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 보다 소멸을, 더하기 보다 덜어내기를, 의미보다 재미를 말하는 자이언티. <ZZZ>라는 암호와 같은 앨범으로 돌아온 그가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로부터 벗어난 채로 카메라 앞에 섰다.
자이언티의 시그너처이자 트레이드마크 같은 선글라스가 보이지 않는 촬영이었다. 오늘처럼 화보를 찍을 땐 쑥스럽다. 내 얼굴이지만 정말이지 나도 보기가 힘들다(웃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좀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해지고 싶었달까. 계속 숨길 수만은 없으니까. 사실 눈은 사람을 제일 잘 드러내는 창구이지 않나. 난 그걸 감추고 살았다. 눈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데. 앞으로는 어느 각도에서든,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조금 더 보여주려고 한다.
1년 8개월 만에 선보이는 앨범 공개를 일주일 앞두고 있다. 어떤 바이브로 지내고 있나? 어젯밤 악몽을 꿨다. 평소엔 거의 꿈을 꾸지 않는 편이지만, 일단 꾸면 아주 선명하게 남는다.
<ZZZ>라는 새 앨범의 타이틀이 꼭 암호 같다. 자이언티의 Z, 숫자 3개, 수면과 잠꼬대 등등 많은 것을 연상하게 만든다. 사실 딥하게 설명하자면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것에 대해 굳이 길게 설명한다면 티엠아이(Too Much Information)일 것 같아서(웃음).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거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을거다. 가볍고 재미있게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타이틀곡 ‘멋지게 인사하는 법(Hello Tutorial)’에 레드벨벳의 슬기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이번에 슬기 씨와 함께 작업하면서 깜짝 놀랐다. 녹음하러 와서 5시간 동안 8백 번의 테이크를 쉬지 않고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지친 기색이 하나도 없더라. 슬기 씨의 집념에 감동받았다. 서로 원한 결과가 일치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집 앨범 <OO>를 준비하면서 가장 큰 복병은 비염과 게임 오버워치라고 말했다. 이번엔 무엇이었나? 나 자신(깊은 한숨).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내가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책임감을 느낀다. 결정해야 하는 것도, 이끌어가야 하는 순간도 많아졌다. 그런데 그때마다 내가 꽤 헤매고 있더라고.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답답했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솔로 가수로 혼자 얼굴을 비추면서 활동하고 있지만 사실 ‘자이언티’라는 뮤지션이 한 사람만의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자이언티 곁에는 어떤 조력자들이 함께하나? 프로듀서이자 든든한 파트너인 피제이 형,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인 서원진, 피아니스트 윤석철과 박준우, 프로듀서 조리. 그리고 이름을 언급하면 조금 부끄러워할 많은 사람이 있다. 예전부터 함께해온 사람들과 팀워크가 더욱 견고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앨범 발표와 동시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타나는 차트 순위에 대한 부담감은 없나? 개인적으로는 크게 의식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번 앨범을 위해 열심히 협력한 더블랙레이블 사람들을 생각하면 부담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앨범이 꼭 잘됐으면 한다. 모두가 신나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박수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던 미술 선생님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하면 재미있고 그걸로 돈까지 벌면 신난다고. 그 말이 엄청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 역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 신나기까지 하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웃음).
생활 밀착형 가사, 무한 반복이 가능한 친숙한 멜 로디, 편안함, 그리고 위로와 공감. 자이언티와 대중성이란 단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당신에 게 대중성이란 무엇인가? 예전엔 대중성이라는 표현을 떠올리면 뭔가 공부해야 할 숙제처럼 다가왔다. 요즘엔 좀 다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대중음악이라고 받아들인 후부터 생각이 좀 달라졌다. 진짜 좋은 가요, 대중음악을 만들고 싶다. 이를테면 타이틀곡인 ‘멋지게 인사하는 법’을 소개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명절에 개봉할 것 같은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 영화(웃음).
