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리스하고 모던한 디자인을 위한 아크리스

신지연

아크리스가 만난 서울

2025 F/W 파리 컬렉션이 막을 내린 직후, 4월의 어느 날. 아크리스(Akris)의 수장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버트 크리믈러(Albert Kriemler)가 한국을 찾았다. 그가 발레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그를 예술의전당 내 국립발레단 연습실로 초대했다. 아크리스의 옷을 입고 연습실에 선 강수진 단장과 그녀의 디렉션을 지켜보는 알버트 크리믈러.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예술이라는 실로 얽힌 그들이 만난 그 특별한 순간을 <더블유 코리아>가 포착했다.

“디자인을 하는 그 순간이 제 인생의 행복입니다.”
– 알버트 크리믈러

알버트 크리믈러와 강수진 단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강수진 단장이 착용한 오간자 소재 시스루 디테일 재킷, 팬츠는 아크리스 제품.

<W Korea>2023년 한국에서 아크리스 쇼를 한 이후 오랜만에 방문했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알버트 크리믈러(Albert Kriemler) 지금 아시어 투어 중이다. 도쿄와 홍콩을 거쳐 어제 서울에 왔고, 3일 후에 상하이로 향할 예정이다.

서울을 둘러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같다.
맞다. 하지만 이전에도 여러 번 방문했다. 서울을 처음 방문한 때가 30년 전인데, 그때 기억을 되돌아보면 지금의 발전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지금의 서울은 현재 아시아에서 가장 흥미롭고, 스타일리시하고, ‘힙’한 도시다.

이번 일정 중 특별히 기대하는 계획이 있다면?
미술관 투어를 할 예정이다. 내일 갤러리 송은에 갈 예정이고, 아! 당신이 나에게 준 이 선물을 산 리움도 갈 거다. 아모레퍼시픽 본사도 방문하는데, 그 건물을 디자인한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나의 오랜 친구다. 아크리스 매장도 항상 그가 디자인해준다. 그리고 오늘 촬영 덕분에 예술의전당 국립발레단도 만날 수 있었다. 짧지만 많은 곳을 둘러보고 갈 것 같다.

발레와 깊은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국립발레단에서 인터뷰와 촬영을 진행한 것이기도 하고.
발레와의 인연은 어느덧 20년이 되어간다. 그 시작은 무용수 존 노이마이어와의 만남이었다. 2006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Neujahrskonzert der Wiener Philharmoniker)의 인터미션 의상을 디자인해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그것을 계기로 그와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베토벤 프로젝트 II(Beethoven Project II)’, ‘투랑갈릴라(Turangalîla)’, ‘요셉의 전설(The Legend of Joseph)’ 작품들부터, 최근 독일 함부르크 발레단과 작별을 고하는 ‘에필로그(Epilogue)’까지 총 6개 작품의 의상을 디자인했다. 존과 오랜 시간 함께하며 자연스럽게 발레에 대한 애정도 깊어진 듯하다. 현재는 존과 2026년 신년 공연을 위한 협업도 진행 중이다. 내년 1월 1일 TV를 틀면 내가 디자인한 옷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국립발레단 연습실 안, 강수진 단장이 단원들에게 안무를 지도하고 있다. 비대칭 슬리브리스 원피스는 아크리스 제품.

촬영을 준비하며 당신과 존 노이마이어, 강수진 단장님까지 세 사람의 연결 고리를 알고 놀랐다. 당신은 존과 오랜 기간 다양한 작업을 함께해왔고, 강수진 단장님과 존 노이마이어는 무용수 시절부터 5월 초연하는 ‘카멜리아 레이디’까지 인연이 아주 깊더라. 인터뷰 전 단장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데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하다.
맞다. 존 노이마이어와 강수진 단장 또한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더라. 존도 곧 ‘카멜리아 레이디’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다고 들었다. 전 세계 발레 커뮤니티는 생각보다 좁고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존부터 서로 연결되어 있는 안무가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쉽게 대화를 멈출 수 없었다. 강수진 단장이 나에게 발레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고 하더라(웃음).

가장 최근 존과 함께한 ‘에필로그’ 협업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에필로그’는 존이 발레 무용수로서, 발레의 수장으로서, 그리고 초창기 안무가로서 여러 무대에 섰던 자신의 모습을 집약한 일종의 자서전적 발레 작품이다. 자전적 내용인 만큼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고 했다. 존이 이탈리아 작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를 언급하며 그 색감에서 컬러 팔레트를 떠올려보자 제안해, 그의 작품을 면밀히 들여다보았다. 르네상스 회화 특유의 숭고하고 고요한 색감,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다채로운 톤에 매혹되었다. 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파스텔 색상에 ‘우유’를 한 스푼 섞은 듯한 색감이다. 단순한 파스텔 톤이 아닌 우유 섞인 파스텔 컬러였기 때문에 그 색상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연구를 거쳤다. 그 끝에 화이트, 에크루, 페일 핑크를 중심으로 한 감각적이고 따뜻한 컬러 팔레트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또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and Garfunkel)의 음악을 들으며 무용수의 움직임을 상상했고, 그 흐름에 따라 의상을 완성했다.

울 소재 더블 페이스드 재킷, 원피스는 아크리스 제품.
울 소재 더블 페이스드 재킷, 원피스는 아크리스 제품.

