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이 나이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는 것도 쉽지가 않아요.”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생애 최대 규모의 전시를 시작한 그는 멈추지 않는 창작 열정에 대해 장난스럽게 말한다.
‘리빙 레전드’라는 말이 흔한 세상이긴 하지만,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만큼 그 수식이 마땅한 자가 또 있을까?

평생 담배를 손에서 놓은 적 없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숨소리가 거칠다. 요즘 그의 곁에는 24시간 간병인이 붙어 있다. 청력이 저하된 지는 45년도 넘었는데, 이제 그는 보청기를 착용하고서도 상대방 입술을 읽으며 말의 내용을 짐작한다. 2023년 7월, 호크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응급 상황에 대비해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일 3시간 남짓, 기력을 모아 그림을 그린다. 올해 초까지도 그는 4월 9일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개막한 생애 최대 규모의 회고전 <데이비드 호크니 25>에서 선보일 작품 작업을 했다. 8월 31일까지 열리는 이 회고전은 호크니가 지난 25년간 창작한 작업물에 초점을 맞춘다.
루이비통 재단 초청 큐레이터이자 왕립예술원 전 관장인 노먼 로젠털 경에 따르면, 21세기 들어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한 호크니는 ‘작업의 폭과 집중도, 작품 생산량에 있어 피카소 같은 존재다’. 이번 회고전에는 ‘더 큰 첨벙’(1967), ‘클라크 부부와 퍼시’(1970~71), ‘예술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1972) 같은 초기 대표작도 일부 포함된다. ‘예술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은 2018년 경매에서 9,030만 달러에 낙찰되면서 생존 작가의 작품으로는 지금껏 최고가 기록을 지키고 있다.


호크니는 평생 피카소를 영웅으로 여겼다. 피카소가 그랬듯, 브랜드처럼 각인된 대중적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놀랄 만큼 많은 명작을 남겼다. 20대 중반부터 유명세를 얻은 호크니는 어두운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하고, 알이 크고 둥근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꾸밈없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스타일의 탄생이었다. 밋밋한 스타일 대신 줄무늬 의상을 즐겨 입었고, 밝은 색 양말을 신되 짝짝이로 신었다. 입가엔 늘 담배가 있었다. 그리고 피카소처럼 호크니 역시 수많은 초상화에 연인의 모습을 남겼다. 다만 호크니의 연인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영국에서 동성애가 여전히 불법으로 취급받던 시절, 왕립예술학교에 재학 중이던 호크니는 동성 사이의 성애와 일상을 대담하게 그려냈다. 장 뒤뷔페의 영향을 받아 각진 ‘아르 브뤼’(가공되지 않은 원초적 예술) 스타일의 인물을 그렸는데, 그림 속 네모난 남성들은 서로 껴안거나 입을 맞췄고(‘우리 달라붙은 두 소년’(1961)), 구강성교 장면에 등장했다(‘점착성’(1960)). 졸업 필수 과제였던 인체 습작은 동성애적 육체미 잡지 커버에서 본 근육질 남성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호크니가 처벌받았을까? 그 반대다.
