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현대미술의 허브로 자리 잡으려는 상하이의 야심이 날로 커간다. 상하이 아트위크 기간에 예술적 인장을 확실히 새긴 전시를 소개한다.
상하이, 해외 현대미술 거장들에 매료되다
이제 ‘3월 홍콩, 11월 상하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상하이는 중국을 넘어 아시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한 미술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상하이 아트위크를 준비하며 가장 신경 쓰는 부분 중 하나가 오프닝 날짜를 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미술계 주요 인사들의 발걸음이 상하이로 몰리는 만큼, 더 큰 주목을 받으려면 고도의 전략과 눈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매년 11월이면 한 달 내내 ‘상하이국제예술제’가 열리고, 그중 한 주 를 아트위크라고 지칭해 관련 이벤트를 연다. 특히 2018년 같은 짝수 해에는 ‘상하이 비엔날레’를 비롯해 아트 페어인 ‘웨스 트 번드 아트&디자인’과 ‘ART021’이 같은 기간에 열리기 때문에 중국 내 미술관들은 해당 기간에 맞춰 야심작을 공개한다. 이미 뜨거웠던 2년 전의 상하이와 비교해 2018년에 감지된 가장 큰 변화는 페어 장소에서 한두 점씩 접할 수 있던 대가의 작품을 상하이 곳곳의 미술관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너도나도 ‘중국 첫 전시’라는 점을 내세운다는 사실. 신생 미술관들이 대가의 중국 내 첫 전시를 성사시키며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전략이다.
상하이 아트위크의 신호탄을 올린 전시는 롱 뮤지엄에서 2월 24일까지 전시되는 프랑스계 미국인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 의 회고전 <The Eternal Thread>다. 그녀의 작업 생애를 관통하는, ‘끊이지 않는 선’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새로운 해석을 시 도한 이번 전시는 1940년대 초기작, 1990년대 셀(Cell) 시리즈 설치작업,후기10년간 섬유를 매체로 한 작업을 포함한 주요작을 소개한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은 단연 거미 형상 의 대형 조각 ‘마망(Maman)’이다. 전시가 열린 웨스트 번드관은 무려 12m에 달하는 높은 층고 때문에 공간이 작품을 압도해 버리는 느낌을 주곤 했는데, ‘마망’이 자리하니 드디어 제 주인 을 만난 듯했다. 2017년에는 영국 현대미술의 거장 안토니 곰리의 중국 첫 개인전을 성사시킨 롱 뮤지엄은 이번 회고전을 위해 무려 6년간 공을 들였다고. ‘상하이 대세론’을 이끈 선두주자다운 행보를 이어가며 과연 다음엔 어떤 대가의 전시를 선보일지 궁금하게 만든다.
와이탄에 위치한 포선(Fosun) 파운데이션에서는 ‘여성’과 ‘몸’을 주제로 작업한 미국 사진작가 신디 셔먼의 전시를 선보였다. 역시나 신디 셔먼의 중국 첫 개인전으로, 2018년 신작 9점을 포함한 대표작 128점과 작업에 사용한 촬영 도구, 작업 과정을 기록한 아카이브 자료 등이 함께 전시됐다. 상하이는 중국 내에서 사진이란 매체와 가장 친숙한 도시다. 중국에서는 유일한 포토 페어(Photofairs Shanghai)가 열리는 데다가 중국 최초의 사진 테마 비영리 기관인 상하이 포토그래피 센터(SCoP)가 위치한 곳이 바로 상하이다. 루이즈 부르주아와 신디 셔먼은 한국에서는 일찍이 전시로 소개된 대가들이기에 자칫 ‘이제 와서?’라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가 있는데, 중국에서 해외 작가의 전시를 성사시키려면 상상을 초 월하는 자본과 한국에서는 생소한 기준 불명의 ‘센서십’ 절차를 통과해야한다. 최근 중국 내 해외 대가의 전시가 잦다는 것은 상하이 베이스의 미술관들이 이를 감당해낼 실력과 열정을 갖췄음을 시사한다. 물론 미술관과 실력 있는 해외 갤러리의 협업 역시 숨겨진 요인 중 하나다.
단색화가 중국으로 간 까닭은?
패션, 뷰티, 영화, 음악,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류’는 20 세기 언어로 느껴질 만큼 진부한 어휘다. 하지만 그 바람이 유일하게 피해 간 곳이 바로 미술계다. 중국에 언제쯤이면 K-미 술의 바람이 불어올까 기다렸지만, 그간 오지 않았다. 2018년 11월, 중국에서 최초로 대규모 한국 추상미술전이 열리며 어쩌면 미술계에도 한류가 통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 대가들에 매료된 상하이가 한국 추상미술 거장들에게도 러브 콜을 보냈으니까. 파워롱 뮤지엄(Powerlong Museum)에서 2019년 3월 2일까지 이어지는 전시 <한국의 추상미술 : 김환기 와 단색화>를 위해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부터 단색화의 대표 작가인 권영우, 박서보, 이우환, 정상화, 정창섭, 하종현까지 참여했다. 스포츠 경기로 치면 국가대표가 총출동한 셈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라인업. 미술관의 명민함이 돋보이는 지점은 또 있다. <한국의 추상 미술: 김환기와 단색화> 전과 하루 차이로 중국 개혁개방 40주년 기념전인 <예술 가40 40 :40인의 예술가를 통해 본 개혁개방 이후 40년간의중국 현대 미술>전을 개최한 것. 이 행보를 계기로 개관한 지 1년밖에 안 된 파워롱 뮤지엄은 상하이 아트위크에서 제대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금껏 교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양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흐름을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서로간의 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게 미술관의 취지다.
