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케이트 모스, 귀네스 팰트로, 사라 제시카 파커가 입던 슬립 드레스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슬립 드레스를 대하는 디자이너들의 태도만큼은 90년대에 머물러 있지 않다. 더 과감해졌고, 더 전복적이다.
정확히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케이트 모스는 크고 작은 파티나 행사에 갈 때면 무조건 간결한 슬립 드레스를 입었다. 장식 하나 없이 몸에 착 붙는 매끄러운 슬립 드레스에 초커 스타일의 체인 목걸이, 메리제인 플랫폼 슈즈는 그녀가 파티장에 갈 때 입는 유니폼이라 할 정도였다. 90년대 후반 미니멀리즘 트렌드가 시들해지고, 밀레니엄 시대가 열리면서 케이트 모스의 파티복도 달라졌고, 슬립 드레스도 파티나 레드 카펫에서 자취를 감췄다.
슬립 드레스가 트렌드 전선에 재등장한 건 몇 시즌 전부터다. 하지만 예전의 미니멀한 형태로 귀환한 건 아니었다. 팬츠와 함께 슬립 드레스를 입거나 슬립 드레스에 재킷, 점퍼를 매치하는 스타일이 많았다. 이렇듯 최근의 슬립 드레스는 스타일링 요소로 활용된다. 올여름 슬립 드레스는 역시 트렌드 최전방에 자리했다.
그렇다면 그동안의 슬립 드레스와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한다는 점이다. 90년대 케이트 모스가 즐겨 입던 클린한 스타일을 고수한 브랜드로는 드리스 반 노튼, 올리비에 데스켄스를 포함해 밀란의 페라가모, 뉴욕에서는 오스카 드 라 렌타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드리스 반 노튼은 그녀가 자주 입던 스킨 컬러의 얇고 부드러운 실크 소재 드레스에 캘빈 클라인 스타일의 얇고 가느다란 누드톤 샌들을 매치해 마치 케이트 모스가 환생해 걸어 나오는 듯한 느낌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파리의 낭만주의자답게 자신만의 터치를 더했는데, 반짝이는 크리스털 장식을 슬립 끈으로 활용하고, 브라톱 라인에 크리스털을 촘촘히 장식하는 위트를 발휘했다. 그만의 세심하고 세밀한 수작업은 미니멀한 슬립 드레스에 황홀한 판타지를 더한 것.
한편 이번 시즌 슬립 드레스는 어떤 신발에 어떻게 매치했는지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가장 독특했던 건 크리스토퍼 케인. 그는 레이스가 장식된 새빨간 슬립 롱 드레스와 크리스털이 가득 찬 크록스 슈즈를 매치했고, 이치X아더는 웨스턴 부츠를, 올리비에 데스켄스는 검은색의 로킹한 워커를 매치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슬립 드레스를 여성스러운 여자의 전유물로 여기지 말고, 더 자유분방하게 더 쇼킹하게 활용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건 아니었을까?
슬립 드레스의 형태는 90년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드레스와 매치된 신발을 보면 그들이 슬립 드레스를 대하는 태도는 90년대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정의한 슬립 드레스는 밤과 낮뿐 아니라, 사무실과 자연을 거침없이 오가며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더없이 실용적인 옷인 것.
마지막으로 이번 시즌 슬립 드레스의 특징은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실크 소재가 아닌 창의적인 소재와 독특한 장식으로 드레스의 성격을 새롭게 정립한다는 점이다. 아크네 스튜디오는 악어 패턴을 담은 원단으로 강인한 드레스를 만들었는데, 슬립 드레스의 가녀린 이미지와 상반된 소재가 신선한 즐거움을 줬다. 또한 질샌더와 미쏘니는 니트 소재의 슬립 드레스로 편안함을 강조했으며, N.21과 니나리치는 셔링 장식을 활용해 우리가 실크를 입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주름에 마치 반기를 드는 듯 인위적인 주름을 만들어 재미를 주었다.
이 다양한 사례 중에서 당신은 어떤 슬립 드레스에 마음이 끌리는지? 슬립 드레스 하나로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과 무드를 표현할 수 있게 될지, 90년대의 케이트 모스는 알고 있었을까? 디자이너들의 실험과 도전으로, 우리는 이제 미니멀리즘에 갇힌 슬립 드레스가 아니라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토퍼 케인의 크록스와 슬립 드레스의 매치와, 드리스반 노튼의 클래식 스타일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당신의 선택은 이번 시즌 거리에서 보여주면 될 일이다.
- 패션 에디터
- 김신
- 포토그래퍼
- 박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