그의 작품은 런던에서 매년 열리던 ‘영 컨템퍼러리즈’ 전시에 2년 연속 선정됐고, 언론은 찬사를 보냈다. 호크니는 졸업식 때 최우등에 해당하는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금빛 라메 재킷을 입고시상식에 나타났다. 1974년, 오랫동안 테이트 미술관 관장을 맡은 존 로덴스타인 경은 호크니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학생 시절부터 즉각적이고 글로벌한 성공을 누렸다. 내 경험상, 그런 성과를 거둔 진지한 화가는 본 적이 없다.” 호크니가 특유의 매력과 재능으로 상류 문화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긴 했다. 그는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영화감독 빌리 와일더와 절친한 사이였고, 앤디 워홀, 칼 라거펠트, 피카소의 딸이자 디자이너인 팔로마 피카소, 영화계의 토니 리처드슨이나 데니스 호퍼, 시인 스티븐 스펜더 등과도 교류했다. 워낙 폭넓게 어울린지라 일일이 이름을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듯한 세계를 정교하게 구축해내는 능력 덕분이다. 그 진가는 특히 LA를 다룰 때 두드러진다. 그는 누구보다 LA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각인시킨 작가다. 〈피지크 픽토리얼〉 같은 잡지나 게이 픽션물에서 접한 에로틱한 분위기로 LA를 이상화해 그리던 그는 1964년엔 아예 LA로 집을 옮겼다. 비행기 창밖 아래로 수많은 파란 수영장이 펼쳐지는 풍경을 내려다보며, 그는 마침내 진정한 고향을 찾았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호크니는 LA를 반짝이는 수영장과 우뚝 솟은 야자수, 낮고 길게 뻗은 모더니즘 주택이 평평하고 밝은 빛 속에서 빛나는 도시로 그려냈다. 도시는 그에게도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사람을 네모난 몸 위에 머리만 얹은 듯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러다 1966년, 친구이자 갤러리스트였던 닉 와일더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비로소 특정 인물의 얼굴을 담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호크니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UCLA에서 미술 강의를 시작했는데, 학기 초부터 열여덟 살 학생 피터 슐레진저(Peter Schlesinger)에게 반해버렸다. 이후 조각가로 유명해진 피터 슐레진저는 호크니의 인생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5년간 이어졌고, 1971년 그들이 이별하던 순간은 반 허구적 다큐멘터리 영화 〈A Bigger Splash〉에 내밀한 모습으로 담겼다. 한동안 호크니를 깊이 무너뜨린 이별. 그 감정은 작품으로도 옮아갔다. ‘예술가의 초상(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에서 이런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작품 속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서, 헤엄치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바로 슐레진저다. 물론 호크니가 다른 작품들에서 묘사한 수영장은 대체로 밝은 느낌이다. 1988년, 당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ACMA) 관장은 호크니의 회고전 도록에 이렇게 썼다. “많은 사람이 호크니의 작품을 통해 반짝이는 햇살과 수영장, 야자수가 가득한 남부 캘리포니아의 삶을 상상한다.”
그로부터 37년이 흘렀다. LA 지역을 휩쓴 산불이 채 가시기 전, 호크니에게 그 참상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그는 LA에 집을 두 채 두고 있다. 할리우드 힐스와 말리부 해변의 집. 남부 캘리포니아의 황금빛 꿈은 처참히 얼룩졌다. “나는 30년 동안 LA에 살았지만, 이제는 거기로 다시 돌아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는 질문지를 대신 읽어준 지인을 통해 이야기를 전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내 작은 집은 해변가 바위 위에 있는데, 나무 차고로 이어지는 계단 덕분에 불길을 피했을 거라고요. 그럴지도 모르죠. 글쎄요. 지금 LA는 분명 전보다 더 슬픈 곳이 됐을 겁니다.”
사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호크니에겐 어색하다. 이를테면 그는 과거를 정리하기보다 다가올 전시에서 선보일 새 작업을 만드는 쪽을 더 좋아한다. 최근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정원에 앉아 한 손엔 연필, 다른 손엔 담배를 든 채 나무를 그리는 모습이다. 간병인들의 초상도 있다. 노년기에 찾아오는,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다정하고 아련한 감정이 스민 그림들이다. “얼마 전 루이스와 소냐를 그렸어요. 내 간병인들. 이젠 두 사람의 얼굴을 잘 알거든요.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나도 그들을 바라보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실 누군가의 얼굴이 정말로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 어려워요.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다 달라요. 나무에 매달린 잎사귀처럼, 사람도 각기 다른 시기에 떨어진답니다. 나뭇잎이 한꺼번에 우르르 떨어지지는 않아요.”

