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 아이돌에서 크리에이터로 진화하고 있는 남자 장우혁. 그가 소중히 간직해온 오래된 상자를 열었다. 1996과 2018, 너와 나, 그리고 모두가 함께 만든 레트로 퓨처리즘 콜라주.
응답하라 1996! 자양동 작은 스튜디오 안에서 우리만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촬영장은 마치 유적지 발굴 현장 같았다. 모두가 흰 테이블에 달려들어 20세기에서 건너온 유물을 감식하려고 했다. 그날 정신없이 찍어댄 카페라 폴더에는 이런 사진들이 남아 있다. 서울시 강북구 미아 5동 사는 김예리 씨가 ‘짱 우혀기’ 님 앞으로 보낸 한 통의 엽서. 국물 흔적이 묻어 있는 ’99 H.O.T. CONCERT’ 대본. 빛 바랜 스티커 사진이 붙어 있는 미디 파일과 소니 워크맨. 당시 팬클럽 회원들에게만 제공한 회보 <Club H.O.T.>. 한편 ‘이수만 선생님의 인터뷰’와 ‘멤버들의 신년운세’ 등 과감하고 신박한 기획으로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간행물은 훔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날 판도라의 상자를 연 주인공은 영원한 ‘터프 가이’ 장우혁이다. 자연인 혹은 수련 중인 사람처럼 청나라 시대 도자기의 푸른 무늬 같은 게 그려진 넉넉한 팬츠를 입고 그가 나타났다. 대화는 암호로 시작됐다. 요즘 절찬리에 업데이트 중인 장우혁의 유튜브 채널 [ VIDEO_XXXV]의 뜻이 궁금했다. “XXXV는 로마 숫자로 35라는 뜻이에요. H.O.T. 활동 시절부터 각 멤버마다 사용하던 고유번호가 있었죠. 고3 때 3학년 5반이었거든요. 그때 제가 데뷔했는데, 담임선생님 덕분에 우여곡절 끝에 데뷔할 수 있게되어서 의미가 남다르죠. 예전에 삐삐 기억하시죠? 단축 번호로 메시지를 보내고 싶을 때,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천사(1004)처럼. 삼오(35)는 사모하다는 뜻도 있어요.” 그가 수줍 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최근 가장 치열한 예매 대란이 일어났다. 하이파이브 오브 틴에이저, 오빠들이 돌아온다. 2001년 마지막 콘서트 이후 그 무대에 다시 오른다. 꼭 17년 만에 성사된 선물 같은 소식. 데뷔 22주년을 맞은 H.O.T.가 10월 13, 14일 이틀간 잠실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완전체로 공연을 연다. 이미 콘서트 좌석 8만 석이 전석 매진되었다. 남다른 결속력과 행동력으로 똘똘 뭉친 팬들은 ‘암표 사지 말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중이다. “멤버들과 걱정도 많이 했는데 이런 반응에 저희도 너무 놀랐어요. 저희 공연에 오는 팬들이 현실에서 좀 벗어나서 자신들의 중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뭐랄까 H.O.T. 콘서트 현장이 디즈니랜드 같은 곳이 되는 거죠. 꿈의 동산에 가면 미키 마우스가 살아서 돌아다니듯이 우리들이 거기에 있을 테니까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껏 소리 지르고 힘든 걸 다 잊어버린 채로 집에 돌
아갔으면 해요.” 이번 공연에는 H.O.T. 시절 함께했던 백댄서들도 함께 무대에 오른다고 했다. 그 친구들과 함께해야지만 낼 수 있는 느낌이 있다고.
