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일 년 전만 해도 폴 앤드루(Paul Andrew)는 패션계에서 사랑받는 슈즈 디자이너였다. 2018 F/W 시즌, 그는 살바토레 페라가모 여성복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이탈리아의 유산을 물려받은 유서 깊은 하우스를 지휘한다. 아주 현대적인 시선으로 말이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여성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처음 선보일 2018 F/W 패션쇼를 일주일 앞둔 때였다. 폴 앤드루는 밝은 조명으로 가득한 밀라노 본사 전시실에 조용히 앉아 있다. 모델 캐스팅 작업이 한창이었다. 마음에 드는 모델이 있으면 스타일리스트 조디 반스(Jodie Barnes)에게 이야기한다. “판초를 입혀보세요.” 워킹할 때의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가장 부드러운 스웨이드, 대담한 프린트의 실크 안감을 더한 묵직한 코튼 캔버스 소재 판초는 긴 길이와 중간 길이로 모두 준비되어 있다. 선택된 모델은 그 자리에서 앤드루가 선곡한 80년대 히트곡 중 한 곡인 폴라 압둘의 ‘포에버 유어 걸F(orever Your Girl)’에 맞춰 판초의 끝자락을 휘날리며 걷는다. 발그레한 볼에 보이시 스타일로 열 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서른아홉 살의 앤드루는 살짝 데친 연어 샐러드 한 점을 집으며 반스와 함께 이번 컬렉션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의견을 나눈다. “이 여성은 밤새 파티를 즐겼어요.” 반스가 말한다.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돼지에게 먹이를 주러 가야하죠. 자기 농장으로요.”
앤드루가 지휘한 이번 패션쇼는 런던 외곽에 위치한 버크셔 예술디자인대학에서 패션을 공부한 이후 그가 의류계에 본격적으로 쏘아 올린 멋진 신호탄이었다. 각각 디자이너는 다르지만, 여성복과 남성복을 함께 선보이는 페라가모의 첫 번째 시도이기도 했다. 2016년 여성 슈즈 책임자로 영입된 앤드루는 여성복 담당의 풀비오 리고니(Fulvio Rigoni), 남성 패션 및 액세서리 디자인을 이끄는 기욤 메이앙(Guillaume Meilland)과 함께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트로이카로 활약했다. 화려한 색감과 관능적인 스타일이 돋보이는 앤드루의 슈즈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테일러링과 깃털처럼 가벼운 니트웨어, 고급스러운 가죽 제품을 특징으로 하는 메이앙의 남성복 라인 또한 큰 성공을 거뒀다. 모두 페라가모의 세련되고 화려한 디자인 유산을 새롭게 재해석한 결과였다. 하지만 리고니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고, 리고니의 뒤를 이어 여성복 디자인을 이끌 책임자로 앤드루가 낙점되었다. 이제 앤드루에게는 메이앙과 긴밀히 협력하며 이 브랜드를 상징하는 공통적인 단 하나의 비전을 창조해야 하는 큰 책임이 주어졌다.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 게 사실이죠.” 그날 일찍 앤드루는 밀라노의 불가리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이렇게 속내를 비쳤다. 이 호텔은 거의 20년 전 영국을 떠난 후 피렌체나 뉴욕에 있지 않을 때면 자주 이용해온 곳이다. “기욤 메이앙은 놀라워요. 그가 디자인한 실루엣을 살펴보고 있답니다. 아우터나 바지 등을 디자인하는 데 참고하려고요. 우리는 거의 모든 디자인을 함께 맞춰가고 있어요.” 실제로, 앤드루가 여성복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이래 두 디자이너는 3주에 한 번씩 만나 아이디어와 영감을 공유한다. 광고 제작에도 함께 참여할 계획이다.