호크니는 영국 북부 브래드퍼드의 노동자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회계사 사무실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평화주의자였고, 독실한 감리교 신자이자 채식주의자인 어머니는 살뜰하게 집안을 돌봤다. 호크니의 부모는 일찍부터 그의 예술적 재능과 열의를 알아보았기에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미술학교에 진학하겠다는 아들의 고집을 받아들였다. 최우등 학생으로 졸업한 호크니는 영국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슬레이드 미술대학과 왕립예술학교 대학원에 동시에 합격했다. 그는 왕립예술학교에서 1962년 학위를 받기 1년 전부터 이미 아트 딜러와 계약을 맺으며 런던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명성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보통의 아티스트들과 달리, 오히려 이른 나이에 얻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마흔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있었다.
노팅힐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호크니를 처음 만난 건 1978년이다. 당시 나는 젊은 잡지 기자였고, 호크니는 글라인드본 페스티벌에서 공연될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의 무대를 만드는 중이었다. 당시 인터뷰 때 남긴 메모를 오랜만에 들춰보니, 호크니는 나이 마흔에 자신이 이룬 업적의 무게를 짊어진 채 살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일은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려워요. 과거에 했던 작업들이 자꾸 떠오르거든요. 그게 짐이 되기도 하고, 도움이 되기도 해요. 물론 마음으로는 항상 더 나은 그림을 그리고 싶죠. 그런 마음이 없다면 계속할 이유도 없고 그냥 포기했겠죠.” 그 당시 호크니가 들려준 말이다. 한때 그는 자신의 초기 작품을 혹평하곤 했다. 끔찍하게 형편없고, 일관성도 없고, 한마디로 처참하다면서. 하지만 1970년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자신의 작품을 다시 본 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아이디어는 계속 끌고 가다가, 어떤 건 중간에 포기하고,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간 흐름이 보이더군요. 물론 위대한 예술가들은 남이 따라가고 싶을 만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요. 벨라스케스나 고야, 피카소처럼 그릴 수는 없어요. 그런 걸 시도한다면 말 그대로 미친 짓이죠. 내게 그런 재능은 아예 없으니까요.”
겸손한 태도와 달리, 호크니는 동시대 어떤 예술가보다 뛰어난 드로잉 실력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그에겐 자기 시대를 이끄는 예술가라는 이점이 있다. 젊은 시절 그는 동시대 아티스트들의 시도를 빠르게 흡수했다. 프랭크 스텔라와 재스퍼 존스가 시도한 변형 캔버스, 동심원을 반복한 케네스 놀런드 특유의 색면 추상은 호크니의 왕립예술학교 시절 작품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때는 내 그림이 모던 아트처럼 보여야만 괜찮은 작업이라고 믿었어요.” 수십 년 전,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점점 그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깨닫게 됐죠. 예술은 거꾸로 갈 수 없어요. 다들 눈앞에 있는 걸 그린다 해도 50년 전 방식 그대로 그릴 순 없는 거죠.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거든요. 그러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걱정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이후 호크니는 LA에 살면서 2차원 회화 안에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을 담아내는 데 깊이 몰두한다. 1980년대에는 점점 더 큰 규모의 콜라주를 만들기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큐비즘이 고정된 시선 아래 소실점으로 수렴하는 단일 시점 원근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처럼, 호크니 역시 정적인 시점에서 벗어난 회화를 상상했다. 사진을 조각처럼 다뤄 화면을 구축하던 그의 실험은 ‘페어블로섬 하이웨이’(1986)라는 작품에서 정점을 찍는다. 그는 700장이 넘는 사진을 조합해 사막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앞좌석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시선을 한 폭의 화면에 담아냈다. 회화에 움직이는 시선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스튜디오로 가는 길’(1980)에서는 구불구불한 도로가 점묘풍의 색면 패턴을 통과하며 이어진다.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감, 도로 지도처럼 탈색된 직선적 공간이 한 화면 안에서 겹친다.
