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K-Beauty

W

저렴함으로 승부하거나 한방 화장품이 주류를 차지하던 시장에 모던한 감도와 첨단 뷰티 과학을 접목한 새로운 뷰티 신이 펼쳐지고 있다.

1211_B.T Setting_101244-완성 사본

대체 K-뷰티 브랜드는 몇 개나 되는 것일까? 10여 년 전, 뷰티 에디터로 처음 일할 때만 해도 국내 뷰티 브랜드 중에 모르는 브랜드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요즘엔 온라인 몰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난생처음 보는 국내 브랜드를 접하는 것은 물론 올리브영에 가서 생소한 이름의 제품을 만나는 일도 잦아졌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화장품 제조업체와 제조판매업체로 등록 된 수는 2017년 기준 무려 180개. 2012년만 해도 15백 개에 못 미쳤는데, 10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화장품 무역은 지난 7년간 꾸준히 흑자를 기록했으며, 2017년 한 해에만 4조원을 가볍게 뛰어넘었다니 K-뷰티가 절찬 흥행 중인 것은 사실. 그러나 늘어난 규모만큼 매력도 높아졌을까? 고백하자면, K– 뷰티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사이 나는 한동안 K-뷰티에 시큰둥해졌다. 하나의 아이템, 성분이 인기를 끌면 특색 없이 유사한 제품이 대거 출시돼 천편일률적으로 느껴졌기 때문. 트렌드에 발 빠른 대응이 K-뷰티의 성공 요인이긴 하지만, SNS에서의 ‘대란템’ 이후, 그 브랜드들의 생명력은 얼마나 지속되는 걸까? 수출 역군 시트 마스크는 3년 뒤에도 뷰티 업계의 ‘핵인싸’일까? 제품의 성능만을 강조한 투박하고 올드한 패키지, 현란한 간판 같은 디자인 때문에 제품 화보 촬영 시 몇몇 한국 브랜드는 슬쩍 밀어놓은 적도 있다. K-뷰티의 원료 제조사들이 확보한 놀라운 원천 기술은 믿음직스럽지만, 브랜딩은 글쎄? 그러다 보니 카일리 제너의 ‘카일리 코스메틱’이나 메이크업 아티스트 팻 맥그라스의 ‘팻 맥그라스 랩’, 리하나의 ‘펜티 뷰티’ 같은 창업주의 개성이 오롯이 담긴 뷰티 아이템을 직구하거나, 언제 들여다봐도 풍부한 아카이브와 고집이 담긴 철학, 스토리로 무장한 전통의 강자들에 새삼 감탄하기도 하면서 지난 한 해를 보냈다.

 K – 뷰티 시크해질 수 있다

Eath library 와이즈 어웨이크닝 어드밴스드 브라이트닝 토너 수분을 즉각적으로 공급해 피부를 맑게 유지해준다. 150ml, 7만8천원.

Eath library 와이즈 어웨이크닝 어드밴스드 브라이트닝 토너 수분을 즉각적으로 공급해 피부를 맑게 유지해준다. 150ml, 7만8천원.

