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낯선, 파푸아뉴기니

이채민

가능한 한 자주, 멀리, 오래 여행하는 건 여행가만의 특권일까? 미니멀리즘이 세상을 지배한다 해도 여권을 채우는 스탬프 수만큼은 차고 넘쳐야 행복할 것이다. 발목을 잡는 현실을 겨우 벗어나서 맞닥뜨린 세상이 관광객으로 가득하다면 그곳은 또 다른 현실이 되고 만다. 이제 소개할 여행지는 현실보다 꿈에 가깝다. 위로는 남태평양, 아래로는 코럴해를 둔 천혜의 섬 파푸아뉴기니의 부족 마을들. 낯설어서 더 그리운 장소를 꿈꾸는 일부터가 여행의 시작이며, 낯선 곳의 일부가 되어 그 세상을 흠뻑 누리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정수다.

파푸아뉴기니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섬인 뉴 얼렌드에 자리 잡은 누사 아일랜드 리트리트(Nusa Island Retreat).

파푸아뉴기니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섬인 뉴 얼렌드에 자리 잡은 누사 아일랜드 리트리트(Nusa Island Retreat).

사람 사는 흔적은 거의 없다. 나무 기둥 위의 집이나 푸르게 피어나는 연기가 있을 뿐이다. 물론 도로 같은 것도 없다. 여기, 파푸아뉴기니(Papua New Guinea) 동부의 투피(Tufi) 우림에서는 물이 땀처럼 고였다가 마치 손가락 사이가 젖어들 듯 솔로몬 바다까지 흘러간다. 이 작은 마을은 바다로 이르는 핏줄처럼 여러 갈래로 나뉜 좁은 경로 사이에 홀로 남겨진 모양새다. 뉴기니섬의 서쪽은 인도네시아, 동쪽이 파푸아뉴기니다. 남태평양의 서쪽 끝에서 아래로는 코럴해를 둔 파푸아뉴기니에 이끌려 세 번째로 이곳을 찾았다.

우리 일행을 더 깊은 숲으로 데려가줄 코라페족 여성들이 나무로 만든 ‘아웃트리거 카누’를 타고 해안으로 왔다. 이곳에서는 카누를 눈으로 보기 전에 귀로 먼저 듣는다. 노를 저을 때마다 ‘탁탁’ 하는 소리가 나고, 카누가 유령처럼 고요히 미끄러져 가는 동안 새들이 지저귄다. 코라페족 여성들은 타파 나무껍질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꽃과 조개껍데기로 만든 목걸이를 둘렀다. 얼굴에는 검은 문신이 있었다. 숲에 도착해 우리를 안내한 두 남자 역시 얼굴에 문신이 가득했고, 왠지 흑백 버전의 악몽 같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야자나무 숲으로 들어갔을 때는 머리에 깃털을 단 많은 남자들이 드럼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중이었다. 밝은 색감의 꽃과 코코넛 껍질로 만든 두건을 쓴 소녀들도 보였다.

현대 관광 산업에서 진짜와 가짜는 때로 구별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본 광경은 하와이의 호텔 로비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녹음된 오리 타히티나 훌라 춤 같은 게 아니었다. 여기서는 그럴듯한 가짜가 아닌 진짜만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과일 칵테일 따위 대신 바나나잎 위에 얹은 삶은 야자나무인 ‘사고(Sago)’라는 걸 받았다. 단체 춤을 포함한 이 일련의 과정은 ‘싱-싱’이라고 하는 환영 이벤트로, 19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유럽의 식민지에서 부족들 간에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시작한 의식이다. 코라페족은 돼지 뿔과 앵무새 깃털로 만든 고유의 전통 의상 차림이었다. 스코틀랜드 사람이 킬트 치마를 입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어떤 남자는 머리 장식의 엉킨 타래를 풀고 있었는데, 100년 묵은 그 장식이 잔디 깎는 기계와 더불어 집안의 가보라고 한다. 내가 관광 산업에 물이 든 건지, 하마터면 그런 장식을 구입할 수는 없느냐고 물어볼 뻔했다.

맑고 투명한 코럴해의 해안선을 따라 살짝 보이는 곳은 오로(Oro) 프로방스.