메이앙의 남성복 역시 앤드루가 사용한 것과 동일한 옷감, 가죽, 실크 프린트를 사용했다. 메이앙의 롱 코트는 앤드루가 디자인한 아우터의 유연함과 실용성을 보완한다. 간혹 대담한 프린트를 곁들인 메이앙의 단색 디자인은 앤드루의 컬러 매치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페인터 팬츠와 같은 작업복 디테일 또한 공유되었는데, 앤드루는 이 작업복을 애시드 그린 컬러의 타조가죽 스커트로 변신시켰다. 앤드루와 메이앙은 실제로 아틀리에 직원들에게 역할을 바꿔보게도 했다. 메이앙은 셔츠를 만드는 사람에게 아우터를 주며 “이 테일러링에 아주 부드러운 느낌을 살려볼 것”이라는 주문을, 테일러에게는 셔츠를 주며 어깨선을 좀 더 날렵하게 강조하도록 요청했다. 며칠 후 보르사 이탈리아나(Borsa Italiana)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두 디자이너는 공동 전선을 펼쳤다. 무대 인사를 하러 나오는 순간, 서로 팔짱을 낀 두 사람의 발걸음은 승리를 자축하듯 경쾌하게 움직였다.
지난해 폴 앤드루의 영입은 예상하지 못한 결정이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슈즈 브랜드로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의상처럼 페라가모와 자신의 브랜드를 위해 디자인한 그의 슈즈는 깔끔하고 강렬하면서도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는 스타일이 특징이다. 앤드루는 무지갯빛의 이국적인 가죽이나 프린트처럼 강렬한 모양과 대담한 색상을 즐겨 사용했다. “저는 예전에 사용했던 스케치북을 모두 갖고 있어요. 제 손은 변했지만, 학생 때나 지금이나 제 마음을 움직이는 건 한결같아요. 너무 복잡한 디자인이 마음에 든 적은 한 번도 없죠.” 졸업 전시회를 준비하던 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지금도 약간 민망해진다는 그. “그때는 제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굳이 말하자면 폴 푸아레의 영감을 받았던 것 같아요. 온통 골드 벨벳투성이였지요.” 하지만, 결과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파페치의 야스민 스웰은 그녀의 매장인 야스민 초를 위해 앤드루의 작품 전량을 구매했다. 당시 파페치 매장은 런던의 젊은 멋쟁이 여성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앤드루는 의상 디자인을 즐겨 했지만, 당시 작업을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떴다. “골드 샌들에 비즈를 달며 수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제가 구두 만드는 일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뒤 스웰의 도움으로 그가 내디딘 첫걸음은 알렉산더 매퀸에서 구두 디자인 작업을 하며 밟은 인턴십이었다. “당시 매퀸은 뉴욕에서 선을 보였어요. 그곳에서 저는 뉴욕의 매력을 느꼈죠.” 하지만 윈저 궁전에서 여왕의 실내 장식가로 활동하던 앤드루의 부친은 아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갖기를 바랐다고 한다(아버지는 집에 부속된 공간을 작업실로 삼았고, 어린 시절 앤드루는 그곳에서 숙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그곳만큼 지루한 공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가장 아름다운 옷감과 장식물로 가득했던 그곳에서 지낼 수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지요.” 그는 곧 나르시소 로드리게즈의 슈즈를 담당하며 스틸레토를 생산했다. 바늘처럼 가늘고 하늘 높은 줄 모를 만큼 아찔한 굽이었지만, 용케 다치는 법은 없었다. “제 신발 굽이 다 닳을 정도였지요.” 이후 캘빈 클라인에서 슈즈를, 도나 카란에서는 13년 동안 슈즈와 가방을 디자인했다. 그중에서 마지막 3년은 컨설턴트로 재직했다. 이 경험은 나중에 자신의 회사를 직접 여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도나는 저에게 창업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많이 전수해주었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 직후, 앤드루는 전 세계 500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리처치를 진행했다. “제 사업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요즘 사람들은 운동화를 많이 신어서 발의 구조가 달라졌잖아요. 이탈리아의 제화공들은 30년된 틀을 아직도 사용하는데, 지금 사람들의 발은 그때보다 더 넓거든요.” 앤드루는 메모리폼 소재의 패드를 디자인했다. 이 패드는 현재 페라가모와 자신의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모든 구두에 사용되고 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살바토레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었어요. 저를 살바토레에 견줄 수는 없어요. 말도 안 되지요! 그래도 저 역시 경계에 도 전하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앤드루의 말이다.
