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막이가 하이패션이 될 수 있는가? 대답은 ‘예스’다.
만약 당신의 옷장에 이런 아노락 재킷, 윈드 브레이커, 후리스 같은 애슬레저 기어가 있다면 안도의 숨을 쉬어야 할지도 모른다. 아웃도어에 섬세한 무드와 하이엔드 감성을 뒤섞은 고프코어 룩이 런웨이를 점령했으니 말이다. 스트리트, 놈코어, 애슬레저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디자이너들이 기어코 ‘기능성’ 의류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이번 시즌 캠핑용 의류에서 쿠튀르 런웨이까지, 신분 수직 상승을 거둔 아노락 재킷과 윈드 브레이커를 자세히 살펴보면 노란색의 어여쁜 실크 스틸레토 힐과 매치한 발렌티노의 윈드 브레이커, 셔츠 드레스처럼 길게 연출한 보테가 베네타의 아노락, 방수 나일론에 2000년대 무드의 컬러 블록을 리바이벌한 마리 카트란주, 소프트 셸 소재를 사용한 R13의 반소매 아노락 등 그 면면이 아주 다채롭다.
이 정도라면 아노락 재킷 하면 조기 축구 동호회와 산악회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 당신의 편견을 접어둘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할리우드 셀레브리티의 파파라치 컷을 보면 아노락 재킷의 현실 버전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구글에 “아노락 재킷을 섹시하게 입는 법”을 찾으면 아마 리한나의 사진이 가장 먼저 검색될 것. 새 남자친구라는 뜨거운 루머에 휩싸인 하산 자밀과의 디너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포착된 그녀는 비칠 듯한 살구색 컬러의 펜티×푸마 아노락 레인코트 차림이었다. 로고 레이스업 힐과 버건디색 악어가죽 핸드백처럼 유치하지 않게 좋은 아이템과 잘 정돈한 그녀의 스타일링은 로맨틱한 디너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듯했다. SNS를 통해 트렌드에 앞장서는 패션 키즈들은 파타고니아, 노스페이스, 콜롬비아 같은 아웃도어 브랜드와 발렌시아가 같은 하이엔드 브랜드를 믹스 매치하는 데 거침이 없다. 파리에서 가장 핫한 편집숍 ‘더 브로큰 암’이 살로몬 같은 투박하게 생긴 등산화를 바잉 리스트의 최우선에 두는 것도 이런 트렌드의 일환이다. 더는 맑은 날 비옷 차림이라고, 강남 한복판에서 등산객 차림이라고 딴죽을 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고프코어 트렌드에 대해 몇몇 동료 에디터들은 “패션계 미의 기준이 전 세계적으로 퇴보했어”라고 자조하지만, 굳이 낙담할 필요는 없다. 1992년 넝마주이 같은 구겨지고 너저분한 패션으로 ‘그런지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받은 마크 제이콥스는 언론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가 주는 ‘올해의 여성복 디자이너 상’이라는 영예를 얻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안티 패션이 패션의 저변을 넓혀왔음은 사실이지 않나. 이제 이 트렌드에 가담하려면 물과는 상극인 가죽, 고급 퍼, 묵직한 울과는 잠시 이별을 고해야 한다.
- 에디터
- 이예지
- 포토그래퍼
- 박종하
- 모델
- 김설희
- 헤어
- 안미연
- 메이크업
- 유혜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