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그리고 시작

이채민

누군가는 로망으로 품고 있을 미국 횡단 로드트립을 떠난 세 남자가 있다. 사진가 목정욱, 설치 미술가 이원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 셋은 여행 내내 대화를 나누고 영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룹 MLH라는 이름으로 지난 6월 9일, 구슬모아당구장에서 기획 전시 <EXIT, 또 다른 시작>을 공개했다. 그들이 발을 내디딘 출구에서 펼쳐진 새로운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왼쪽부터ㅣ목정욱이 여행 중에 촬영한 사진 앞에 선 사진가 목정욱, 설치 미술가 이원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

왼쪽부터ㅣ목정욱이 여행 중에 촬영한 사진 앞에 선 사진가 목정욱, 설치 미술가 이원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

폭포가 쏟아지는 영상으로 꽉 찬 벽, 강렬한 붉은빛의 출구 네온사인, 한눈에 담을 수 없는 수많은 조각 사진, 전시장 가운데 자리한 움직이는 의자들. <EXIT, 또 다른 시작> 전시장은 목정욱, 이원우, 허재영이 여행을 통해 눈에 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속삭인 것들로 가득하다. 인생의 깨달음을 얻을 만큼 진지한 여정이었지만 경쾌한 에너지를 매개로 대중과 소통한다는 점에서 그 첫인상이 강렬하다. 전시로 모두 담을 수 없었을 그들의 여정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했다.

출구 사인이 이어지는 전시장.

출구 사인이 이어지는 전시장.

〈W Korea〉전시 제목에 담긴 의미가 궁금하다.
허재영(H) 우리 셋이 각자 만난 시점이 다 다르다. 나와 원우는 대학 시절 인연을 맺었고, 정욱 형은 원우가 모델을 하던 시절에 만났고, 후에 나와 정욱 형이 친구가 됐다. 처음에는 터미널을 주제로 전시를 진행해볼까 생각했다. 셋의 활동 분야도 다르니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교집합 같은 게 필요했다. 너무 추상적이거나 억지스러운 것을 끼워 맞추기보다는 우리가 새로운 공통점을 갖기 위한 출발 지점이 될 만한 것을 찾았고, 그 시작이 여행이었다. 막상 로드트립을 하다 보니 공항이며 길이며 ‘출구’ 사인이 정말 많이 보였다. 어느 길을 가다가 다른 길로 들어서려면 출구를 통해 새 입구로 들어가야 했다. ‘출구’의 의미가 끝남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라는 의미에 주목했다.

여행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었던 건가?
H 각자 일하는 플랫폼과 매개체도 다르니 각자의 작업을 하나의 공간에 모아두는 식의 그룹전이 아니라 이 전시만을 위한 작업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목정욱(M) 여행을 통해 작업을 한 게 아니라, 여행을 같이 가는 것이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다 같이 어딜 가고 무엇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가 새로운 방식을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의 시선이 있는 아티스트이니, 여행 중 다다르는 공간에서 같이 느끼고 이야기하는 게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여행 내내 함께 나눈 얘기들을 잊을 수가 없다.

이원우(L) 사실 모험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명확한 주제가 잡힌 전시 준비였다기보다 함께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고, 여행을 통해서 명확한 무언가를 찾겠다는 의지보다는 이렇게 흘러가면 무엇이 나올까에 관한 호기심과 우연의 연속에 흥미를 느꼈다. LA와 라스베이거스, 뉴욕을 빼고는 정해진 숙소나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차 안에서 예약을 하기도 했다. 우리 셋의 마음이 가는 곳이 곧 다음 목적지였다.

도로 표시 등 그들의 로드트립 영감의 일부가 전시장에 재현됐다.

도로 표시 등 그들의 로드트립 영감의 일부가 전시장에 재현됐다.

LA에서 뉴욕에 이르는 로드트립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면?
 H LA에서 요세미티로 올라갔다가 라스베이거스에 들렀고, 그랜드캐니언 부근에 자리한 세도나를 찾았다. 그러곤 밤새도록 달려서 엘파소를 지나 마파에 도착했다. 후에 휴스턴에 다다랐다. 원우는 먼저 미팅이 있어서 뉴욕으로 갔고, 나와 정욱 형은 휴스턴에서 나이아가라까지 36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아무래도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그 운전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달리고, 마지막으로 뉴욕으로 갔다.

차에서 보낸 그 36시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M 차 유리 앞으로 프로젝터를 틀어놓은 것처럼 풍경이 계속 바뀌더라.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생경한 풍경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지니 시각이 예민한 나로서는 눈이 계속해서 뜨여 있는 느낌이었다.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이랄까? 휴스턴에서 나이아가라로 가는 길에서 멍하니 매 순간 풍경이 변화하는 걸 바라본 기억이 난다.

H 번갈아가면서 운전했는데, 자리를 옮길 때마다 뷰가 달라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서부에서 텍사스로 가는 여정은 특히 좋았다.

 전시장 한쪽에 앉아서 영상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전시장 한쪽에 앉아서 영상을 즐길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됐다.