그런데 나처럼 K-뷰티의 매너리즘에 비판적인 이들의 태도를 변화시킬 새로운 흐름이 포착되고 있다. 지난해(혹은 그전부터) 약진하거나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브랜드 중에 가성비를 넘어 가심비까지 만족시키는 신성이 여럿 눈에 띄고 있기 때문. 탬버린즈, 헉슬리, 모트앤베일리와 같은 정제된 감도의 브랜드들에 이어 최근 가장 인상적으로 론칭한 브랜드는 바로 이스 라이브러리 (Eath Library)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양태오가 한의사, 갤러리 큐레이터와 함께 만든 브랜드라는 사실만으로도 솔깃한데, 론칭 스토리를 들으면 당장 써보고 싶어진다. 불면증을 앓던 양태오 대표가 여러 치료를 전전하던 중 한의사 장동훈 원장이 처방한 차를 마시게 됐는데, 그 차가 수면을 도왔음은 물론 안색까지 몰라보게 환하게 바꿔준 것. “홍삼, 녹용, 숙지황 등이 섞인 한방차였는데, 피부가 엄청나게 맑고 환해졌어요. 주변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요. 원장님께 그런 반응을 전하면서 꼭 그 성분을 연구해보시라고 했죠.” 원료 수급과 선별은 장동훈 대표의 몫인데, 십수년간 직접 생산지를 찾아 생산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고 실제 인체에 효과가 있는지 실험을 통해 밝혀낸 유기농 재료를 선별해 담았다. “지난해 여름 국내 원료 생산지를 함께 투어했는데, 그 여행만으로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느낌이 들었다니까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양태오 대표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전통적이면서 동시대적 느낌을 살린 디자인을 더했다. “한국의 단색화와 현대미술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제품 자체의 아름다움도 중요했지만 공간에 놓였을 때 어우러질 모습도 고민했죠. 너무 화려하지 않지만 충분히 존재감 있는 모습으로 화장대나 세면대 위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으면 했어요.” 이런 완성도 덕분인지 벌써부 터 영국 등 해외 편집매장과 백화점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이 제품들은 한옥을 개조한 소격동 쇼룸에서 판매되는데, 한약방의 약재 서랍 디자인을 활용한 인테리어가 아주 우아하다. 이곳에선 웰컴 티를 마시고 엄선된 음악을 들으며 브랜드의 전모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Yunjac 전초 에센셜 크림 탄탄하고 견고한 피부 장벽을 세워주는 크림. 50ml, 10만원.

Yunjac 전초 에센셜 크림 탄탄하고 견고한 피부 장벽을 세워주는 크림. 50ml, 10만원.

2018년 하반기 (주)신세계인터내셔날에서 야심 차게 론칭한 연작 역시 K-뷰티의 새로운 한방 브랜드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글로벌 화장품 전문 제조사 인터코스와 세계적인 식물 과학 연구소 비타랩의 기술 제휴로 한방 원료를 뿌리부터 꽃잎까지 정교하게 추출해 제품에 담아내는데, 제품을 경험한 고객들의 재구매율이 월등히 높다고 한다. 기존 한방 브랜드의 틀을 깬 심플한 패키지 역시 브랜드 이미지를 신선하게 했다는 평.

한층 모던해진 K-뷰티 브랜드를 말할 때 아비브 (Abib)도 빼놓을 수 없다. 호주 브랜드 그로운 알케미스트를 연상시키는 미니멀하고 시크한 디자인으로 승부수를 던진 아비브는 2017K-뷰티 편집숍 ‘피치 앤 릴리’를 운영하는 알리샤 윤이 뉴욕 버그도프 굿맨 K-뷰티 팝업 매장을 열 때 소개한 다섯 브랜드 중 하나였다. 곡식의 이삭을 의미하는 이름답게, 피부의 자생력을 최대화하는 데 집중한 스킨케어 브랜드로, ‘약산성 pH 시트 마스크’와 ‘페이셜 솝’이 대표 제품.

국내외 매거진 어워드를 석권해 해외에서 더 유명한 코스알엑스 (Cosrx)도 기억해야 할 브랜드. 2018년 아마존 프라임 데이에 ‘밸런시움 컴 포트 세라마이드 크림’이 아마존 페이셜 모이스처라이저 신제품 부문 1위를 거머쥐면서 인기의 정점을 찍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밀레니얼 세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코스알엑스는 군더더기 없는 성분과 패키징으로 뉴요커 매거진 팝업 스토어, 어반아웃피터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게 나올 줄은 몰랐지

Positive Hotel PH지중해 올리브 이탈리아산 최상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캡슐에 담았다. 2캡슐 x 30개입, 1만7천원.

Positive Hotel PH지중해 올리브 이탈리아산 최상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캡슐에 담았다. 2캡슐 x 30개입, 1만7천원.