10월 콘서트에서 음악 외의 관전 포인트는 무엇일까? 스트리트 패션과 서브컬처 문화에 있어서 시조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장우혁은 ‘패션’에 방점을 찍는다. 어쩌면 이번에 <더블유>에서 특별하게 콜라주 형태로 작업한 패션 화보가 공연의 예고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화보 촬영장은 1996년과 2018년 사이를 이어 붙이는 ‘납땜의 현장’이었다. ‘우혁이 형’(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불렀다)의 비밀 상자가 또 한 번 열릴 차례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의 주인공이 신기도 했던 전설적인 신발, 나이키 맥플라이 슈즈. 1996년 데뷔곡인 ‘전사의 후예’ 시절, 야자수처럼 솟아오른 그의 헤어스타일을 지그시 눌러준 스투시 벙거지. 팬이 직접 만들어서 선물해준 H.O.T. 로고가 그라피티 아트처럼 새겨진 반다나. 강렬한 눈빛을 보호해주던 오클리 선글라스. 착용이 아닌 탑승에 가까운 빅 사이즈의 타미 지퍼 슈즈. 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 마지막으로 화이트 컬러의 우의는 특별히 팬클럽의 시그너처 유니폼에서 영감을 얻었다. 장우혁은 이날 하이패션 포즈와 ‘숭구리당당 숭당당’처럼 보이는 혼신의 댄스를 넘나들며 스웨그를 발산했다. 촬영 중간중간 ‘나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어’ ‘요즘 운동 못 했는데, 상의 벗어도 되나? 배(근육)에 셰이드 좀 넣어줘’라며 무심하게, 귀엽게 너스레를 떨었다. 휴식 시간에 집에서 챙겨온 흑마늘 즙을 야무지게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조명이 터지면 프로페셔널하게
돌변했다. 오빠 나이 이제 마흔하나,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은 멋있는 걸 두고 힙하다 쿨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그 시절에는 ‘간지’라는 말을 썼어요. 제가 날라리는 아니었는데 고등학생 때부터 헤어밴드를 하고 머리카락을 세우고 다녔거든요. 남들이 보기엔 비주얼 쇼크였겠죠. 어른들은 양아치라고 했어요. 43통 사이즈의 바지를 입고 다녔으니 얼마나 튀었겠어요.”
세기적 아이돌이었던 장우혁은 요즘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전력 질주한다. 달리다가 벽도 뚫고 매서운 바람 따귀도 맞고 그러다 총에 맞아 쓰러진다. 넌버벌 퍼포먼스 <푸에르자 부르타>에서 일명 러닝맨으로 불리는 ‘꼬레도르’ 역에 그가 캐스팅되었다. 7년 전 이 공연의 영상을 처음 본 그는 크게 감명받아 본인의 솔로 곡 ‘기억에 외치다’ 뮤직비디오에 오마주한 장면을 넣기도 했다. “여름부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총 14번 공연했어요. 이제 6번 남았네요. 공연의 강도가거의 <출발 드림팀> 수준이에요. 제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도 많이 했고, 1등도 많이 했으니까 처음엔 별거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공연에서 실제로 5km 정도를 달리는데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의자와 테이블도 옮기고 여러 상황이 벌어지죠. 체력 소모가 엄청나서 공연 막바지에 접어들면 거의 실신할 정도예요. 벽을 뚫는 장면에서는 상자 모서리에 얼굴도 자주 베이고, 가끔 공연이 끝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피가 철철 흐를 때도 있어요. 공연하고 나면 허리가 너무 아파서 요즘 병원 신세 좀 지고 있어요.” 그래도 오빠는 짱짱하다.
