신호탄 2013년, 나는 청년들의 고민 중에서 기회의 박탈감에 주목했는데, 청년 작가들의 고민 중에서 창작 발표 기회의 박탈감이 매우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학 강사 시절 알게 된 청년 작가들에게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창작 네트워크를 제안했고, 창작자, 장인, 기술자, 활동가, 개발자, 상인 등과 관계하는 무대가 가능하도록, 이미지, 콘셉트, 프로그램, 활동가 등을 제공했다. 2013년, 800/40을 시작으로, 300/20, 200/20을 세운상가 군에 공개하였고, 전시, 공연, 워크숍, 세미나, 레지던시 프로그램, 출판, 페스티벌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의 활동은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의 창작자, 장인, 기술자, 활동가, 개발자, 상인 등과 관계하는 새로운 유형의 네트워크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 도시 재생, 박원순, 재개발 2015년, 서울시는 세운상가 활성화 종합 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중구청은 을지로 디자인 예술 프로젝트를 발표 한다. 2015년, ‘Slow Slow Quick Quick’을 서울시 중구 산림동 1번지에서 공개한다. 그리고 ‘생산’에 주목하며,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에서 제작, 공개, 유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모든 활동가의 결과물은 프로덕션으로 간주하여, 유통이 가능하도록 설계, 제작, 공개하였다. 비둘기 오디오&비디오 페스티벌, 멋진 신세계 (2015 다시 만나는 세운상가) 등을 통해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창작자 그리고 네트워크를 소개하였고, 비둘기 (세운청계상가 3층 가열 312호) 공간을 통해 프로덕션을 유통할 수 있게 하였다. 2018년,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은 도시 재생, 4차산업혁명, 다시-세운 프로젝트, 젠트리피케이션, 관(官)트리피케이션, 재개발, 메이커 운동 등의 무대가 올려지는 곳이 되었다. 그러면서 여러 곳에서 축포, 축제, 축하가 이어졌다.
◎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1963년, 한나 아렌트는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선택이 평균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악행은 일어난다고 했다.2019년, 청계천, 세운상가, 을지로 지역은 서울시, 중구청 등의 이익이 교차하면서 그리고 서울시, 중구청 등의 상식이 교차하면서, 갑자기 무중력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을지로 재개발은 갑자기 그리고 빠르게 철거로 시작되었다. 박원순 현 서울시장은 을지로 재개발을 전면 재검토를 선언했지만, 이미 을지로 도심 산업 생태계는 파괴되었다. 2019년 2월, 을지면옥은 소실점이 되었고, 현대정밀, 우영정밀, 광명상사, 선우정공, 경성공업, 을지금속, 유진식당, 미림마트, 영광주물, 대한전기, 일성아크릴, 광신공업, 일심공업, 알파전기, 대우전업사, 광신공업, 대성볼트, 태창전기, 삼능전기, 대광전기, 동일통신, 유원상사, 유성볼트, 진영기업, 평안상사, 한화상사, 대성앵글, 대진기계, 대천유압, 명궁, 삼일정밀, 청계호텔, 예능공업사, 천광기전, 동일통신 등은 풍경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도시를 지었다. 글 | 양아치(작가)
을지로의 풍경을 만드는 건물, 간판, 머릿돌
을지로는 서울시청에서 시작해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옆 한양공업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자, 이 길을 둘러싼 남북 구간을 느슨하게 가리키는 말이다.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진출하여 남산 북쪽 기슭에서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 세력이 청계천에 다다른 과정에서 을지로는 오늘날 이 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도시적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을지로에는 조선 시대, 어쩌면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고,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도 존재하지만, 오늘날 을지로에서 20세기 전기의 식민지 시대보다 더 오래된 시기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을지로의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를 말하려 한다. 이 요소들에 주목해서 을지로 거리에 서면, 을지로가 발산하는 독특한 매력을 더욱 깊게 즐길 수 있을 터다.