스킨케어의 강세 속에 재기 넘치는 아이템과 콘셉트로 무장한 브랜드도 출현하고 있다. 이너 뷰티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는 파지티브호텔은 그 선두 주자. 뷰티 콘텐츠 디렉터 백지수는 “K-뷰티의 성공은 한국 여성의 뷰티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실천력, 집요하고 섬세한 리뷰, 이를 공유하길 좋아하는 환경에서 비롯했죠. 파지티브 호텔 (Positive Hotel)은 바로 거기에 정통한 한국 여성들에 의해 탄생한 브랜드예요”라고 설명한다. 국내의 유일무이한 헬스&뷰티 디렉터라고 할 수 있는 안미선, 오리온 마켓오와 아모레퍼시픽 등의 굵직한 브랜드를 두루 거친 디자이너 길정민이 모여서 만든 파지티브 호텔은 아름다운 것은 건강하지 않을지 몰라도 ‘건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모토로 탄생했다. 국내 내로라하는 아이돌 중 그녀를 거쳐가지 않은 이들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가수, 배우의 뷰티 컨설팅을 책임지는 안미선 대표는 다이어트와 피부 건강을 위해 지속 가능한 식단이 필요했고, 이동 중 밴에서도 언제든지 쉽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을 개발하길 원했다. “식단을 정해줘도 챙겨 먹기 어렵고, 정확히 지키기도 힘들어하더라고요. 부기 없는 얼굴로 공항 룩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행기 안에서도 먹을 수 있는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제품이 뭐가 있을까 고민했죠.” 이런 필요는 길정민 대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야말로 뷰티에 관해서만큼은 안 해본 것 없는 ‘뷰티 노마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은 ‘잘 먹어야 예뻐진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녀가 제약회사 출신 오빠와 함께 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성분만 큐레이팅해 만든 것이 지중해식 식단의 채소 파우더 ‘굿 인 배드 아웃’이다. 경쾌한 디자인의 먹기 좋은 패키지에 담긴 제품은 연예인이 먼저 체험하고 일반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부기가 빠졌다, 공복감 없이 다이어트할 수 있다, 디톡싱에 더할 나위가 없다’ 등의 후기가 이어지면서 현재는 수요에 맞춰 제품 수급이 어려울 정도. 뒤를 이은 ‘바운스 퍼스트 키트’ 역시 나이가 들면서 얼굴의 베개 자국이 없어지지 않는 고충에 대해 토로하다가 탄생한 제품. 콜라겐과 비오틴의 흡수가 빠른 리퀴드 제형으로 만들고, 비타민 C 알약을 더해 속탄력 키트를 선보였는데, 이 제품 역시 전에 없던 탄력이 살아났다는 뷰티 에디터, 연예인의 간증이 줄을 잇고 있다.

The Tool Lab 101B 베이비 태스커 매끈하고 결점 없는 피부로 표현해주는 초미니 브러시. 2만5천원.

The Tool Lab 101B 베이비 태스커 매끈하고 결점 없는 피부로 표현해주는 초미니 브러시. 2만5천원.

이렇게 유명인이 사용해보고 톱다운 방식으로 소문난 브랜드로 더 툴 랩 (The Tool Lab)도 빠질 수 없다. 글로벌 뷰티 브랜드에 메이크업 브러시를 수년간 개발 및 공급하던 백수경 대표가 자신의 노하우를 십분 살려 탄탄한 제품력과 팬시한 디자인으로 론칭한 브러시 전문 브랜드다. 특히 쿠션을 바를 때 단 5번에 얼굴 전체를 매끈하게 커버해주는 것으로 유명한 ‘101 멀티 태스커 미니(미니 쓱싹이)’는 파우치 안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로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뷰티 유튜버들 사이에서 이미 인기 아이템.

천천히 성공해서 오래가는 K – 뷰티

초창기 K-뷰티는 한류 붐을 놓치지 않았다. 로드숍 브랜드들이 저렴하면 도 좋은 품질로 주목받았고, 대형 브랜드는 한류 스타와 함께 공격적으로 진출하며 입지를 굳혔다. 전 세계에 11팩을 전도한 시트 마스크 열풍은 현재 진행형이고, 인플루언서 화장품은 색조에까지 손길을 뻗치며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남녀 불문 상향된 테이스트에 걸맞게 개성 넘치는 인디 브랜드, 전문가들이 고집을 가지고 만든 브랜드, 작아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 모던하고 아이코닉한 브랜드들이 K-뷰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부가가치 또한 높일 것이다. 스킨케어가 대부분인 환경에서 메이크업이나 향수, 보디 브랜드가 무럭무럭 자라 내년 초에는 K-뷰티의 뉴웨이브를 소개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런 흐름이 이어져, 세계의 많은 나라에서 엄마가 쓰던 K-뷰티 브랜드를 딸도 쓰는 날이 온다면 더 좋겠다. 이런 브랜드들은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니까.

뷰티 에디터
이현정
포토그래퍼
엄삼철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