이번 회고전에서 선보이는 작품의 상당수는 최신 기술을 향한 호크니의 집요한 관심을 드러낸다. 2008년 말, 그는 출시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폰으로 꽃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머문 LA를 떠나 영국 동요크셔 해안의 브리들링턴 마을로 거처를 옮겼을 즈음이다. “나는 늘 조그마한 스케치북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덕분에 아이폰으로도 드로잉을 잘할 수 있었죠. 화면이 작아도 불편하지가 않았던 거예요. 처음엔 거의 엄지손가락만으로 그렸어요. 나중에 스타일러스를 쓰긴 했지만, 초반에 그린 서른 장에서 마흔 장은 전부 내 엄지로 그린 겁니다.” 2010년 6월, 아이패드가 출시되자마자 호크니는 아이패드라는 새 스케치북을 곧장 마련했다. 종이에 잉크로 점을 찍고 선을 겹쳐 그리거나,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쌓아 올리던 그는 태블릿을 통해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직관적인 작업 방식을 시도할 수 있었다. 브리들링턴에 머무는 동안에는 다시 유화 작업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주변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덕분이다. 호크니는 그 풍경을 눈을 찌를 듯한 초록과 자극적인 보랏빛으로 그려냈는데, 흥미롭게도 그 색감은 아이패드 드로잉을 프린트한 이미지들과도 꽤 닮았다.


2019년, 호크니는 이번 회고전을 함께 구상한 그의 동반자, 장-피에르 곤살베스 데 리마(JP)와 함께 노르망디의 17세기 목조 주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도 호크니는 아이패드 스케치, 잉크 드로잉, 유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업했다. 집에 놀러 온 가족이나 친구들을 모델로 아크릴 초상화 시리즈 작업도 했다. 낯선 사람의 초상은 잘 그리지 않는 그가 해리 스타일스를 화폭에 담은 건 재밌고 이례적인 일이다. 느슨하고 여유로운 그 초상 작업은 지금 아흔을 앞둔 호크니가 지향하는 바를 잘 보여준다. “초상화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답니다. 이젠 캔버스에 밑그림도 거의 그리지 않아요. 그냥 바로 붓질을 시작하죠. 그래서 더 위험하긴 합니다. 머리를 어디에 그리든 몸도 거기에 맞춰 그려야 하니까. 그래도 재밌어요. 대부분 꽤 잘 나왔다고 생각하고요.” 파리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는 그의 초상화 작업에 큰 비중을 두고 기획되었다. 특히 호크니가 브리들링턴과 노르망디에서 그린, 즉 인생 후반에 작업한 회화와 드로잉을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전시는 1955년 브래드퍼드에서 아버지를 그린 초상화를 출발점 삼아 호크니의 방대한 작업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 아버지의 초상은 젊은 작가였던 호크니가 처음으로 ‘판매’한 작품이기도 하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작업 전체를 마주하는 순간 위축되곤 한다.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멈춰 서는 것이다. 호크니는 이번 회고전 전에도 여든을 맞은 2017년에 테이트 브리튼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대형 전시를 연 적이 있다. 그런 전시를 열 때마다 위축되거나 부담감을 느낀 적은 없는지 묻자, 그는 테이트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앨런 보우니스 경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했다고 떠올렸다. ‘큰 회고전을 치르고 나면 몇 달 동안 작업을 못하는 작가가 많다’는 말이었다. “글쎄요. 나는 그냥 계속합니다. 신경 쓰지 않아요.” 특유의 태연함으로 예술가에게 닥칠 수 있는 두려움을 가볍게 밀쳐낸 데이비드 호크니. 그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덧붙였다. “어차피 이 나이가 되면, 하던 일을 멈추는 것도 쉽지가 않아요.”
- 포토그래퍼
- JEAN-PIERRE GONÇALVES DE LIMA
- 글
- ARTHUR LUB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