어느 인터뷰에서 가수에게 가장 중요한 커리어는 정규 앨범이라고 말했다. 자이언티에게 EP, 미니, 싱글, 정규 등이 의미하는 바가 큰가? 이번 앨범을 3집이라고 불러도 될까? 어떻게 불러도 상관 없는 시대이지 않나 싶다. 요즘은 음반이 아니라 음원의 시대다. 이대로 계속 싱글 앨범만 내다가 커리어를 마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사실 앨범을 내기 위해 곡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다. 발표할 수 있는 곡은 이미 너무 많았으니까. 나에겐 그 곡들을 어떻게 추려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어떤 테마와 방식을 가지고 곡을 선별해내는 과정, 곡 마다의 결을 맞추는 과정이 중요했다.
일곱 개의 트랙 가운데 이센스와 함께한 곡도 있다. 곡의 제목이 ‘말라깽이(Malla Gang)’다. 설득? 섭외라고 해야 하나? 그런 과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본인 신곡 나오기 전에 먼저 나오는 거 싫다더니 결국 함께해줬다(웃음). 제목을 듣고서 형이 ‘나 요새 안 말랐는데 내가 해도 되냐?’ 이래서 몸무게와 상관없이 자기 식대로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형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 와서 같이 하자고 했다. 녹음실로 불러서 노래를 들려줬더니 ‘좋네, 야 나 그럼 숟가락만 올리면 되냐? 그럼 1시간만 줘봐’ 이러더니 쓱쓱 뭔가 쓰기 시작했다. 정말로 1시간 만에 끝냈고, 이센스 형이 녹음실을 떠나면서 그렇게 곡이 완성됐다. 진짜 웃기고 재미있는 곡이다.
마지막 곡의 작사가 크레딧에 ‘디어(Dear) 자이언티’라는 이름을 사용한 이유가 있나? 모든 곡이 자작곡이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라는 곡은 작사가가 따로 있다. 어느 날 나에게 장문의 팬레터가 메일로 왔다. 오랜 시간에 걸쳐 기록한 글이었는데 필력과 감성이 너무 좋았다. 다 읽고 나서 마음이 먹먹해졌을 정도로. 그분께 허락을 구하고 편지의 문장을 발췌해서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직접 뵙고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소중한 이야기를 내가 세상에 공개한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크다. 그분의 성함조차 알 수 없어서 ‘디어 자이언티’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함께 앨범 크레딧에 올렸다.
편지 쓰듯이 지극히 내밀하고 진솔한 가사는 자이언티의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양화대교’ ‘꺼내 먹어요’ ‘노메이크업’ 등이 2014년에서2015년 사이에 모두 나왔다. 이런 곡들이 탄생하기전 2013년에 발매한 문제적 앨범 <미러볼>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질감이 있는 앨범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좀 이상한 것에 꽂혀 있었다. DJ 소울스케이프 형을 찾아가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형, 저 한국사람인 것 같아요. 그런 걸 표현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3~4주 만에스스로 재미있게 만든 곡을 추려서 앨범을 냈다. ‘나 이런 걸 좋아해 얘들아~’ 하고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보고 싶었다. 그런데 음악을 들은 주변 뮤지션들의 반응이 ‘이게 뭐야? 구리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 앨범을 통해 배운 게 많다. 어떤 음악에 대해 쉽게 단정하면 안 된다는 걸. 의도가 분명하고 명확한 앨범이라면 그 소리가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을지라도 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나도 다른 뮤지션이 새로운 음반을 발표하면 그 사람이 진짜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음악을 끝까지 들어본다.
뭐랄까, 자이언티는 이전 세대의 음악에 대한 단단한 리스펙을 기반으로 자신의 것을 만드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문세, 전인권, 그리고 패티김 선생님까지. 이 가운데 ‘눈’이나 ‘너와나’처럼 직접 협업으로 성사된 케이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미러볼> 앨범을 준비할 당시 패티김 선생님 소속사에 직접 찾아가서 편지를 써놓고 나왔다. 선생님과의 작업이 성사되기 직전 단계까지 갔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먼저 길을 걸어가신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한 분 한 분 바라보고 있으면 작품 같다. 그런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나는 언제쯤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 생각한다.