이야기를 듣다 보니 디자인을 할 때 색이 중심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색에서 시작한다. 프로젝트 첫 두 달 동안은 온전히 색에 몰입한다. ‘에필로그’를 준비하며 앞서 말했듯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색감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2025 S/S 컬렉션에서도 그 컬러 팔레트를 계속 이어가려고 했고, 르네상스와 15세기 이탈리아 만토바를 더 깊이 파고들어 진화한 컬러 팔레트를 만들어냈다. 색은 단순한 시각 요소가 아니다. 각 지역, 문화, 기후, 유행, 심지어는 기분에 따라 색에 대한 인식이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여전히 색상 개발은 어렵지만 가장 흥미로운 작업이기도 하다.

최근 선보인 2025 FALL 컬렉션에서는 블루에 집중한 룩을 선보였다.
맞다. 2025 FALL 컬렉션을 앞두고는 블루에 빠져 ‘Blue Hour’라는 주제로 컬렉션을 구성했다. 블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인데, 시적이면서 강렬한 느낌이다. 한 가지 색상만으로 컬렉션을 구상하면 자연스럽게 그 안의 소재나 디테일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색상과 원단은 단순히 디자인적 요소를 넘어, 분명한 메시지를 갖게 되는 점이 재밌다.

건축, 음악, 미술, 발레 등 당신의 예술적 조예나 범위가 인상적이다. 디자인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가?
모든 영감은 다 ‘우연’에서 비롯된다. 면밀한 계획보다는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편이어서 특정 아티스트를 정하고 시작하지 않는다. 떠오르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2013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의 일이다. 공원을 걷다 하얀 금속 막대기와 유리판으로만 이루어진 멋진 파빌리온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앉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걷고 대화하는데 사람과 건축이 소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일본 건축가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의 서펜타인(Serpentine) 파빌리온이었다. 기존 미니멀리즘 건축이 콘크리트나 강철을 사용해 차갑거나 폐쇄적이라고 느껴졌다면, 그의 작업은 아늑하고 실용적이었다. 언젠가꼭 그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2년 뒤 실제로 협업이 이루어졌다. 돌아보면 이런 우연한 순간이 쌓여 영감을 주는 것 같다.

연습실을 방문한 알버트 크리믈러와 강수진 단장. 두 아티스트들의 대화는 좀체 멈추질 않았다. 강수진 단장이 착용한 더블브레스트 재킷, 팬츠는 아크리스 제품.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해두는 타입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다.
필요할 때는 계획하지만, 장기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는 편이다. 작년 이맘때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을지 몰랐다. 5월엔 발레에 빠져 6월, 7월까지 발레 관련 작업을 하다 10월엔 갑자기 색상에 집중한 컬렉션을 선보였으니,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눈치챌 것이다(웃음).

40년이 넘도록 디자인을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까?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은 여성을 보는 순간. 그 모습은 매번 특별하고 감동적이다. 아크리스의 옷을 선택하는 고객은 절제된 세련미를 사랑한다. 유행을 타지 않는 모던함 말이다. 개인적으로 과시하는 옷을 좋아하지 않기에, 내가 생각하는 원단, 비율, 품질, 핏 같은 사소한 디테일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아크리스의 옷을 일상에서 입은 여성을 보면 행복하다.

한 가지 아이템을 추천한다면?
18게이지 울 소재 티셔츠다. 매우 정교한 니트 기계로 제작한 이 아이템은 착용감은 물론 핏까지 독보적이다. 지금 당신이 그 티셔츠를 연출한다면 젊은 감각으로 연출할 수도, 좀 더 나이가 있는 사람이 입는다면 우아한 느낌으로 연출할 수도 있다. 결국 옷은 삶 속에서 입는 것이기에, 편안함과 클래식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옷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사업가든, 예술가든, 주부든, 그들이 어디에 있든 자연스럽게 입을 수 있는 옷.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주일 내내 그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무엇일지 생각하며 살아간다.

강수진 단장이 착용한 재킷과 원피스는 아크리스 제품.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Timeless(시대를 초월한)’. 시대를 초월하면서, 모던한 디자인을 하려 한다. 사실 나도 그 균형을 찾기 위해 아직까지 끊임없이 연구하는 중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아시아 투어를 끝낸 이후 당신의 여정은? 투어를 떠나기 전, 크루즈 컬렉션에 대한 영감과 구상을 팀원들에게 남기고 와서 빨리 팀원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는 런웨이 준비를 하지 않을까? 매일이
디자인의 연속이다, 하지만 컬렉션을 디자인하며 행복을 느낀다.

당신의 디자인 여정에 이번 서울 방문이 인상 깊게 남기를 바란다.
아직 이틀밖에 안 지났지만 매우 인상적이다. 서울에서 이렇게 쌀쌀한 날씨는 처음이다. 내가 사는 곳과 굉장히 비슷한데, 그래서 떠날 때 입고 온 이 재킷을 매일 입고 있다. 이런 날씨를 경험하니 ‘트위스트 코튼 와일드 소재나 코튼 포플린 소재로 의
상을 제작하면 어떨까?’라는 즐거운 상상까지 해봤다. 궁금하기도 하다. 확실히 인상적인 방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포토그래퍼
장정우
모델
강수진
헤어
홍현승
메이크업
조혜미
어시스턴트
나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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