맑고 투명한 코럴해의 해안선을 따라 살짝 보이는 곳은 오로(Oro) 프로방스.

내가 여행을 다닌 그 어떤 곳보다도 파푸아뉴기니는 날것의 경험을 선사했다. 이 나라에 대한 유명한 오해 중 하나는 원시적인 전투 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1975년 파푸아뉴기니가 호주에서 독립한 이후, 작은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각각의 부족 공동체는 서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점차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를 중심으로 선출식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한 나라를 이국적이라고 표현하는 건 쉽다. 물론 이국적이라는 말에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위험까지도 포함된다. 예컨대 한 세기 전 유럽의 백만장자들은 파푸아뉴기니에서 한 해에 약 8만 마리나 되는 새의 가죽을 벗겼다. 1961년에는 유명한 탐험가가 파푸아뉴기니에서 실종됐고, 작년에 한 영국 탐험가는 헬리콥터로 구조되는 소동을 벌였다. 좀 겁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스릴 있고 유혹적이다. 내가 이곳을 세 번째로 찾은 이유도 천혜의 아름다움과 위험이 공존한다는 매력 때문이다.

그런데 앞선 두 번의 여행은 사뭇 달랐다. 5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세피크강을 거슬러 곤충 부족의 마을까지 총 124마일을 여행했다. 카닝가라족이 사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 사람들이 악어와 닮아 보이기 위해 자기 몸을 칼로 베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잊을 수도 없는 그 인상적인 의식은 남자들의 등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대형 요트를 타고 다시 이 나라를 찾았다. 36개의 침상에 헬리콥터까지 실은 요트였다. 공작새처럼 푸른색을 띤 해안에는 태평양 전쟁의 흔적이 남은 난파선들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를 보고 싶어 한다는 작은 공동체도 만났다. 이번에는 아들과 언니 등 가족과 함께했다. 사실 ‘함께’라기보다는, 가족들이 나한테 끌려왔다고 해야 맞다. 동부 해안의 점잖은 바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는 비교적 저렴한 육지 여행을 콘셉트로 잡은 것도 그들 때문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고립되고 불편하지만, 진정한 모험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하면 실제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마음을 여는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적한 바다에서 만난 깜짝 손님, 긴부리돌고래들.

적적한 바다에서 만난 깜짝 손님, 긴부리돌고래들.