을지로의 가장 큰 특징은 20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개량한옥과 일식가옥이다. 특히 을지로3가역 서남쪽의 입정동에서는 1960~7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하는 독특한 손글씨 간판이 붙어 있는 개량한옥과 일식가옥이 자리해 이 지역의 고유한 정취를 만들어내고 있다. 을지로는 해방 후부터 1970년대 초중순에 이르는 현대 한국 초기에 세워진 오피스 빌딩이 밀집한 곳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을지로·마포·영등포 등에 오피스 빌딩이 많이 세워졌는데, 그중 을지로가 당시의 경관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20세기 전기의 개량 한옥과 일식가옥, 20세기 후기의 오피스 빌딩, 그리고 20세기 말에서 현재까지 부지런히 을지로 일대에 들어서고 있는 고층 빌딩은, 현대 서울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삼문화광장(三文化廣場)’이라는 중층적인 시간의 지층, 즉 시층(時層)을 이루고 있다.
현대 한국 초기에 을지로에 세워진 오피스 빌딩에서는, 외부로 드러난 계단과 정문 근처에 붙여진 머릿돌이라는 두 가지 매력 포인트가 확인된다. 외부 계단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탈출할 수 있도록 설치된 것으로, 도쿄 등 일본의 대도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다. 한국에서는 특정 시기에 일본과 유사한 형태의 외부 계단을 설치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가 그 후 규제가 완화되었다. 외부 계단 설치가 의무였던 1960~70년대에 세워진 을지로의 빌딩에 설치된 외부 계단도 을지로의 독특한 풍경을 만든다.
한편 머릿돌이라고 하면 ‘정초(定礎)’ ‘준공(竣工)’ ‘머릿돌’ 등의 글자와 준공 일자를 새긴 돌을 가리킨다. 현대 한국의 건물에서 확인되는 머릿돌의 원형은 일본의 정초석(定礎石)으로 생각되며, 근대 일본의 건물에 많이 부착된 정초석의 원형은 유럽의 코너스톤 (Corner Stone)으로 생각된다.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Albert Taylor)가 1923년 종로구 행촌동에 세운 딜쿠샤(Dilkusha)의 코너스톤이 전형적이다.
필자가 이제까지 을지로에서 확인한 머릿돌은 크게 두 계열로 나뉜다. 하나는 을지로3가 창림빌딩의 ‘전기(奠基)’ 머릿돌이다. 고대 중국에서 건물을 세울 때 지내던 전기 의례에서 그 이름을 따온 ‘전기’ 머릿돌은, 명동에 서 있는 타이완 계열의 삼민주의대동맹 한국 지구 및 한성화교협회의 ‘영전사기(永奠斯基)’ 머릿돌과 상통한다.
창림빌딩을 제외한 을지로의 대부분 건물에는 ‘정초( 定礎)’라고 적힌 머릿돌이 있다. 정문이 잘 보이는 곳에 정중하게 배치한 대한전기협회, 경림인쇄 건물, 유진커피숍 건물, 을지빌딩 등의 머릿돌을 보고 있으면, 건물에 대한 건축주와 건설 시행사의 애정이 느껴진다. 석정빌딩(石亭삘딍)처럼 정문 옆의 좁은 틈에 어떻게라도 자리를 마련하거나, 문영빌딩처럼 정문 옆의 벽면에 붙인 경우도 있다. 1960~70년대 을지로의 건물들에는 정문에 머릿돌을 붙일 자리가 없어도 어떤 형태로든 머릿돌을 배치하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최근 지어지는 몇몇 건물에는 머릿돌이나 준공표지판이 붙어 있지 않아서, 현장에서 건물의 내력을 확인할 수 없다. 건축물대장을 떼어보면 준공일자 등을 알 수 있지만, 건물에 대한 건축주 · 건설시행자의 감정과 같이 장부로는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정보는 머릿돌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2차 자료보다 실물에서 훨씬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연구 분야인 문헌학의 대원칙이며, 머릿돌은 ‘도시 문헌학’의 좋은 자료다.