텍사스로 이동한 것도 즉흥적인 결정이었다고 들었다.
L 세도나와 마파에 가는 동안에도 계속 고민했다. 세도나는 뭔가 신성한 느낌이 들었고,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 않은 마파가 너무 좋았다. 마파로 가는 길에 하늘을 봤는데, 정말 많은 별을 봤다. 아, 내가 우주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M 세도나는 뭔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함께 찾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이었다. 마파로 가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 2차선 도로를 달리는데 너무 어두워 헤드라이트가 만들어낸 소실점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늘을 봤는데, 그렇게나 많은 별은 본 적이 없었다. 자연의 숭고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L 마파는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작품 속에 들어갔다 나온 느낌이었다. 저드 재단에서 운영하는 ‘더 블락(The Block)’에도 갔다.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고 하더라. 그러고 보니 광주리나 돌담이 놓인 스튜디오 공간이 한국적으로 설계된 듯도 했다. 그의 미니멀한 큐브 조각을 예전부터 좋아했는데, 저드의 작업 안에 녹아있는 그의 삶과 시간에 내가 공명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H 더 블락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무섭게 집중했다. 셋이 같이 본 공간에서 미묘하게 다른 것을 포착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전시를 어떤 식으로 구상했고, 관객이 어떻게 감상하길 원하나?
M 얼마 전 이곳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전시를 열기도 한 재영의 친구 티보 에렘이 이런 얘기를 했다. 프랑스에는 다섯 가지 형태의 예술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대화’라고 했다. 그 얘기가 내게 큰 울림을 줬다. 36시간 운전하며 나와 재영이 나눈 이야기, 요세미티에서 마주한 눈을 보면서 우리 셋이 나눈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영감이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흥분되기도 하고 어려웠던 점은 바로 그런 비언어 상태로 간직하고 있는 여행의 잔상을 어떻게 관객이 보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전할 수 있는가였다.

그런 고민을 어떤 식으로 풀어냈나?

사진가 목정욱이 포착한 사진이 붙어 있는 전시장 벽.

사진가 목정욱이 포착한 사진이 붙어 있는 전시장 벽.

M 내 경우엔 전시장에서 내 사진이 도드라지기보다는 전시의 일부가 되길 원했다. 어떤 사진 한 장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그 사진을 찍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고자 했다. 꼭 A 컷이 아니더라도 내가 본 모든 것과 어떻게 찍고 고민하고 골랐는지, 내가 평소 좋아하는 물건, 형태, 사진집 등 일종의 증거물들과 함께 여행의 커다란 맥락을 나누고 싶었다.

반짝이는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는 허재영의 작품.

반짝이는 헤드라이트가 깜빡이는 허재영의 작품.

H 사진, 조각 같은 오브젝트, 미디어를 활용한 새로운 작업으로 구성했다. 구슬모아당구장이라는 공간 자체가 보통의 갤러리와는 다른 스타일로, 가운데에 바가 있어서 인테리어 무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입구 복도를 좁혀서 클로즈업해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 영상이 떨어지도록 하고, 계속 이어지는 출구 통로를 직접 걸어들어가며 사진을 볼 수 있게 했다.

이원우 작가는 엄지를 편 거대한 손 모양의 의자 이동 장치를 만들었다.

이원우 작가는 엄지를 편 거대한 손 모양의 의자 이동 장치를 만들었다.

L 나는 이동 장치를 만들었다. 최근에 관심 있는 것 중 하나다. 사람이조각을 탈 수 있고, 조각의 일부가 되는 개념이다. 요즘 인간의 불안에 관심이 큰데,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가 거인이 되는 거라고 한다. 인간이 느끼는 불안 따위는 우습게 보일 만한 초월적 존재가 되는 거다. 전시장에 바퀴가 달린 커다란 손 형태의 작품을 놓았는데,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거인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동 장치에 대한 관심은 이번 여행을 하면서 커졌다. 큰 차를 빌렸는데,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육중한 기계 장치가 마음에 들었다. 전시되는 이동 장치는 육안으로 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는데, 사실 철판으로 제작해서 묵직한 느낌이 들도록 했다. 귀여운 이미지를 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함께 여행하고 일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점은?
L 두 사람이 내게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는 것 같았다. 나의 경우 조각 작품을 생각하는 것부터 완성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정욱 형 같은 경우 사진을 통해 그 찰나를 딱 포착해내는 감각에 매번 감탄했다. 재영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공간을 살핀다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게 독특했다. 어디를 가든 상대방이 무엇을 어떤 시각으로 볼 지 기대가 됐다.

M 우리 셋 다 각자의 입장에서 지쳐 있었다. 일을 잘 해내고는 있었지만 일종의 무기력과 권태, 스트레스가 있는 상태였다. 요세미티에서 생각지도 못한 경험을 했다. 비가 오다가 산 중턱에 이르자 비는 눈으로 바뀌었고, 정상을 향할 때 들려온 폭포 소리, 눈 결정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혼재돼 신비로웠다. 다음 날 떠날 때까지 해가 뜨지 않아 아쉬워하던 찰나, 산을 넘자마자 해가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쭉 떨어졌다. 내 삶에 강렬한 영감을 준 순간이었다. 여행을 통해 받은 에너지는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큰 영향을미쳤다.

H 세도나에서 마파로 떠나기 전, 어느 중국 식당에 들렀다. 그곳에서 준 포춘 쿠키를 열어봤는데, 바로 이 글귀가 적혀 있었다. “Working Together Works.”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감동적인 순간이 있을까?

<EXIT, 또 다른 시작> 전시는 9월2일까지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열린다.

패션 에디터
백지연
포토그래퍼
윤송이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