파푸아뉴기니의 많은 지역은 개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호주에서 독립한 후 원유, 금, 커피 등의 자원이 빠르게 개발되기 시작했고(2014년에는 엑슨 모빌이 190억 달러 규모의 천연 가스 정유 공장을 열었다), 보게인빌섬에 있는 광산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리가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말이다. 세계 빈곤 지수에 따르면 파푸아뉴기니는 자이부티와 수단에 이어 최빈국에 속한다. 보건 상태는 열악하고 전기는 종종 끊긴다. 험한 고원을 가로질러 해안까지 연결되는 도로도 없기 때문에, 주민들은 자동차보다 헬리콥터 소리에 더 익숙하다. 게다가 각 부족은 서로 격리되어 있어 저마다 다른 언어를 쓴다. 세계에서 통용되는 7천 가지 언어 중, 무려 860개가량의 언어가 이 나라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고립성 덕에 전반적인 풍경이 손상되지 않고 자연 상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스트 뉴 브리튼에 있는 코코포(Kokopo) 방갈로 리조트의 테라스에 앉으면 건너편으로 라바울 마을의 화산이 보인다. 말발굽 모양의 만을 가로질러 마을에 다소 음울한 윤곽을 그려내는 그 화산은 1994년에 분화구 두 개가 터지며 생겼다. 당시 라바울 마을은 4미터에 이르는 두께의 재로 완전히 뒤덮였다. “아버지는 분화구가 터질 걸 예감했어요. 전날 밤 새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었거든요.” 우리 여행 가이드였던 청년은 아버지가 화산 폭발 3시간 전 가족을 대피시킨 덕에 살아남았다. 그는 전설처럼 사라진 옛 마을에 대해 얘기를 이어갔다. “지금 지나는 왼쪽이 9홀 골프 코스였어요. 차이나타운은 오른쪽에 있었죠.” 라바울만은 태평양 전쟁 중 격전지로 유명한 심해 항구다. 일본군의 점령지였는데, 연합군이 20,500톤의 폭탄을 투하한 후에는 모두 지하로 퇴각했다. 지하 동굴 벙커엔 일본 제독이 전쟁 계획을 그려놓은 흔적도 있다. 당시 전쟁 포로들이 남긴 낙서들이 순간 시공간 개념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요크섬(Duke of York Island)에 줄지어 있던 야자수들. 이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에는 키 높은 나무가 태평양 전쟁 당시 교수형을 치를 때 줄을 매다는 용도로도 쓰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요크섬(Duke of York Island)에 줄지어 있던 야자수들. 이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에는 키 높은 나무가 태평양 전쟁 당시 교수형을 치를 때 줄을 매다는 용도로도 쓰였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코코포 해변에서 쾌속정으로 45분을 달리면 카라와라족이 사는 요크섬에 도착한다. 거기서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며 이틀 밤을 보냈다. <근심 걱정 없는 미래>라는 애매한 선언 같은 글을 쓰기도 했던 괴짜 독일인 어거스트 엔젤하르트는 1900년대 초반 요크섬에 태양 숭배 식민지를 건설했다. 유럽에서 온 약 15명의 벌거벗은 채식주의자와 함께. 그는 인류가 코코넛을 먹으며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사람이다. 마을 주민들은 우리에게 코코넛 속에 요리한 고구마와 생선 튀김 등을 내주면서, 어른들이 미친 유럽인에 대해 종종 얘기했다는 기억도 들려줬다. 여행 초반에 만난 부족과 달리 이곳 사람들은 소득을 창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들이 희망을 거는 분야는 신생 관광 산업이다. 아주 기본적인 홈스테이 프로그램도 그 일환으로 마련돼 있다. 지역 전통을 살린 방식이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 주민 간의 갈등이 아예 없진 않다. 파푸아뉴기니의 일부 부족은 ‘싱-싱’이 기독교적이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차라리 관광객을 그냥 해변에서 지내게 놔두는 쪽이 낫다고 말한다. 나는 우리 같은 외지 사람들이 이들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건 아닌지 잠시 걱정했다. 동시에 우리가 따뜻하게 환대받고 있음도 느꼈다.

내 아들 잭은 금방 친구를 사귀었다. 앞을 볼 수는 없지만 구름처럼 흰 눈을 가진 아이였다. 잭은 과자 대신 바나나잎에서 찐 토란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긴 로프를 잡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로프를 달아놓은 그 나무들, 과거 전쟁 중 일본인이 줄을 매달아 섬 사람을 교수형에 처할 때 사용했다던가? 그 날 밤 잠자리에 누워 이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전쟁 포로였던 내 할아버지가 뉴기니의 사람들보다 더한 상황을 겪었는지 물어봤다. 나는 공포란 비교할 수 없는 거라고 잘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득, 세상 사람들이 각자의 조상에 따라 어떻게 역사를 배우며 가르치는가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자랄 때 홀로코스트에 대해선 배웠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가 어땠는지는 들은 바 없다. 잭이 말했다. “엄마, 나 학교 안 다니고 그냥 홈스쿨링 할래요. 그리고 엄마가 가는 여행에 전부 다 따라다닐래요.” 여행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바이닝족이 코코포 해변에서 불춤을 추는 걸 봤다. 긴 모양의 조각된 가면을 쓴 남자들이 맨발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끄기 위해 불꽃을 뚫고 북소리에 맞춰 춤을 췄다. 2시간 동안 불꽃이 너무 거칠게 날려서 무엇이 불이고 무엇이 별똥별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일까? 일주일간의 여행을 통해 변한 것이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화의 욕구가 일고 있는 파푸아뉴기니를 목격하며, 나는 그 답을 찾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생각했다. 관광 산업이 현지인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변화시키는 동안, 그것은 동시에 문화적 자부심을 심어주거나 잃어버린 전통을 강화하는 역할도 한다. 이게 다 나쁘기만 한 것인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그 화두가 중요하다는 걸 알 뿐이다.

피처 에디터
권은경
Sophy Roberts
포토그래퍼
CHRISTOPHER CHURCHILL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