현재 을지로는 강한 개발 압력 아래 놓여 있다. 이곳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미처 답사하지 못한 건물과 길이 지금 이 순간 철거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 2018 년 3월에 을지로 3가에서 충인빌딩이라는 이름의 현대 한국 초기 건물이 철거되는 광경을 보았다. 이 건 물에는 머릿돌이 있었을까? 내부 계단은 어떤 모습 이었을까? 이 건물과 그 주변의 개량한옥 · 일식가옥은 어떤 경관을 그리고 있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한 채로 서울은 또 하나의 시층을 잃었다. 글 | 김시덕(<서울선언> 저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노포를 위한 나라는 없다
먼저 을지면옥에 대해 한마디 해야겠다. 이 가게를 비롯해서 양미옥, 통일집 등 을지로3가 일대 재개발에 대한 기사가 나가고 언론이 시끄러웠다. 다른 가게도 그렇지만 을지면옥이 없어진다는 기사의 반향이 컸다. 최근 몇 년간 불어닥친 냉면 바람 때문이었을까. 을지면옥을 ‘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서울시는 급기야 재개발 재검토설도 내놨다. 이 와중에 을지면옥이 재개발 보상금을 거액 요구했다는 말이 나왔다. 이런 반응은 별 가치가 없다. 을지면옥은 재개발하면 막대한 영업 손실을 입는다. 근처에 이전 개업하면 대체로 매출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피맛골 영업 가게들이 재개발 후 이익이 현저하게 나빠졌다). 같은 면적일 때 임대료도 크게 차이 난다(현 가게는 물론 자가 소유다). 더구나 을지면옥은 바깥에 써놓은 페인트 간판 글씨조차 지우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것에 대한 감이 있는 집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사실을 안다. 새 건물에서 영업하는 을지면옥은 어쩌면 지금의 을지면옥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제대로 보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 무엇보다 을지면옥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어 한다. 새로 건물을 올리든, 가게를 접든 말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도시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시는 영원할 수 없다. 인위적인 설계와 건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수명이 있다. 더구나 현재의 을지로3가 지역은 낡았고, 최초에 도시가 올라갈 때 먼 장래를 보고 설계되지 않았다. 일본인이 서울을 경성으로 만들고 난 후 도시계획을 실시했고, 이곳은 혼마치(명동)와 함께 전형적인 일본인의 경제 활동 지역으로 조성됐다. 60년대에 적산을 헐고 새로 건물이 올라갔지만 이 역시 먼 장래까지 내다본 도시 재개발은 아니었다. 그사이 을지로3가는 철공소와 금속 제작소가 번성하면서 대한민국 산업의 전초 기지로, 각종 공구와 조명 상품의 도소매상 구역으로 성장했다. 청계천 개발로(을지로와 청계천 남쪽은 공동운명체다)도 이명박 정부 때 한 차례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전면적인 재개발보다는 보존을 우선시하는 서울시 정책이 을지로3가의 명성을 유지시켜왔다. 그러나 최근 세운상가 재개발 등과 연결하여 을지로3가 일대도 ‘부수고 새로 짓는’ 재개발이 허용되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기존 서울시의 정책 태도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과연 을지로3가는 헐지 않고는 도시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회의적 시선을 만들어냈다. 건물과 토지주에게는 재산권을 행사하는 방법이겠지만, 한 도시의 구역이 없어진 다는 건 을지로3가 일대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리셋을 가져온다. 그것을 우리는 인문적 기억의 소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도시는 건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억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을지로 노가리골목도 마찬가지다. 도시계획에 따라 골목이 정확히 반분되어 반쪽만 남게 되었다. 그냥 술집 거리이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면 이 골목도 이미 준문화재급, 공공재 성격을 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재개발에 시민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프다. 노포는 가게 주인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자산이라고 나는 명명한 적이 있다. 오래된 것의 힘을 우리는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끼다시’ 바닥의 을지면옥 냉면도, 가게를 들어설 때 복도의 추억도, 노가리 골목의 그 멋진 밤풍경도 그냥 다 잊어야 하는 걸까. 글 | 박찬일(로칸다 몽로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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