앤드루는 피렌체 중심부의 중세식 건물인 팔라초 스피니 페로니(Palazzo Spini Feroni)에 자리 잡은 본사에서 1만 5,000개 이상의 모델을 소장하고 있는 페라가모 아카이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는 꽃을 닮은 펌프힐을 발견했다. “혼잣말로 이렇게 물었어요. 살바토레는 어떻게 이렇게 모던한 디자인을 할 수 있었을까? 이 디자인을 자동차 공장에 보내서 이탈리아 스포츠카를 제작할 때와 같은 기술로 도금해달라고 하면 어떨까? 그렇게 했어요! 우리가 받은 건 메탈릭 골드 소재로 마감한, 아주 가볍고 내구성이 강한 구두였죠.” 이렇게 탄생한 디자인은 페라가모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제품 중 하나가 되었고, 페라가모 하우스의 유명한 버클 스타일 간치니 모티프처럼 시그너처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유서 깊은 문화와 유산을 지닌 하우스에서 디자인을 책임진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1960년에 할아버지(살바토레)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는 38세였어요.” 페라가모에서 가죽 제품을 담당하는 46세의 제임스 페라가모가 말한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이 회사를 매각해야 할 지 심각하게 고민하셨죠. 당시 할머니는 19세인 피암마 (Fiamma) 고모부터 3세인 마시모(Massimo) 삼촌에 이르기까지 여섯 명의 아이를 돌봐야 했으니까요.” 살바토레가 사망한 당시, 피암마와 바로 아래 동생인 17세 조반나 (Giovanna)는 이미 페라가모에서 일하고 있었다. 피암마는 제화를 맡았고, 조반나는 이 하우스 최초의 여성복 라인을 준비 중이었다. 이후 또 다른 여자 형제인 풀비아 (Fulvia)는 액세서리 디자인을 맡았다. “할머니는 여섯 명의 자식이 모두 회사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어요. 자식들이 회사 내에서 각자 맡은 책임이 있다고 느껴야 서로 다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지요.” 제임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 아들이 성인이 되자, 그녀는 이들에게 각각 다른 지역의 해외 시장을 맡게 했다.
조반나가 의상 디자인을 처음 맡았을 때 나이는 불과 15세였다. 조반나는 열 살 무렵부터 팔라초에 위치한 부친의 아틀리에를 자주 찾았고, 어깨너머로 배운 페라가모의 방식에 익숙해졌다. “아버지는 저와 피암마를 위해 아버지의 구두를 작게 만들어주시곤 했어요. 정말 예쁘고 특별한 구두였는데, 학교에 신고 가기에는 끔찍했어요. 다른 여자아이들은 아무도 그런 신발을 신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의자 밑으로 발을 숨겼답니다!” 조반나가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살바토레는 오후에 그녀를 패션 학교로 보냈다. “저는 아주 쉬운 방법으로 몇 가지 샘플을 조합해보기 시작했어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재봉사가 와서 도와주셨죠. 팔라초에 위치한 저의 작은 사무실은 아버지의 아틀리에와 아주 가까웠어요. 아버지는 불쑥 들르곤 했지요.” 살바토레는 1958년에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페라가모 패션쇼에서 조반나를 도와 처음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했다. “패치워크 컬러의 여름 스포츠웨어였어요.” 조반나는 당시 패션쇼를 이렇게 회상한다. 마침내 페라가모는 베벌리힐스에 독립 매장을 열었고, 이곳에서 조반나의 디자인은 할리우드의 여성 배우들을 비롯해 그녀의 심플한 멋에 매료된 LA 여성들의 지지 속에 도약할 수 있었다.
앤드루의 데뷔는 스포티한 감각의 성숙함이 돋보이는 의상으로 이 브랜드의 유산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고급스럽지만 따분하지 않고, 세련되지만 까다롭지 않다. “저는 구두를 선보이기 위해 뻔한 캔버스를 창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앤드루는 자신의 접근을 이렇게 설명한다. 물론, 그도 바지를 발목 높이로 잘라내어 누구나 탐낼 만한 슈즈가 가려지지 않게 하는 요령 정도는 발휘했다. “단순히 페라가모를 새로운 세대에게 소개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살바토레가 창조했고 멋지게 지켜온 정신을 재현하는 것이죠. 우리는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변화에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 패션 에디터
- 백지연
- 포토그래퍼
- JULIA HETTA
- 글
- ALEXANDRA MARSH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