극도로 절제되어 왠지 숙연함마저 느껴지는 한국의 추상미술, 그에 반해 각양각색, 천태만상의 면모를 보이는 1978년 이후 중국 현대미술의 만남은 그 자체로 평소 양국의 현대미술을 비교 연구하는 젊은 연구자의 흥미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놀라운 건 이 두 미술의 얼굴이 놀랍게도 닮았다는 점. 특히 1960년대 실험을 거쳐 70년대에 꽃을 피운 한국 추상미술의 중요한 흐름인 단색화와 1978년에 시작해 80년대 말 세상에 공개된, ‘85신사조미술’로 대표되는 중국의 전위 미술은 생김새는 완전히 다르나 비슷한 유전자를 가졌다. 한국은 ‘빠른 경제 성장’과 ‘유신체제’, 중국은 ‘개혁개방’과 ‘천안문 사태’라는 모순이 공존한 시대를 보냈고, 그 시대 미술에는 배고픔은 해결됐지만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저항할 것인가 혹은 모른 척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를 마주한 예술가의 고뇌와 갈등이 담겨 있다. 침묵이 요구되던 시대, 표현하는 일이 사명인 예술가가 느낀 ‘어찌할 도리 없음’의 체념적 태도는 웨민쥔의 눈을 질끈 감고 박장대소하는 자화상과 박서보의 수행과도 같은 반복적 행위를 통해 완성된 ‘묘법’에서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하종현의 ‘접합’에서 화면을 뚫고 흘러나온 물감을 보면 시대를 향해 울분을 토하는 작가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날 양국의 미술이 겉으로 서로 다른 모양을 갖게 된 이유는 사조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한국은 추상미술로, 중국은 사실주의 미술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에 적합하고 익숙한 기법의 표현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또 중국의 경우 1978년 개혁개방을 맞이하면서 이전 30년간 접할 수 없던 서구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동시대 미술이 동시다발적으로 유입됐다. 그러한 흐름은 새로움을 갈망하는 젊은 예술가들의 갈증을 단숨에 해소시켰고, 작가들은 그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모색했다. 이것이 바로 1978년 이후 중국 현대미술이 탄생한 배경이자 이번 전시에서처럼 40인의 작가가 40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던 이유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한국의 추상미술’을 찾았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상하이가 중국 추상미술의 발원지라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20세기 초 한국 1세대 화가들이 일본을 통해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했듯, 같은 시기 중국의 모더니스트들 역시 프랑스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파 작가들은 이후 고국에 돌아와 모더니즘을 전파하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실험을 이어갔다. 당시 그 근거지가 바로 상하이였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중국 미술은 체제 선전에 용이한 사실주의 중심으로 흘렀다. 당시 중국에서 추상미술은 독일 나치가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을 ‘퇴폐 미술’이라 규정하고 탄압한 것과 유사한 상황에 놓였다. 같은 시기, 서구에서 들어와 시작된 한국 추상미술은 우리 고유의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며 주류를 형성해갔다. 중국이 한국 추상 미술에 매료된 이유는 추상미술 거장들의 작품 속에서 과거 자신들이 잃어버린 정신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 단색화에서 강조하는 자기 수양과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자연관은 과거 중국의 문인들이 내세우던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 이건 어떤 수식과 설명도 필요 없이 중국인에게 공명을 일으킨다. ‘전통으로의 회귀’나 ‘전통의 현대화’는 오늘날 경제 대국을 넘어 문화 강국을 꿈꾸는 중국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로, 중국의 시각에서 한국 단색화는 그야말로 가장 닮고 싶은 표본일 것이다.
중국 현대미술은 한동안 세계 미술 시장의 흐름에서 전례가 없을 만큼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 광폭 행보를 보이며 시장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거품은 얼마 안 가 꺼져버렸다. 그러나 ‘시장’의 비정상적 관심에서 멀어진 지금이야말로 중국 현대미술을 좀 더 솔직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점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김환기를 비롯한 단색화 작가를 유독 시장에서의 성과 위주로만 조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파워롱 뮤지엄이 개최한 전시를 통해, 어떤 선입견이나 색안경 없이 한국 추상미술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었다. 중국 현대미술전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얼마에 팔렸는가’에 집중하는 시장에서의 경이로운 기록은 도리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기회를 빼앗은 채 ‘얼마짜리 그림’이라는 수치만 머리에 남기기 때문이다. <한국의 추상미술> 전보다 하루 늦게 개막한 <예술가 40 40 : 40인의 예술가를 통해 본 개혁 개방 이후 40년간의 중국 현대미술> 전은 3월 3일까지 계속된다. 40년에 이르는 중국 현대미술의 민낯을 감상하면 시장에서 성공한 부작용으로 자기 반복과 전복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작가들의 모습도 가감 없이 마주할 수 있다. 이를 이겨낸 작가만이 훗날 미술사에 기록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작가는 잊힐 것이다. 중국보다 한 세대 가까이 앞서간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7인과 그들이 걸어온 길이 중국 현대미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지 않을까?
- 피처 에디터
- 권은경
- 글
- 조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