장우혁은 나름의 긴 터널을 지나던 때가 있었다. 그의 양자역학 개론을 들어보자. 그가 강조했다. “이거 종교 아닙니다. 과학입니다(웃음).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고 그러면서 요가도 하고 관련 서적을 많이 읽으면서 미니멀리스트, 양자역학을… 또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혼잣말로).” 그러더니 갑자기 마술을 시연해 보였다. 하얀 종이컵 안에 에어팟을 쏙 집어 넣고선 이렇게 말했다. “컵 안에 에어팟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중략)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 아세요? (중략) 한마디로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알쏭달쏭한 눈빛을 계속 어필했지만, 끝내 수강생은 원자와 분자, 핵과 전자의 세계에 닿지 못했
다는 후문. “스무 살 후반에 논리적으로 설명 안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났어요. 사람과 사람,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해 이해 안가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왜’라는 의문을 품고 공부하게 됐어요. 인터넷 동영상으로 명상법에 대해서도 찾아봤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제가 죽더라도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미 예능 방송 <나 혼자 산다>를 통해 공개된 바 있는 그의 깔끔한 정리 정돈 및 청소 습관도 알고 보면 양자역학에서 출발했다. 그가 추구하는 미니멀하고 심플한 라이프스타일은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다. 하얀 침대 위에서 상큼하게 일어나 공들여 클렌징하고 다소곳이 앉아 드라마를 보면서 양파를 까고, 제 손으로 뚝딱 아침밥을 차려 먹은 후 설거지까지 야무지게 마무리하던 장면 말이다. 요즘 세상에 너무나 귀한 남자의 유형 아닌가!
장우혁은 식단 관리도 나름 철저하게 하는 편이다. 운동을 하기 때문에 몸에 필요한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을 자연스레 구분하게 됐다고. “맛있는 거 아니면 먹기 싫어요. 제가 많이 안 먹는 편이기 때문에 이왕 먹을 거면 값이 좀 비싸더라도 상관없죠. 허름해도 괜찮으니까 맛있고 깨끗하게 요리하는 곳에 가고 싶어요.” 망원동에 위치한 카페 ‘지능계발’은 그의 취향이 응축된 곳이다. “90년대 문화를 기반으로 아케이드 바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스눕독, 투팍, 닥터 드레,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처럼 95년대 활동한 힙합 뮤지션의 음악을 주로 선곡하죠. H.O.T. 노래는 절대 잘 안 틀어요(웃음). ‘밤과 음악사이’가 되냐 마냐는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가끔 카페 앞에는 빨간 티코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저의 데뷔 해인 96년도 티코를 갖고 싶었는데 매물이 없어서 97년도 깍두기를 타고 있어요. 흰색은 각설탕, 백설기라고 불렀나? 빨간색을 깍두기라고 부르고요. 티코 바퀴에 껌 붙여놓으면 차가 안 움직인다는 설도 농담처럼 돌지만 티코는 정말 멋진 차예요. 작아서 이동하기에 편하고요. 이걸 타면 놀이동산에 온 듯한 느낌이 들어요. 차를 워낙 좋아해서 다른 좋은 것도 많이 타봤는데 재미도 의미도 없더라고요.”
장우혁의 리얼 미니멀리즘은 앞으로도 계속 실현될 수 있을까? 그가 부지런하게 챙겨온 아카이브 박스 더미를 보고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미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이니까. “대형 이삿짐 박스 사이즈로 15개 정도 더 있어요. 그동안 저도 열심히 모았지만 집으로 온 선물 가운데 엄마가 모아온 것도 엄청 많더라고요.” 지금까지 받은 선물을 헤아려 볼 수 있을까? “편지까지 포함시키면 정말 수십만 개 정도 될걸요? 요즘엔 서로 편지 잘 주고받지 않잖아요. 예전엔 팬레터가 매일매일 포대에 담겨서 한 트럭씩 왔어요. 그때 우체부 아저씨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이것보다 소중한 게 없더라고요. 22년 전 편지를 보면, 그걸 썼던 친구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반대로 그 친구가 이 편지를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들지도요. 편지는 시간이 만들어준 선물 같아요.” 장우혁의 아카이브 컬렉션이 잡지 페이지 곳곳에 숨어 있다. 20세기에서 건너온 유물이자 선물인 그 모든 것을 샅샅이 찾아보시기를. H.O.T. FOREVER.
- 피쳐 에디터
- 김아름
- 패션 에디터
- 정환욱
- 포토그래퍼
- 장덕화
- 아트워크
- 이건희
- 헤어 & 메이크업
- 이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