고인이 된 뮤지션 가운데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나? (약간의 정적) 유재하 선배님이 한창 녹음하고 있는 스튜디오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녹음실 뒤에 가만히 앉아서 밤새도록 그분의 노래를 듣고 싶다. 유재하라는 아티스트의 음악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 고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가수에겐 언젠가 앨범을 더는 내지 않을 시기가 찾아온다. 그때까지 가치 있게 소비되고 싶고, 서서히 사그라들고 싶다고 말한 적 있다. 치열하고 뜨거운
창작욕, 화려한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상승보다 소멸을 떠올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너무 비관적인가?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 갑자기 무슨 일이 터져서 이번 앨범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왜 사람들은 항상 지나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지 모르겠다. 다 놓치고, 떠나 보내고 나서 말이다. 지금이 너무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최상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만든 이번 앨범도 너무 소중하고, 이 앨범을 소중하게 들어줄 사람들에게 미리 고맙고.
무대 위의 자이언티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자이언티라는 사람에 대해많은 단서를 준 건 예능 방송 <나 혼자 산다>였다. 회사(더블랙레이블)에서 밤새 곡을 만들고 녹음하고 부스스한 모습으로 새벽에 일어나서 양치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졌다. 오늘도 몇 시간 못자고 왔다. 인터뷰가 끝나면 돌아가서 앨범 소개글을 써야 한다. 우리 회사에 한번 와봤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정말 다들 잠을 안 잔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때 누우니까 오히려 잠을 더 달게 자는 것 같다. 불면증 걱정이 없을 정도다. 가끔 오늘은 잠이 잘 안올 것 같다 싶은 날에는 위스키를 한 잔 마신다.
밤을 지새우는 결정적 이유는 완벽주의적 기질 때문 아닐까? 녹음실에서 늘 ‘다시~’ ‘One More Time’을 외치던데. 기본 2천~3천 테이크 정도 가야 녹음이 끝나는 모습도 봤다. 나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노래에 감정을 격하게 담으면 듣기 불편해진다. 계속 ‘다시’를 외치는 건 내가 너무 과한 정보를 담았기 때문이다. 너무 격앙되어 있거나 반대로 너무 밋밋해도 좀 그렇고. 숨소리 하나만으로도 감정 전달의 폭이 달라질 수 있다.
타이트한 시간 가운데서 일상의 느슨한 순간을 붙잡는 본인만의 방법이 있나? 요즘엔 잠깐이라도 틈이 나면 어떻게든 그 시간을 누려보겠다고 차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갤러리나 미술관에 가서 전시를 보면서 환기를 시킨다. 도움이 많이 되더라.
최근에 본 전시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나?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이성자 화백의 추상 회화 작품이 정말 좋았다.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 동경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낀다. 두 점의 그림이 앞에 있다고 치자. 하나는 1957년, 다른 하나는 1960년에 그려졌다. 3년이라는 시간이 불과 2미터 사이를 두고 나란히 자리하는 것이다. 그 긴긴 시간이 작가에겐 어땠을까? 회화 작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린 그림을 보면 붓 터치가 만든 밀도가 보인다.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 내가 가고 있는길이 맞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두운 스튜디오에서 보내는 긴 시간을 위로해준달까.
애착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 있나? 이를테면 절대로 버릴 수 없는 것. 주변 사람이 선물해준 소중한 그림, 최랄라 작가가 찍어준 사진, 그리고 메모. 유독 나와 평생을 같이 살겠다 싶은 기록이 있다.
올해 서른이 되었다. 3년, 5년, 10년 근미래를 그려보는 편인가? 한동안 무기력했을 당시엔 내가 언제까지 음악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것 말고는 내가 과연 다른 걸 할 수있을까 싶다. 방법이 있는 다양한 목표들은 머리를 쓰고 내 몸을 움직이면 되는데, 어떻게 해도 모르겠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언젠가 내가 좋은 아빠가될 수 있을까? 이건 정말 방법을 모르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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